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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역사와 문학 속의 만보산 사건 - 80주년에 즈음하여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1931’s Anti-Chinese Riots and Nationalist Disc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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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만주학회 바로가기
  • 간행물
    만주연구 바로가기
  • 통권
    제11집 (2011.06)바로가기
  • 페이지
    pp.85-115
  • 저자
    이상경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145451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이 연구는 1931년 중국 만보산 지역에서 수로 개간을 둘러싸고 중국인과 조선 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분쟁이 빌미가 되어 식민지 조선에서 발생한 중 국인 배척 폭동인 ‘배화 사건’의 의미를 당시의 민족주의 담론의 전개 과정 과 관련지어 밝히는 데 목적을 두었다.이를 위해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가 벌인 민족주의 담론 경쟁이 만보산 지역 사건 보도에 미친 영향과 당시 평양에서 ‘배화 사건’ 을 경험한 오기영과 김동인의 수기에서 민족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을 분석하였다. 먼저 만보산 지역에서의 수전 개간을 둘러싸고 중국인 농민과 조선인 농 민이 갈등한 ‘만보산 지역 사건’과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중국인 배척 폭 동인 ‘배화 사건’은 따로 떼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둘째 ‘배화 사건’의 빌 미를 제공한 조선일보 의 오보는 그전부터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가 벌 여온 민족주의 담론 경쟁에서 야기된 것이다.셋째 사회주의에 대한 대타의 식으로 더 강화된 담론 경쟁에서 가지게 된 조선일보 의 조급성이 오보를 낳은 결정적인 원인이다.넷째 ‘배화 사건’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은 매우 소 략하고 그 교훈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사건 직후 씌어진 오 기영의 수기는 반성적인 민족주의자의 입장을 보여주지만 그보다 늦게 나 온 김동인의 수기는 오히려 사건 당시의 민족의식의 ‘오용’을 그대로 노출 하고 있다.그 결과 ‘배화 사건’은 민족의식의 오용에 대해 반성할 기회가 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 었고 식민주의자 일본으로서는 중국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기에 보도 통제와 의식적 외면 속에서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민족주의 담론 경쟁
 3. ‘배화 사건’에 대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상반된 설명
 4. ‘배화 사건’이후의 기록과 기억
  1) 재판보도에 드러난 가해자의 진술
  2) 사회주의자의 구조적 통찰
  3) 민족의식 발현의 두 가지 방향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키워드

‘배화 사건’ 만보산 사건 오기영 김동인 민족주의 담론 「붉은 산」 나카니시 이노스케 1931’s anti-Chinese riots Wanpaoshan incident Oh Gi-young Kim Dong-in Nationalist discourse “Red Mountain” Nakanisi-inosuk

저자

  • 이상경 [ Lee, Sang-Kyung |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만주학회 [The Manchurian Studies Association]
  • 설립연도
    1998
  • 분야
    인문학>역사학
  • 소개
    만주는 우리들에게 전설의 땅입니다. 19세기말까지 조선의 식자들에게 외면되었던 이곳은 신채호선생에 의해 민족의 발상지로, 한민족 역사의 중심무대로 나타났던 곳이고, 해방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곳입니다. 또한 남북한 지도자들을 잉태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중요한 곳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의 의미는 한국과의 관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만주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공자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학문의 변방입니다. 기실 이 곳은 지난 수백년간 동아시아 변동의 핵이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여러 융합을 시험했습니다. 유목문화와 유교문화, 혹은 티벳불교와 회교, 유교, 혹은 여러 민족의 접합을 시도, 이것을 토대로 세계최대의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말 이 곳은 흥기하는 러시아와 기타 서양열강, 그리고 일본 세력이 마주친 접점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이 곳을 손에 넣으면서 1930년대의 기록적인 번영을 구가했고, 나아가 대동아공영과 서양과의 최종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이 곳에 투자한 세계적 수준의 중화학단지는 전후 중국의 중공업단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만주는 중국 국공내전 최후의 쟁패가 결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이곳은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조선인, 일본인, 몽골인들이 같이 거주한 가히 인종전시장이었습니다. 그야말로의 국제도시 하얼빈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유태인, 프랑스인, 독일인, 폴랜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들도 섞어 살았습니다. 편협한 민족경계를 넘는 담론이 구사된 곳이었습니다. 제한적인 수준이며,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세계화의 개념 비슷한 것이 제시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만주는 간단하지 않은 곳입니다. 근년에 만주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주학회를 결성했습니다. 전공배경도 중국사, 일본사, 역사사회학 등에 두루 걸쳐지지만, 만주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평생 만주연구에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간행물

  • 간행물명
    만주연구 [Journal of Manchurian Studies]
  • 간기
    반년간
  • pISSN
    1738-3668
  • 수록기간
    2004~2011
  • 십진분류
    KDC 912 DDC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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