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에서는 만보산 사건 관련 언설 중 일본문단에서 생산된 소설을 고찰 대상으로 한다.그 대표적인 문학작품에는 이토 에이노스케(伊藤永之 介)의 단편소설「만보산(万宝山)」(1931.10)과 장혁주(張赫宙)의 장편소설 개간 (開墾) (1943.4)이 있다.만보산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일본어소설 「만보산」과 개 간 은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만 하나는 농민문학,또 다른 하나 는 개척문학으로 분류된다.작가가 어떠한 동기로,무엇을 목표로 하여 ‘사 건’(사실)을 재해석하고 서사하였는지,그리고 무엇보다 그 근저에 깔린 이 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만보산 사건을 형상화하는 문학적 담론들을 이해하고 ‘사건’과 표상을 읽어내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만보산 사건이 일본 문학에서 어떻게 서사되는지를 고찰 하기 위해 먼저 만보산 사건이 일본에 보도된 몇 가지 예를 신문잡지 기사 를 통해 살펴보고,「만보산」과 개간 의 작가들이 어떠한 행보를 거쳐 어떠 한 문단적 상황 하에서 각각의 작품을 창작하였고 어떻게 서사하였는지를 확인하여 작가가 어떠한 동기로,무엇을 목표로 하여 ‘사건’을 재해석하고 서술하였는지,그리고 근저에 깔린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하 였다. 프롤레타리아문학 단체들의 전성기에 단체 중앙위원회의 지도에 따라 식 민지문제를 다루면서 일본과 조선 농민들의 연대를 지향하면서도 후쿠모토 식의 계몽적 계급의식이 아니라 농민들에 의한 농민들의 문학을 이상으로 했던 이토 에이노스케는 이중으로 고통 받는 만주의 조선인들을 일본제국 주의 고발을 통해 그려냈다. 식민지 출신으로 일본 중앙문단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주목 받던 장혁주는 조선인으로서 자신이,그리고 자신의 민족이 제국 안에서 자리매 김하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였고,이를 만주를 통해 그리려 하였다. 그러한 모색을 통해 획득된 장혁주의 시선이 이토 에이노스케가 ‘만보산 사 건’을 바라 보는 그것보다 더 제국적인 것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굴절된 것이지만,이 역시도 역사의 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만주는 우리들에게 전설의 땅입니다. 19세기말까지 조선의 식자들에게 외면되었던 이곳은 신채호선생에 의해 민족의 발상지로, 한민족 역사의 중심무대로 나타났던 곳이고, 해방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곳입니다. 또한 남북한 지도자들을 잉태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중요한 곳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의 의미는 한국과의 관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만주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공자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학문의 변방입니다. 기실 이 곳은 지난 수백년간 동아시아 변동의 핵이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여러 융합을 시험했습니다. 유목문화와 유교문화, 혹은 티벳불교와 회교, 유교, 혹은 여러 민족의 접합을 시도, 이것을 토대로 세계최대의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말 이 곳은 흥기하는 러시아와 기타 서양열강, 그리고 일본 세력이 마주친 접점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이 곳을 손에 넣으면서 1930년대의 기록적인 번영을 구가했고, 나아가 대동아공영과 서양과의 최종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이 곳에 투자한 세계적 수준의 중화학단지는 전후 중국의 중공업단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만주는 중국 국공내전 최후의 쟁패가 결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이곳은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조선인, 일본인, 몽골인들이 같이 거주한 가히 인종전시장이었습니다. 그야말로의 국제도시 하얼빈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유태인, 프랑스인, 독일인, 폴랜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들도 섞어 살았습니다. 편협한 민족경계를 넘는 담론이 구사된 곳이었습니다. 제한적인 수준이며,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세계화의 개념 비슷한 것이 제시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만주는 간단하지 않은 곳입니다. 근년에 만주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주학회를 결성했습니다. 전공배경도 중국사, 일본사, 역사사회학 등에 두루 걸쳐지지만, 만주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평생 만주연구에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