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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다도의 정치적 요소 KCI 등재

박전열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19호 2010.12 p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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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

오늘날의 일본다도는 사색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중요시하며 절제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취미활동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도의 양식을 확립되어 가던 16세기 후반에 정권을 장악한 무장(武將)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이하 히데요시)는 다도를 사적인 취미활동의 영역이 아니라, 부하를 장악하고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이벤트로써 활용하였다. 우리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긴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는 다인(茶人)을 측근으로 두고 다도(茶道)를 즐기는 한편, 일종의 새로운 방식의 다도 이벤트를 개최하는 한편, 무력에 의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부하 무장들에게 명품 다도구(茶道具)를 하사하여 환심을 사기도 하고, 천황을 모시고 다회를 개최함으로써 다도를 새로운 양식의 의례(儀禮)로 삼아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평상시는 물론 전투 중에도 진지에서 다회를 열었는데, 특히 임진왜란 중에 규슈의 나고야(名護屋)에 진영을 설치하여 전투를 지휘하는 기간에, 여러 차례 다회를 즐기며 전쟁을 독려했던 사실은 다도가 평화와 전쟁에 두루 동원된다는 다도의 양면적 성격을 극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본고는 히데요시가 개최한 각종 다도 행사 즉, 대중을 동원한 대규모 다회, 천황과 공경을 모신 궁중의 다회, 전투중의 진지에서 연 다회 등을 정리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히데요시의 다도는 당대의 절대 권력가가 주도한 다도라는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후 일본다도의 방향과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이벤트였다고 생각한다. 히데요시는 당대의 최고 다인인 센리큐(千利休 1522-1591)를 측근에 두고 각종 이벤트를 기획하도록 하였다. 창작능력과 기획능력이 탁월한 센리큐는 각종 다도 이벤트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본고에서는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16世紀末戦国時代の終り頃、茶道はすでに京都を中心にする武家社会に広く根付いていて、個人の趣味活動であると同時に武士の教養として評価された。武士は茶道具を収集し、茶道行事に参加することで、武功だけではなく文化面にも識見をもつことを誇示しようとした。生死が行き違う戦地で緊張した時間を過ごさなければならない武士にとって茶道は心を浄化させる時間と空間を提供してくれる特別な文化世界と認識された。秀吉は40歳頃から茶道を趣味にした。1585年、京都の大徳寺で大規模な茶会を開き天皇を主賓に招待することで権威を誇った。1585年、1586年には宮廷で天皇一家のための茶会を開催し、1587年には北野神社の境内で大規模の茶会を開催して、自分は茶道の愛好家であることを広く知らせた。秀吉は病気で死ぬ直前まで度々盛大な茶会を開き、茶道に対する強い愛着を現わした。秀吉は私的には茶道に凝って茶道具を収集し、側近を招いて茶会を楽しんだ。このような趣味は公的な場にも拡がって政治の手段にして茶道具の献上させるとか、集めた茶道具の下賜、すなわち茶道具の贈答を通じて部下の忠誠を誓約させて信頼を確保する手段にした。また、茶道を政治イベントとして企画・進行して、新しい政治行事としての展示效果をもはかった。秀吉は強い経済力を駆使して黄金で組み立て式の茶室を作って宮廷をはじめ各地に持ち込んで茶会を開いた。宮廷で天皇のために茶会を開催するという名分は事実上、自分の位相を誇示するためのことであり、これを行うための経済力と茶人を掌握していたことを誇示しようとした。以上の論をまとめると、秀吉は個人的な趣味として茶道を楽しむ一方、公的には政治の手段にするために茶道具の収集と下賜、自分の力量を誇示するためのイベントをもっての茶会を開催して茶道の文化的特質を最大限活用したと言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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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0원

본 논문은 『소학생전집』근대 교양아동도서의 집대성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아동문예사에 있어서 『소학생전집』의 의의를 재조명하기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소학생전집』에 수록된 작품 중 일본의 고전문학작품을 바탕으로 재생산된 ‘역사 동화’의 양상과 특징에 대해 고찰하였다. 일본의 근대는 역사와 관련된 문학작품인 신화와 군담소설이 중시되었고 역사 교육에 있어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위인전이 다수 간행되었다. 근대의 소학교 교과과정에 대응하여 구성 기획된 『소학생전집』 역시 다수의 역사 이야기와 위인 전을 수록하고 있으며 천황의 신성성과 충성을 강조하던 당대의 기조가 반영되어 헤이안 시대의 문학작품이나 인물은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또 한 기쿠치 칸이 저술한 역사물을 통해 일본의 ‘해외진출(식민지확대)’의 역사를 중 시했다는 점을 바탕으로 『소학생전집』에 수록된 ‘신공황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 관련된 이야기를 고찰하였다. ‘신공황후’이야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중세에서 근세에 큰 영 향을 준 『하치만구도쿤』의 일화를 일부 수록하고 있으며 삽화의 경우 근대 이후 강조되었던 국모로서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으나 동시대 교과서와의 비교를 통해 구성면에 있어서는 근세로부터 이어져 온 천황의 계보를 잇는 인물상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우 근세의 ‘다이코키물’을 바탕으로 하여 출세의 대표적인 인물로 위인전에 수록되었으며 조선출정의 계기에 있어서는 『조선정벌기』의 일화를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Shogakuseizenshu (小学生全集)” is a complete collection for modern Japanese children published from 1927 to 1929. This book consists of 88 volumes containing various contents such as literature, history, science, art, hobbies, and sports. This study focused on aspec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historical fairy tales” reproduced based on Japanese classical literature among the works included in the “Shogakuseizenshu.” In modern Japan, myths and epic military tales were valued as literary works related to history, and in history education, many works centered on great men were included. Literature and characters from the Heian period were not included in the “Shogakuseizenshu” because they were disloyal to the emperor. In terms of content, loyalty to the emperor and overseas expansion (justification of the colonial policy) were the main themes and were closely related to the intent behind the textbook’s compilation. The “Shogakuseizenshu” used many related materials in addition to the main text (classical literature) to create historical stories for children. The biographies of the mythical Empress Jingu (神功皇后) and Toyotomi Hideyoshi (豊臣 秀吉) are each centered on anecdotes about the “Conquest of the Kore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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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0원

본 논문은 근세 초기에 도요토미 히데쓰구에 대한 인식의 정립과정과 권력과의 관계를 서술한 것이다. 먼저 『우라미노스케(恨の介)』에서는 히데쓰구 사건에 대해서는 간략히 기술되어 있을 뿐 히데쓰구의 악행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다이코사마 군키노우치(太閤さま軍記のうち)』는 당시 권력을 지닌 히데요시의 편에서 기술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서 본서를 계기로 히데쓰구의 온갖 악행이 부풀려지고 정착된 계기가 되었으며, 하야시 라잔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 아사이 료이의 『쇼군키』가 이를 계승하였다. 『주라쿠 모노가타리』는 소설로서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다마쿠시게』는 『주라쿠 모노가타리』와 『쇼군키』의 내용을 합성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밝히는 것을 통해 본고에서는 히데쓰구의 ‘살생관백’의 악인으로서의 인물상이 확대되고 정립된 과정을 추적하였다. 한편, 『히데쓰구 모노가타리(秀次もの語)』는 히데쓰구쪽의 시점에서 기술된 것으로서 이 작품이 간행되어 그 내용이 거대한 담론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만 남아있게 된 것은 당시의 정치권력 속에서 승자인 히데요시를 비판하고, 패자인 히데쓰구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It is not yet clear whether Toyotomi Hidetsugu planned the rebellion against Toyotomi Hideyoshi, and the villain ‘Sesyou Kanpaku’ or Hideyoshi fabricated it in order to inherit his right to Hideyori. However at that time it was common sense that Hidetsugu was a villain of the ‘Sesyou Kanpaku’, and he tried to rebel against Hideyoshi, but it was found out that was ordered to commit hara-kiri. This paper clarifi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gnizance and authority about Hidetsugu by examining seven kinds of literary works in the early years of the Edo Period. It was mixed the content of the ‘Sesyou Kanpaku’ that planned the rebellion so called “Taikosama Gunkinouchi” line, and Hidetsugu had not planned the rebellion so called “Taikouki” line. And it was a “Taikosama Gunkinouchi” that was easy to accommodate to authority as a propagandist of Hideyoshi. As a result, it was added in various kinds of stories as the villain, and became a common sense at that time.

豊臣秀次が本当に謀反を計画し、「殺生関白」の悪人であったか、あるいは秀吉が愛妾淀殿との間で生まれた秀頼に政権を継承させるため、捏造したのかは現在に至っても明らかになっていない。しかし、当時は豊臣秀次が「殺生関白」の悪人であったこと、そして豊臣秀吉に対して謀反を起こそうとしたが、発覚され、切腹を命じられたことは常識的なことであった。 本稿は近世初期の文芸作品7種を検討することにより、豊臣秀次についての認識と権力との関係を明らかにしたものである。まず、『恨の介』では、秀次事件については簡単に記述されているのみで、彼の悪行は描かれていない。それが、「殺生関白」の異常人格者として謀反を計画したという内容、つまり『太閤さま軍記のうち』と、「殺生関白」の異常人格者ではあるものの、謀反は計画していなかったという内容、つまり『太閤記』の内容が混在していた。そのうち、当時の権力と迎合しやすいのは、秀吉の宣伝物として秀次を殺すための正当性を与えた『太閤さま軍記のうち』であり、後になると本作品を基本的な骨子として、悪人としての秀次像が様々な形で付け加えられ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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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0원

본 논문은 전투사 위주의 미시적 접근법보다는 주로 국제정치적 입장에서 임진 왜란의 배경․원인과 현대적 함의를 분석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임진왜란의 시대적․상황적 배경, 임진왜란의 국내외적 원인, 임진왜란 배경․원인의 현대적 함의 를 살펴본 후 결론을 도출해본 것이다. 임진왜란은 1592∼1598년(선조 25∼31년)까지 7년 동안 2차에 걸친 일본의 침 략군에 대항하여 격퇴시킨 전란을 말한다. 임진왜란은 병자호란과 함께 조선의 2대 전쟁 중의 하나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조․일간의 전쟁에 명까지 참전한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의 원인은 1차적으로는 침략국인 일본에서 찾을 수 있지만, 2차적으로는 조선과 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측의 원인으로는 히데요시의 복합적 야욕, 조선측의 원인으로는 숭문 경무사상과 당쟁에 기인한 국방력의 약화, 명나라측의 원인으로는 환관정치로 인한 국력의 쇠퇴와 정보력의 부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우리가 일본에 역전당한 세력판도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동북아의 안보지형은 400여 년 전보다도 더 복잡해졌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History repeat itself).”는 말이 있다. 전란의 역사를 망각하게 될 경우에는 다시 전란이 올 수도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임진왜란은, 그 시대적․상황 적 배경과 원인, 전란극복과정과 관련해서 볼 때, 4세기가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임진왜란은 아태시대를 맞아 국운융성기에 접어 든 우리 한국이 이룩해야 할 국가번영․남북통일․세계평화․번영을 이룩함에 있어 핵 심적인 이 무엇인지를 깊이 자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backgrounds and causes of the Imjin War. To this end, the paper is composed of 5 chapters titled introduction, the historical and situational backgrounds of the Imjin War, the causes of domestic and foreign causes of the Imjin War, the backgrounds and causes of the Imjin War: its contemporary implications, and conclusion. The first great East Asian War in Joseon Dynasty, Imjin War(Japanese invasions of Korea) is called Imjinwaeran in Korea. It comprised two separate yet linked operations: an initial invasion in 1592, a brief ceasefire in 1596, and a second invasion in 1597. The conflict ended by 1598 in a military stalemate and the withdrawal of Japanese forces from the Korean peninsula. With Hideyoshi Toyotomi's death in September 1598, the Japanese forces in Korea(Joseon) were ordered to withdraw back to Japan by the new governing Council of Five Elders. Toward the end of sixteenth century, the war-loving Japanese general, Hideyoshi Toyotomi, had overcome all his rivals and had made himself the dictator of his homeland. In his desire for glory, he next turned his eyes toward Korea(Joseon) and China(Ming). It was his wish to conquer the entire Asian continent. Korea stood like a bridge between Japan and China. Toyotomi realized that in order to gain free passage to China, Korea would first have to be taken. He sent messages of threatening tone to Korean government requesting Korea's surrender in fact. The request was turned down. So in 1592 Toyotomi sent out his army and navy in great numbers across the sea to attack Korea. The situation in Korea at this time was not good. Despite warnings, Korea was totally unprepared for any massive invasion from the outside. The officials of the government were spilt into many factions and engrossed in a power struggle among themselves. They persistently engaged in slandering and paid little attention to the rest of the world. For them the interest of their faction was more important than that of their nation. Thus the Korean court was taken completely by surprise and was totally unprepared when the invasion took place. Imjin War was the biggest war in Josean period. Imjin War gives us very important lessons and implications. It teaches us that our strong national security and continuous resolution in military affairs are very important in our national existence and prosperity. History may repeat itself if we do not learn our lessons from the sore past that we should be strong enough to repel aggression from any nation. The moment we forget, history will repeat itself. We always should keep in mind the universal lesson of history that we have to prepare for war if we really want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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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

이 논문에서는 근세의 다이코기물・조선군기물이 “근대화”하는 과정을 검토한다. 근세의 다이코기물・조선군기물은 임진왜란을 주제로 하는 조선군기물과 임진왜란을 제외한 히데요시의 전기인 협의의 다이코기물, 그리고 양쪽을 포함하는 광의의 다이코기물로 나뉜다. 근대가 되자 󰡔다이코기󰡕󰡔에혼 다이코기󰡕등의 문헌은 오랜 변천을 거쳐 번각본으로 정착한다. 한편, 근대 이후에도 새로운 다이코기물이 다수 집필된다. 역사소설에서는 와타나베 가테이 등이 광의의 다이코기물을 집필하였고, 그 외의 작가 등도 광의의 다이코기물을 지향한 것 같으나 패전이라는 시대적 요인으로 인해 이를 성취하지 못하였다. 근세에도 󰡔에혼 도요토미 훈공기󰡕등의 문헌은 광의의 다이코기물을 지향하였으나 협의의 다이코기물로 그친 바 있다. 그 원인은 근세의 목판과 근대의 금속활자 인쇄 간의 경쟁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근세 말기에 다수 만들어진 기리쓰케본이나 소형 에혼류, 그 흐름을 잇는 근대의「에혼 다이코기」류나 위인전은 처음부터 협의의 다이코기물을 지향한 것 같다. 이들 문헌은 히데요시의 전례없는 출세를 서민들에게 전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조선군기물 방면에서는 메이지 초기의 “재흥기” 유행에 편승하여 히데요시의 세계정복담을 담은 이색적인 소설 󰡔도요토미 재흥기󰡕가 간행되었다. 이처럼, 근세에 큰 인기를 누린 다이코기물・조선군기물은 근대에도 다양한 장르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근세와 연결되는 요인이 확인된다. 히데요시라는 인물의 비범한 삶과 전근대 최대의 대외전쟁이라는 두 가지 사건에 대한 근세 일본인들의 공감과 흥미가 그것이다.

This article reviews the process of the modernization of three categories' literature on Toyotomi Hideyoshi and Imjin War written in premodern Japan(Taikouki mono and Chosen gunki mono). There are three types of Taikouki mono and Chosen gunki mono in premodern Japan. One type is on Imjin war and called Chosen gunki mono. On the other hand, the biographies of Toyotomi Hideyoshi fall into two types which cut off or contain Imjin war. In Meiji Japan, some pieces such as Taikouki and Ehon Taikouki were reprinted in various ways, but new pieces were written too. In the field of historical fiction, some writers such as Watanabe Katei wrote biographies of Toyotomi Hideyoshi which also contain Imjin war. It seems that some famous writers such as Yoshikawa Eiji and Siba Ryotarou also wanted to write biographies of Toyotomi Hideyoshi which also contain Imjin war. But, because of japanese defeat in WWII, they were banned from achieving the end. There exists the same case In premodern Japan. It seems that some pieces of Taikouki mono like Ehon Toyotomi Kunkouki were aimed to be biographies of Toyotomi Hideyoshi containing Imjin war also. But the Meiji Restoration and following modernization of Japan frustrated it. On the other hand, kiritsukebon and illustrated books of small size made vastly in the 19th century, Ehon taikouki and biographies in modern Japan were made as the type cutting off Imjin war from the beginning. The goal of these pieces was to report the unusual success of Toyotomi Hideyoshi to girls and boys. Finally, on the part of Chosen gunki mono, a notable novel Toyotomi Saikouki was published in Meji Japan. In this novel, Toyotomi Hideyoshi, called as the Napoleon of the East, conquers all over the world and the hell. As above, Taikouki mono and Chosen gunki mono which have enjoyed popularity among people in premodern Japan evolved in various forms in modern Japan. The popularity of premodern/modern Taikouki mono and Chosen gunki mono comes from the same factor; japanese people's love for the extraordinary life of Toyotomi Hideyoshi, and Imjin war which was the most great war against foriegn countries in the history of premoder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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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開戰期의 도요토미[豊臣] 정권과 일본 민중

나카오 히로시

조선통신사학회 조선통신사연구 제14호 2012.06 pp.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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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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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浩然과 한일교류

야마구치 히사노리

조선통신사학회 조선통신사연구 제12호 2011.06 pp.7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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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erorship on the Threshold in the Hideyoshi Regime KCI 등재후보

Nam-lin Hur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비교일본학 제20집 2009.06 pp.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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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0원

戦国時代の天皇は政治的権威を失われたばかりではなく、経済的にも非常に困難な 状態に落ちていた。しかし、織田信長によって天皇と朝廷の権威は政治的に利用され るようになった。その傾向がより強められたのが秀吉政権の時である。政治的権威の 周辺に押し出され忘れられていた天皇と朝廷はどのような要因によって、政治の前面 に再登場されたのか。本報告では、その過程を秀吉の取っ朝廷政策の分析を通じて、 天皇の宗教的権威・勅命の政治的有用性・天皇をめぐる神国思想・天皇の家職と武家 官位を中心に天皇権威の辺境からの生まれ変わりとその意味、そして近世的天皇権威 への転換を辿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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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발발전 한일교섭 실태 KCI 등재

尹裕淑

한국일본학회 일본학보 제70권 2007.02 pp.347-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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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0원

本稿は、秀吉の朝鮮侵略勃発前(1586ー592)における韓日関係の推移を、朝鮮通信使(1590)派遣をめぐる交渉、朝鮮通信使に対する両国の認識、通信使以後の両国情勢などを中心に検討したものである。1590年の朝鮮通信使は、秀吉より、朝鮮出兵を保留する代わりに朝鮮国王の入貢を命じられた宗氏が、朝鮮に秀吉の日本統一を祝賀する使節派遣を要請することによって実現した。したがって通信使をみる両国の認識には、大きな懸隔があり、朝鮮は伝統的な交隣の証として派遣した反面、日本では秀吉への服属使節として宣伝され、また理解された。通信使の日本行以後、秀吉の対朝鮮政策が「朝鮮侵略」から「明征服への協力」へと変わったものの、これも現実問題として朝鮮側の同意を得られない極めて一方的なものであった。一方の朝鮮は、通信使派遣をきっかけに、倭冦に協力した朝鮮人と日本に拉致された多くの朝鮮人を送還させることができたので、この点では外交的に実利ある成果をおさめたといえる。ところが朝鮮は、秀吉に大陸侵略の意思があるとのことを直接通告されたにも関わらず、国内の政治事情や対外的な情報不足もあって、日本側のあまりにも急な動きに適切な対応、または備えをと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みならず日本に服属して明征服に協力しようとしているという対外的な誤解までを背負うことになってしま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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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원

The main objective of this research paper is to find out a cause for comparison between Admiral Yi Sun-sin and Horatio Nelson in the discussion of Yi Sun-sin and the influence of the discussion of Togo Heihachiro to this discussion of Yi Sun-sin in Japanese modern times. Since the introduction of Western civilization in the Meiji Restoration, the Japanese have come to know of Britain’s Nelson and France’s Napoleon Bonaparte. And They created a discourse that directly compares Napoleon to Hideyoshi and Nelson to Yi Sun-sin. The comparison between the two was natural because Admiral Yi and Nelson each had a common sense that they protected from the invasion of Napoleon and Hideyoshi each in the sea. Also, when considering Japan, trying to compete with the West, We can imagine Yi was described as a representative admiral of East Asia against the West. After the Russo-Japanese War, a naval hero named Togo Heihachiro appeared in Japan, and the discussion of Yi Sun-sin was changed. For the Japanese, the image of the East Asian naval hero, Nelson of East Asia was Admiral Togo, and it weaken the image of Yi Sun-sin as the East Asian naval hero, Nelson of East Asia. Eventually, the discussion of Yi Sun-sin changes into the assessment of his own tactics and personality, and the comparison with Nelson would only end up in relation to the similarities in the situation of death.

この論文は近代日本の李舜臣談論の中で李舜臣とネルソン(Nelson)との比較が行われるようになる原因をこの談論に東郷平八郎談論がどのような影響を与えたかを考察ための論文である。日本の李舜臣談論は近世までは『懲毖錄』によって造られてきたが、明治維新の以降、その様相は変わるようになる。イギリスのネルソンとフランスのナポレオンを知るようになった明治の日本ではナポレオンと秀吉、ネルソンと李舜臣を比較する談論が登場する。ネルソンと李舜臣はナポレオンと秀吉の侵略を海で沮止した人物であったので、二人の比較は自然なものであった。また西洋列強との競争をしながら西洋を克服しようとしていた当時近代日本の状況を考えてみると、李舜臣は西洋に対した東洋の代表的海軍将として書かれているのである。 日魯戦争の後、日本に東郷平八郎という海軍の英雄が現れて近代日本の李舜臣談論は変わるようになる。日本人にとって西洋に対する対抗馬のイメージは東郷平八郎が持つようになり、東洋のナポレオンである豊臣秀吉を沮止した東洋のネルソンとしてのイメージも消えるようになる。結局李舜臣談論は李舜臣自分の戦術または人柄に関する評価に変わり、ネルソンとの比較は戰死場面の類似性にかんする言及に留まるようになる。だが、イギリスの研究者にとって李舜臣は、相変わらずネルソンと直接比較できるような人であったため、日露戦争後も日本での李舜臣談論とは別に、李舜臣とネルソンを比較するようになる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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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No Westphalia-like Peace Order after the Toyotomi Hideyoshi War in Korea (1592-98)?

김명섭

[NRF 연계] 한국학술연구원 Korea Observer Vol.45 No.1 2014.03 pp.11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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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examines why there was no Westphalian peace order inthe aftermath of the Toyotomi Hideyoshi War (1592-98) in thespace later named Northeast Asia, focusing on how ideas held byindividuals exercised their influence over a space generating orderor disorder. More emphasis is put on the role of “heterodoxies”condemned as such in the pre-existing order. The heterodox ideaintroduced by the Jesuits in Japan stimulated change in Japanesegeopolitical idea, facilitating the outbreak of the Toyotomi HideyoshiWar in 1592, much as Protestantism played a similar role in theThirty Years War in Europe. In spite of initial success in Japan, the influence of heterodox idea eventually failed to dismantle thehomogeneous ideational layer of the Neo-Confucian order (tianxia). Unlike the Holy Roman Empire in Europe, which was in need of acontainment measure against new spreading ideas and which finallysurrendered to the concept of equal sovereignty to erect a barrieragainst the spread of heterodox idea, there was no serious threatfrom a heterodox idea during and after the Toyotomi HideyoshiWar, and thus no necessity to establish a barrier that would producethe concept of sovereig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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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정세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구상-도요토미 히데요시 발급 문서를 중심으로-

김경태

[NRF 연계]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Vol.114 2025.01 pp.18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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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원인에 대해 선행 연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명심론 등 개인적인 것과 영토확장설 등 구조적인 원인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대개 그 근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급한 문서였다. 그런데 명령서의 형태를 띤 그의 문서를 분석할 때에는 발급 시기, 수신자, 침략을 언급한 맥락 등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 많다. 단어나 표현만을 발췌하여 침략 계획을 시계열화하는 작업은 위험성을 내포한다. 본 글에서는 히데요시의 발급 문서를 분석하여 침략 구상을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번째는 대외 침략의 문구가 등장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전체 문서에서 해당 문구가 사용된 의도를 파악해보면, 침략 계획은 실체를 갖기 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조선과 가까운 규슈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쓰시마의 소씨를 만난 이후의 단계이다. 이전까지 모호했던 잠재적 침략 대상으로서의 조선이 실체화되어 등장했다. 세 번째는 조선의 통신사를 접견한 시기이다. 히데요시가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은 침략 계획과 연동되었다. 네 번째는 실제로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으로 건너가는 단계이다. 1591년 8월부터 동원과 도해는 급격히 진행되었다. 그 결정적 계기를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의 구상이 단계적으로 발전하여 자기 완결적인 침략 계획으로 완성되어 있었고, 이것이 어느 특정한 계기를 통해 폭발하여 현실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미쳐서도 히데요시는 이전과 같은 망상적 언설을 보였으나, 이는 전쟁 이전과 직후의 침략적 세계관과 결부된 망상과는 구분되는 '허세'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Previous studies on the causes of the Imjin War have suggested both personal motives, such as the desire for fame, and structural factors, such as territorial expansion. The primary evidence for these arguments has been documents issued by Toyotomi Hideyoshi. However, when analyzing his documents, which often take the form of commands, it is crucial to pay attention to factors such as the issuance date, recipient, and the context in which the invasion was mentioned. It is risky to simply extract words or phrases and create a chronological timeline of the invasion plan. This paper analyzes documents issued by Hideyoshi to divide his invasion plans into four stages. The first stage is characterized by the emergence of language pertaining to external aggression. However, examining the context in which these terms were used throughout the documents reveals that the invasion plan was not yet concrete. The second stage begins after Hideyoshi's meeting with the S? clan of Tsushima following his conquest of Kyushu, a region proximate to Joseon. Here, Joseon, which had previously been a vague potential target of invasion, became a more tangible objective. The third stage coincides with Hideyoshi's reception of the Joseon envoy, the Tongshin-sa. In this phase, Hideyoshi's preexisting worldview became intertwined with his invasion plans. The fourth stage marks the actual mobilization of troops and their deployment to Joseon. From August 1591, mobilization and transportation proceeded rapidly. While it is difficult to pinpoint the exact trigger for this escalation, it is clear that his plans evolved gradually into a self-contained scheme of invasion. This scheme appears to have been realized as a result of a particular catalyst. Despite the unfavorable circumstances of the war, Hideyoshi continued to exhibit delusional rhetoric, but this should be understood as a form of bravado distinct from his pre-war delu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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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명(對明), 대조선(對朝鮮) 인식 -1593년의 명・일 강화교섭을 중심으로-

김건우

[NRF 연계]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Vol.113 2024.09 pp.89-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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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1593년의 명・일 강화 교섭을 중심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더 나아가 도요토미 정권의 대명(對明), 대조선(對朝鮮) 인식을 밝혀내고, 그것이 강화교섭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1장에서는 1593년 명・일 강화교섭에 임하면서 히데요시가 작성한 문서를 바탕으로, 그가 제시한 강화 조건을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히데요시가 제시한 강화 조건이 전국시대 강화 조건의 연장선에 있음을 지적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히데요시가 천황가와 명 황가의 혼인 동맹,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감합 무역의 재개를 요구했다고 정리했다. 조선의 경우, 이미 일본에 복속한 국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고, 그에 따라 왕자와 대신들을 인질로 일본에 보내고, 대신들이 히데요시의 명령을 어기지 않겠다는 내용의 기청문을 작성 및 제출하도록 하라는 것으로 조항을 해석하고, 이를 통하여 조선의 자발적인 복속 표명을 요구했다고 보았다.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은 전국시대 무가 간의 관례를 그대로 가져와 명과 조선을 상대로 적용한 것에 불과했다. 이러한 양상은 히데요시를 비롯한 도요토미 정권이 일본의 관습, 상식 등이 명과 조선에도 그대로 통용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타났다. 2장에서는 이러한 히데요시의 사고방식을 명의 사절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확인했다. 명 사절은 히데요시의 사고방식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도요토미 정권의 논리를 정면에서 부정했다. 도요토미 정권도 이러한 명 사절의 논리를 수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사고방식의 차이, 용어에 대한 이해의 차이와 같은 인식의 어긋남을 상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렇게 인식의 차이를 메우지 못한 채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은 명 사절에게 전달되었다. 그 결과, 해당 조건은 명과 조선 어디에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 후, 조선에서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가 명과의 교섭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해당 조건들은 명의 책봉 체제에 걸맞은 조건들로 수정되거나 삭제되었다. 3장에서는 1593년 이후의 강화교섭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1593년 강화교섭에서 나타났던 히데요시의 대명, 대조선의 인식이 어떻게 유지 또는 변화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1594년 12월의 나이토 조안의 명 대신들과의 필담, 1595년 5월 히데요시가 발급한 문서를 분석하고, 이를 통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대명 인식은 변했지만, 대조선 인식은 변하지 않았음을 지적할 수 있었다.

This article focuses on the peace negotiations in 1593, and examined the perceptions Toyotomi Hideyoshi and the Toyotomi administration had on Ming and Joseon. Toyotomi Hideyoshi wrote two documents at that time of the peace negotiation of 1593. By analyzing those documents, it was possible to point out that Hideyoshi was purposing mainly two things. One was allying with Ming by the merriage between Ming and Japan and the resumption of mutual trade based on the alliance, and the other was exacting obedience from Joseon by demanding to submit prince of Joseon as a hostage and written statement by officials of Joseon stating that they would not violate Hideyoshi's orders for now and ever. The conditions that Hideyoshi requested to Ming and Joseon were exact same with those which were frequently used throughout the Sengoku period in Japan. But Hideyoshi's requests were denied by the envoys who were in Nagoya for the peace negotiation. The reason was the requests didn’t make any sense to them. As a matter of fact, the conditions were based on the customs which were came up in Japan throughout the Sengoku period. Hideyoshi thought that Japanese customs and common sense would make sense to Ming and Joseon as it does in Japan. But not only the envoys but also the people in Ming and Joseon, for example, the King of Joseon(Seonjo) and the government officials of Ming didn’t understand it at all. Due to this difference in perception on each other, those documents could not be reported properly to the royal court of Ming or Joseon. So after the peace negotiation, Konishi Yukinaga who was stationing in Joseon had to adjust those conditions to fit in tributary system of Ming to keep the peace negotiation on. As the result, Hideyoshi’s perception on Ming had changed from a country that customs of Japan would make sense to that does not. On the contrary, his perception on Joseon did not had changed, so he kept requesting Joseon to submit prince as hostage to show their voluntary obed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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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정명(征明)’에 대한 고찰

조인희

[NRF 연계]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Vol.75 2022.02 pp.6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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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용한 ‘정명’의 용례에 관하여 일본 국내와 국외로 나누어 보고자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간파쿠(關白) 취임 이후 재지 다이묘(大名)들 간의 다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명 정벌의 의지를 드러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 정벌 의지가 표명된 것은 일본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征明)’에는 ‘왜’라는 요소가 빈약하다는 점에 있다. 본고의 검토에 따르면, 일본 국내에 적용된 히데요시의 ‘정명’에는 특정 사상에 근거한 구체적인 논리 구조가 부재하며, 힘의 논리만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국내에 적용되었던 히데요시의 ‘정명’은 일본 전역에 군사력이 중시되었던 중세 일본 봉건 지배 구조를 바탕으로 한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 설파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우상화 및 신국 일본의 주재자라는 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명’이 철저히 힘을 바탕으로 한 신종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명’은 조선을 비롯한 제 국가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없었다.

In this paper, I tried to how Toyotomi Hideyoshi used the word 'Invading Ming' in Japan and overseas. Toyotomi Hideyoshi expressed his will to conquer the Ming in the process of resolving disputes between the feudal lords after the inauguration of Kanpaku. It was not only in Japan that Toyotomi Hideyoshi expressed his will to conquer Ming. The problem is that What can be found is that Hideyoshi's plan to invade Ming applied in Japan lacks a specific logical structure and strongly reflects the logic of power. Considering this, it seems correct to understand Hideyoshi's plan to invade Ming applied in Japan as an idea based on the medieval Japanese feudal governance structure where military power was emphasized. Toyotomi Hideyoshi's plan to invade Ming preached externally was based on the idolization of Toyotomi Hideyoshi and the fact that he was the ruler of the God's country. However, the plan to invade Ming was based on military power, Toyotomi Hideyoshi's plan to invade Ming couldn't convince the other countries en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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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시본(噺本)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재훈

[NRF 연계] 한국일어일문학회 일어일문학연구 Vol.94 No.2 2015.08 pp.14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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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戸時代、庶民の文学として良く知られている噺本。本稿はこの噺本とい うジャンルの中で、特に日本国文学研究資料舘の公開資料の『噺本大系』の 中で、豊臣秀吉のイメージがどのように描かれているのかについて考察した のである。噺本の中で、豊臣秀吉のイメージは時代的な雰囲気とか噺本の展開によ り、大きく変わっていたのである。 初期のものと言える1615年刊行の『戯言養気集』は当時、豊臣秀頼と豊臣 秀吉の残党が残っていた時代でもある。未熟期の作品という理由からか、ま だ滑稽味は持っておらず、豊臣秀吉は単に徳望のある指導者として描かれて いる。それが噺本の成熟に伴い、『昨日は今日の物語』などでは、だんだん 「落ち」の素材として描かれ始める。確立期、全盛期、退廃期に入ると、豊 臣秀吉ははなしの中の補助的な手段にしか過ぎなくなってしまう。また、秀 吉の名前が登場する戦争においても、最初は憂鬱な雰囲気を持っていたの が、だんだん「落ち」の背景を設定する道具として使われるようになる。 朝鮮に対する蔑視観が広まった17世紀後半に刊行された『篭耳』には、異 例的に文録慶長の役を素材としても使ったりもしたが、噺本の性格が固まっ ていくにつれ、近松の『本朝三国誌』や、朝鮮軍記物語りなど、他のジャン ルでは秀吉のイメージは近代に至るまで強くなりつつある中でも、噺本の中 での秀吉のイメージは弱くなってき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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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豊臣秀吉ㆍ임진왜란에 대한 인식

김광옥

[NRF 연계]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 경계 Vol.64 2007.09 pp.20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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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대한 지식의 축적

박상휘

[NRF 연계] 국문학회 국문학연구 Vol.30 2014.11 pp.14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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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문인들의 기록을 대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는 과정 및 히데요시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탐구한 것이다. 조선 국내에서는 히데요시가 누군지에 대한 지식이 아주 미약했던 반면, 일본에서 포로로 생활하던 문인들 및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문인들은 히데요시가 어떤 인물인지, 일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자세히 알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일본 사행록을 시대 순으로 검토하면서 히데요시에 대한 인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통시적으로 규명하였다. 첫째로 히데요시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형성과정을 살펴보았다. 사행원들은 분열된 상태에 있던 일본을 통일하고 엄격하게 통치하였다는 이유로 히데요시의 정치적 공적을 칭송하는 일본인들이 있음을 기록하였고,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일본인들이 신사를 만들어 신으로 모시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또 사행원들은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이룩한 정치적 공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진시황과 항우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히데요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살펴보았다. 도요토미 정권하의 일본을 견문한 사행원들은 히데요시의 포악한 정치 때문에 일본인들도 히데요시를 미워하고 있음을 묘사하였다. 에도시대에 들어서도 일본인들이 히데요시의 가혹한 정치에 대해 여전히 원한을 가지고 있고,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으로 인해 일본 백성들도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조차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기록하였다. 셋째로 히데요시가 대불을 건설하기 위해서 세운 다이부쓰지(大佛寺)에 대한 지식이 축적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다이부쓰지 바로 앞에는 조선에서 가져온 귀와 코를 모아 세운 미미즈카(耳塚)가 있었는데, 1719년 사행 때 다이부쓰지에서 연회를 열자는 일본 측의 제안을 사행원들이 거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행원들은 다이부쓰지가 어떤 곳인지를 자세히 연구하였다. 원중거(元重擧)는 다이부쓰지를 창건한 배경에 신도를 숭배하는 일본인의 종교적 관습이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사행원들은 일본에서의 견문을 통해 히데요시에 대해 상당히 많은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당초 사행원들은 히데요시를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 감정적으로만 보고 있었는데, 히데요시에 대한 지식이 점차 축적됨에 따라 히데요시를 냉정한 눈으로 봄으로써 상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process of awareness formation and knowledge accumulation about Toyotomi Hideyoshi in the records of literary scholars who had been to Japan as Korean emissaries. Within Choson, there was a very weak understanding about who was Hideyoshi. On the other hand, the Choson literary scholars who had been to Japan as emissaries and those literary writers who were living in Japan as prisoners very well knew about who was Hideyoshi and how did the Japanese perceive him. This paper diachronically investigated as to how the understanding about Hideyoshi was formed by examining ‘Sahangrok’ (diaries written by Korean emissaries to Japan) in time-line sequence. Firstly, this paper looked into the formation process of positive awareness about Hideyoshi. Above all, they recorded that there were Japanese who applauded the political contribution of Hideyoshi as he had united Japan and had a strict governance over it. It was discovered that after Hideyoshi died, the Japanese built a shrine for him and apotheosized him as a god. Also, the emissaries held in high esteem the political contribution of Hideyoshi and compared him with Xian YU; the first Qin Emperor. Secondly, this paper examined the negative understanding about Hideyoshi. The emissaries who experienced Japan during the reign of Toyotomi described that he was significantly a tyrant and that Japanese too hated him. They recorded that even during the Edo period, Japanese were still having resentment against the harsh political regime of Hideyoshi and Japanese themselves thought that Choson invasion by Hideyoshi was wrong because the Japanese subjects had also suffered pain due to it. Thirdly, this paper checked the knowledge accumulation process about Daibutsu temple that was built by Hideyoshi for setting up a huge Buddha statue. There is Mimi-zuka (The Ear Mound; a burial site of the nose and ears of Choson people cut during Choson invasion by Japan) just in front of this temple and in the year 1719, the emissaries rejected the Japanese proposal of holding a party at Daibutsu temple. After this incident, the emissaries minutely researched about what kind of place was Daibutsu temple. Won-Jung geo sharply pointed out the religious practice of Japan in which Shinto religious worship was carried at Daibutsu temple. There could be a considerable knowledge accumulation about Hideyoshi through the experiences of emissaries in Japan and accordingly, the perception about Japan also changed. Initially, the emissaries were seeing Hideyoshi as ‘An enemy with whom one cannot live under one sky’ but gradually as the knowledge about Hideyoshi increased, he was perceived with a comparatively colder appro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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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敎化’의 양상 -광해군대 『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중심으로-

정일영

[NRF 연계]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Vol.34 2010.04 pp.6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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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조선시대 광해군대에 간행된 『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내용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분석하여,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의 변화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이전 시대에 간행되었던 행실도와 마찬가지로, 일반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간행되었다. 하지만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사례의 수가 다른 행실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그 내용 또한 이전 행실도와는 차이를 보였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간행 시기는 仁穆大妃의 폐모논쟁이 시작됐던 시기와 일치한다. 폐모를 반대했던 세력들은 왕 또한 지켜야할 가치로서 孝를 앞세웠고, 폐모를 주장했던 이들은 왕의 신하로서 지켜야 할 忠을 근거로 폐모를 주장했다. 이 정황이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계모에 대한 효행 사례를 다른 행실도의 것과 비교하거나, 忠의 실행 방법을 비교해보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또 행실도 수록 과정에서 孝와 忠을 구분하던 모습들 속에서도 간행 당시의 정황이 행실도 내용에 미친 영향을 찾아낼 수 있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각자 직분에 맞는 忠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결국 신하들에 대한 압박이자 ‘요구할 수 있는’ 忠의 강조였다. 이는 충신도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뿐만 아니라 『東國新續三綱行實圖』가 해석하고 강조한 孝, 忠, 烈도 다른 행실도와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가 강조했던 烈은 외부의 남성(왜적)이 정절을 위협할 때 목숨을 버려가며 저항하는 ‘수절’이었다. 이는 사례의 진실성과는 관계없이, 편찬자 남성들의 기대 및 의도가 투영됐다고 봐야할 것이다. 효자도에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수록되긴 하였으나, 천민·평민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그들의 사례가 극단적인 것(斷指 혹은 割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분이 낮은 이가 효자도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양반 계층의 인물에 비해 더 극단적인 효행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서 강조한 忠은 다른 어느 행실도보다도 희생을 강조하는 충이었다. 이것은 간행 당시의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다른 행실도와 비교할 때, 몇 가지 특징 및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東國人만을 등장시켰고, 그 등장인물의 수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행실도의 등장인물은 매우 다양하지만, 행실의 유형은 단조로운 편이고 그 단조로움은 신분 및 성별과 관계가 깊었다. 사실 이 특징은 조선 사회가 강조해온 가치와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광해군의 폐위와 함께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반정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광해군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고, 이 비난은 결국 조선 사회 전반의 경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내용과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대한 후대의 평가, 그리고 정조대에 간행된 『五倫行實圖』의 복고적 성격을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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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역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론 : 대외관계사를 중심으로

이수열

[NRF 연계]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Vol.75 2022.02 pp.9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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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들어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가 주장하기 시작한 ‘바다의 역사’에 입각한 새로운 왜구 연구는 왜구의 민족 구성 문제를 둘러싸고 국제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국과 중국 학계의 비판은 주로 이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에 대해 일본 학계는 한중 학계의 ‘민족주의’를 초월적인 입장에서 비판하는 등, 논쟁은 생산적인 전개를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국내 학계로 눈을 돌리면, 바다의 시좌를 거쳐 탄생한 왜구상은 단지 왜구에 대한 평가를 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정권, 더 나아가 근세국가 전반에 대한 재평가로 이어졌다. 다나카가 제창한 동아시아 통교권의 한 주체로서의 왜구는 후지키 히사시(藤木久志)가 제안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바다의 평화령’과 결합함으로써 평화로운 교역 질서의 보호자로서의 통일정권론을 낳게 된다. 이후 동아시아 해역사는 새로운 전개를 보이게 되는데, 그 중심에 있는 연구자는 아라노 야스노리(荒野泰典)와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였다. 두 사람은 다나카가 왜구를 바다의 역사와 접목시켜 탄생시킨, 국가에 포섭되지 않는 자유의 민으로서의 왜구상을 계승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왜구를 명 중심의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교역 질서의 구축자로까지 평가했다. 이로써 왜구는 더 이상 불법적인 반역자가 아니라 중화질서를 해체하는 신질서의 기수가 되었다. 16세기 이래 동아시아해역에서 전개된 왜구와 통일정권 성립의 역사를 구체제의 해체와 신질서의 대두 과정으로 설명하는 역사상은 결국 중화질서로부터의 일본의 자립・이탈이라는 계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 그리고 그 이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명에 요구한 감합무역 부활 요구 등을 살펴볼 때 오늘날 일본 대외관계사 연구가 제출하는 근세 일본의 ‘자립’이라는 역사상은 현대 역사가들의 내셔널리즘이 깊이 반영된 자의적인 해석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바다의 역사가 일본 대외관계사 연구에 가져온 변화를 통일정권론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본문에서는 먼저 바다의 역사가 초래한 왜구상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고, 그것이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미친 영향을 개관한 뒤, 오늘날 일본 대외관계사 연구가 제시하는 근세 역사상과 그 문제점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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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충돌로서의 전쟁: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관념적 기원을 중심으로

김명섭, 김석원

[NRF 연계]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 Vol.53 No.3 2013.09 pp.10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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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전쟁의 관념적 기원을 역사정치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분석사례들로 임진왜란(1592-1598)과 6·25전쟁(1950-1953)을 선택한 이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두 전쟁의 개전에 앞서 상호대립적인 관념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배경에는 명제국과 조선의 천자(天子) 중심적 세계관과 새로운 관념과의 대립구도가 존재했다. 천자중심적 세계관과 대립하는 새로운 관념은 일본의 독자적 천황관 및 전국(戰國)시대의 사상적 변화에 더해서 가톨릭 전파 및 유럽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다. 6·25전쟁의 배후에는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과 1917년 러시아공산정권 수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항일지도이념의 대립구도가 존재했다. 한편에는 러시아공산주의와 연결된 반제공산주의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대한제국시기부터 발전해온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와 더불어 반공적 사회민주주의, 무정부자유주의 등이 있었다. 둘째, 두 전쟁의 배후에 있었던 관념은 초국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고, 이러한 초국적 관념의 국제적 충돌이 두 전쟁의 발발에 앞서 축적되고 있었다. 셋째, 임진왜란 개전결정에 앞서 히데요시가 유럽과의 조우를 통해 갖게 된 초국적 관념은 기존의 천자중심적 초국적 관념과 충돌하고 있었고, 이러한 관념은 북경 너머 천축(天竺, 인도)까지 설정했던 그의 전쟁목표에까지 반영되었다. 6·25전쟁 또한 단순한 내전의 국제적 확대가 아니라 초국적 관념의 장기적이고 국제적인 대립구도가 한반도에서 분출했던 전쟁이었다.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개전결정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장기간 지속된 초국적 관념들 간의 국제적 대립구도가 존재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isit two great wars in Korea, the Toyotomi Hideyoshi War (1592-1598) and the Communist War (1950-1953), known in South Korea as the “6·25 War,” in the context of ‘clashes of ideas.’ We cannot explain thoroughly these two wars if we exclude from consideration the direct influence of ideas on the decisions made by Toyotomi Hideyoshi and Kim Il Sung. Hideyoshi's new geopolitical philosophy stemmed from Japan's encounter with Catholicism and Europe including the Tensho Embassy to Europe (1582-90), although it was not a systematic and full-fledged Weltanschauung. Without this new idea, he could not have planned such a grand war scheme, which ultimately targeted India. In contrast, Kim's decision to initiate war was based on a more systematic and self-contained idea. Kim carried out his decision by colluding with Stalin of the Soviet Union and Mao of Communist China, while sharing with them an absolute conviction in the ultimate global victory of Communism. In particular, Kim's view of the war as being inherently just and defensive was not merely tactical propaganda, but was deeply rooted in his Commu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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