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량정권의 對韓人政策 -‘만보산 사건’의 遠因을 찾아서-
Zhang-xueliang Regime’s Policy toward the Korean Residents:In Search of the longterm Origins of the ‘Wanbaoshan Incident' 장학량정권의 대한인정책 -‘만보산 사건’의 원인을 찾아서-
1931년 7월 초 중국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지역에서 중국농민과 한인 사 이에 수로개착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났다.이 갈등에 일본이 개입하게 되 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가 국내에 과장되게 보도함으로써 화교배척사건 이 일어나 국제적 문제가 되었다.본 논문에서는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遠 因을 찾아서 장학량정권의 대한인정책을 분석하였다. 이 사건은 수전개발 그리고 중국관헌들의 한인에 대한 억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장학량정권의 수전장려정책은 한인들이 만주지역에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하지만 한인에 대한 일관되지 못한 정책은 한인들 의 불신을 초래하였다.그리고 관헌들의 부패와 폭력적 억압으로 인하여 한 인들은 일본영사관에 의탁하는 일이 일어났다.결국 장학량정권의 한인에 대한 일관되지 못한 정책과 지방관헌들의 부패 및 지나친 단속이 ‘만보산 사건’의 遠因으로 작용하였다 하겠다.
만주는 우리들에게 전설의 땅입니다. 19세기말까지 조선의 식자들에게 외면되었던 이곳은 신채호선생에 의해 민족의 발상지로, 한민족 역사의 중심무대로 나타났던 곳이고, 해방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곳입니다. 또한 남북한 지도자들을 잉태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중요한 곳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의 의미는 한국과의 관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만주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공자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학문의 변방입니다. 기실 이 곳은 지난 수백년간 동아시아 변동의 핵이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여러 융합을 시험했습니다. 유목문화와 유교문화, 혹은 티벳불교와 회교, 유교, 혹은 여러 민족의 접합을 시도, 이것을 토대로 세계최대의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말 이 곳은 흥기하는 러시아와 기타 서양열강, 그리고 일본 세력이 마주친 접점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이 곳을 손에 넣으면서 1930년대의 기록적인 번영을 구가했고, 나아가 대동아공영과 서양과의 최종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이 곳에 투자한 세계적 수준의 중화학단지는 전후 중국의 중공업단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만주는 중국 국공내전 최후의 쟁패가 결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이곳은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조선인, 일본인, 몽골인들이 같이 거주한 가히 인종전시장이었습니다. 그야말로의 국제도시 하얼빈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유태인, 프랑스인, 독일인, 폴랜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들도 섞어 살았습니다. 편협한 민족경계를 넘는 담론이 구사된 곳이었습니다. 제한적인 수준이며,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세계화의 개념 비슷한 것이 제시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만주는 간단하지 않은 곳입니다. 근년에 만주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주학회를 결성했습니다. 전공배경도 중국사, 일본사, 역사사회학 등에 두루 걸쳐지지만, 만주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평생 만주연구에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