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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풍류황제 송 휘종은 어디에 묻혀있는가?
北宋徽宗、钦宗葬地小考
북송휘종、흠종장지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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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만주학회 바로가기
  • 간행물
    만주연구 바로가기
  • 통권
    제11집 (2011.06)바로가기
  • 페이지
    pp.149-177
  • 저자
    김관웅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145453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송사』ㆍ『금사』 등 중국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정강지변’이후 북송의 휘종과 흠종 이 두 부자 황제는 금나라에 의해 중국 동북지역의 오국성에 포로로 끌려와서 감금되었다고 한다.1135년 휘종은 54세를 일기로 오국성 에서 죽은 뒤 금나라 희종은 송 휘종을 지금의 중국 하남성 낙양시 부근에 매장했다고 한다.1142년,송과 금의 협의에 좇아 휘종의 유골은 임안으로 반환되었고 송 고종은 그 유골을 소흥근교의 영우릉에 매장했다고 한다.흠 종은 1156년 연경에서 57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는데,금나라에서는 그의 시 신을 지금의 하남성 공현에 매장했다고 한다.그러나 천년 가까운 세월 속 에서 오국성과 휘종․흠종의 매장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여 통일되는 결론에 이르지 못하여 이는 천고의 미스터리로 되었다. 본 논문은 문헌고증학의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주로 조선 및 중국의 역사 문헌들을 통하여 오국성의 지리적 위치와 휘종ㆎ흠종의 매장지에 대해 비 교적 상세한 고증을 진행함으로써 초보적으로 오국성은 지금 조선 함경북도 회령의 운두산성이 고, 휘종ㆍ흠종의 매장지는 지금의 조선 함경북도 회 녕이라는 가설을 제기하였다.
중국어
据≪宋史≫、≪金史≫等中国正史的记载,“靖康之变”后, 北宋徽宗、钦宗这两位父子皇帝被捕,作 为俘虏押解到位于中国东北方的五国城。1135年,徽宗 死于五国城,享年54岁。金熙宗将他葬于今河南省洛阳市附近。1142年,宋金根 据协议,将宋徽宗遗骸运回临安,由宋高宗葬之于永佑陵。1156年,钦宗在燕京 病死,终年57岁,金朝将其葬于今河南省巩县。然而,近千年以来,围绕着五国城 的地理位置以及徽宗、钦宗的葬地,众说纷纭,莫衷一是,成为千古疑案。 本论文采用文献考证学的研究方法,主要援用朝鲜朝时期的历史文献以及中国 宋金元时期的历史文献,对五国城的地理位置以及徽宗、钦宗的葬地进行了较为 详尽的考证, 初步提出了“五国城为今朝鲜咸镜北道会宁云头山城”、“徽宗、钦 宗的葬地为今朝鲜咸镜北道会宁”的假说。

목차

국문초록
 1. 예술가의 기질을 갖고 태어난 亡國之君宋徽宗
 2. 徽宗ㆍ欽宗의 北遷行踪과 이들의 流配詩詞
 3. 五里霧中에 빠진 徽宗ㆍ欽宗의 葬地
 4. 徽宗ㆍ欽宗의 무덤에 관한 조선조 문헌자료들에서의 기록
 5. 徽宗ㆍ欽宗의 무덤에 관한 중국 문헌자료들에서의 기록
 6. 마무리는 말
 참고문헌
 中文摘要

키워드

휘종 흠종 오국성 매장지 문헌고증 宋徽宗 宋钦宗 五国城 葬地 文献考证

저자

  • 김관웅 [ 金宽雄 |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만주학회 [The Manchurian Studies Association]
  • 설립연도
    1998
  • 분야
    인문학>역사학
  • 소개
    만주는 우리들에게 전설의 땅입니다. 19세기말까지 조선의 식자들에게 외면되었던 이곳은 신채호선생에 의해 민족의 발상지로, 한민족 역사의 중심무대로 나타났던 곳이고, 해방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곳입니다. 또한 남북한 지도자들을 잉태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중요한 곳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의 의미는 한국과의 관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만주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공자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학문의 변방입니다. 기실 이 곳은 지난 수백년간 동아시아 변동의 핵이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여러 융합을 시험했습니다. 유목문화와 유교문화, 혹은 티벳불교와 회교, 유교, 혹은 여러 민족의 접합을 시도, 이것을 토대로 세계최대의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말 이 곳은 흥기하는 러시아와 기타 서양열강, 그리고 일본 세력이 마주친 접점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이 곳을 손에 넣으면서 1930년대의 기록적인 번영을 구가했고, 나아가 대동아공영과 서양과의 최종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이 곳에 투자한 세계적 수준의 중화학단지는 전후 중국의 중공업단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만주는 중국 국공내전 최후의 쟁패가 결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이곳은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조선인, 일본인, 몽골인들이 같이 거주한 가히 인종전시장이었습니다. 그야말로의 국제도시 하얼빈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유태인, 프랑스인, 독일인, 폴랜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들도 섞어 살았습니다. 편협한 민족경계를 넘는 담론이 구사된 곳이었습니다. 제한적인 수준이며,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세계화의 개념 비슷한 것이 제시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만주는 간단하지 않은 곳입니다. 근년에 만주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주학회를 결성했습니다. 전공배경도 중국사, 일본사, 역사사회학 등에 두루 걸쳐지지만, 만주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평생 만주연구에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간행물

  • 간행물명
    만주연구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 간기
    반년간
  • pISSN
    1738-3668
  • 수록기간
    2004~2011
  • 십진분류
    KDC 912 DDC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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