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icle

현재 위치 Home

특집 : 역사와 문학 속의 만보산 사건 - 80주년에 즈음하여

만보산 사건과 『리턴 보고서』 -재만 조선인에 관한 조사결과를 중심으로-
The Wanbaoshan(萬寶山) Affair and “Lytton Report”: Regarding The Problem of Koreans in Manchuria

첫 페이지 보기
  • 발행기관
    만주학회 바로가기
  • 간행물
    만주연구 바로가기
  • 통권
    제11집 (2011.06)바로가기
  • 페이지
    pp.7-33
  • 저자
    고바야시 레이코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145448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1931년 7월 1일 장춘 근교 만보산에서 이주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이 충 돌하여,일본 영사관 경찰이 발포한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였다.본고에서는 제3기관인 국제연맹에서 파견된 리튼 위원회가 만보산 사건을 조사하면서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리튼 위원회는 만보산 사건에서 드러난 만주문제 중 재만 조선인의 지위 문제를 주의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 시하였다. 재만 조선인의 법적 지위에 대해 중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리튼 위원회는 재만 조선인의 중국 귀화 문제도 유의하였다.일본에게 재만 조선인은 단속 대상이었으며,중국에 귀화한 조선인의 경우 중국이 일본 관할권을 부인할 우려가 있었으나,구입한 토지를 일본에게 양도하게 하였다.한편 중국인에 게 조선인은 수전경작(水田耕作)의 우수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의 만 주침탈을 돕는 첨병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리튼 위원회는 스스로 조사하고 파악한 후에 재만 조선인 은 중일 대립구조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배려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이해하 였다.리튼 위원회는 재만 조선인의 거주권을 보호하는 최종적인 수단은 중 일간의 분쟁조정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을 통해서 양당사국의 합의에 따라 선발된 재판관으로 구성된 중재재판소를 성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견해를 보였다. 본고는 제3기관인 리튼 위원회가 재만 조선인의 지위는 배려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밝힌 점에 의의가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조사위원회가 파악한 만보산 사건
 3.재만 조선인의 어려움과 조사위원회의 배려
 4.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키워드

만보산 사건 『리튼 보고서』 조사위원회 재만 조선인 상조권 the Wanbaoshan Affair “Lytton Report” The Lytton Commission Koreans in Manchuria the right to lease land

저자

  • 고바야시 레이코 [ Kobayashi Reiko | 광운대학교 동북아대학 조교수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만주학회 [The Manchurian Studies Association]
  • 설립연도
    1998
  • 분야
    인문학>역사학
  • 소개
    만주는 우리들에게 전설의 땅입니다. 19세기말까지 조선의 식자들에게 외면되었던 이곳은 신채호선생에 의해 민족의 발상지로, 한민족 역사의 중심무대로 나타났던 곳이고, 해방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곳입니다. 또한 남북한 지도자들을 잉태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중요한 곳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의 의미는 한국과의 관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만주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공자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학문의 변방입니다. 기실 이 곳은 지난 수백년간 동아시아 변동의 핵이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여러 융합을 시험했습니다. 유목문화와 유교문화, 혹은 티벳불교와 회교, 유교, 혹은 여러 민족의 접합을 시도, 이것을 토대로 세계최대의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말 이 곳은 흥기하는 러시아와 기타 서양열강, 그리고 일본 세력이 마주친 접점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이 곳을 손에 넣으면서 1930년대의 기록적인 번영을 구가했고, 나아가 대동아공영과 서양과의 최종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이 곳에 투자한 세계적 수준의 중화학단지는 전후 중국의 중공업단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만주는 중국 국공내전 최후의 쟁패가 결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이곳은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조선인, 일본인, 몽골인들이 같이 거주한 가히 인종전시장이었습니다. 그야말로의 국제도시 하얼빈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유태인, 프랑스인, 독일인, 폴랜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들도 섞어 살았습니다. 편협한 민족경계를 넘는 담론이 구사된 곳이었습니다. 제한적인 수준이며,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세계화의 개념 비슷한 것이 제시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만주는 간단하지 않은 곳입니다. 근년에 만주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주학회를 결성했습니다. 전공배경도 중국사, 일본사, 역사사회학 등에 두루 걸쳐지지만, 만주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평생 만주연구에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간행물

  • 간행물명
    만주연구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 간기
    반년간
  • pISSN
    1738-3668
  • 수록기간
    2004~2011
  • 십진분류
    KDC 912 DDC 951

이 권호 내 다른 논문 / 만주연구 제11집

    피인용수 : 0(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함께 이용한 논문 이 논문을 다운로드한 분들이 이용한 다른 논문입니다.

      페이지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