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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와 국내 사회과학계의 함의: 한인 지식네트워크의 두뇌순환(Brain Circulation)을 위한 일 고찰 KCI 등재후보
재외한인학회 재외한인연구 제27호 2012.06 pp.129-176
...지식인 네트워크나 한국계 인재의 현황에 대한 기초조사를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공계 쪽에서는 재미과학자협회 등을 통해 해외에서 자리 잡고 있는 학자들간의 활발한 활동도 엿볼 수 있으나, 특히 사회과학관련분야에서 도 크게 두드러지게 지식인 네트워크에 관해 연구한 것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기존 “한국학”의 범주에 속한 학술정보 외의 기타 사회과학분야 범주에 관한 정보는 전혀 정리되어있지 않은 점에 착안하여, 본 논문은 점증하는 글로벌 인구이동의 흐름 안에서 지식인사회의 인구이동과 그 영향에 대해 주목하고, 특히 유네스코 사회과학보고서에서 도 언급하고 있는 지역간 지식격차를 줄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서 두뇌순환의 한국적 맥락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유네스코 세계사회과학보고서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천착하되, 우선 수집 가능한 자료를 토대로 한미경제학회, 한국사회학회, 한국문화인류학회 및 한국연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부터의 관련 자료협조를 얻어 한국사회 과학계의 지식인 네트워크 내지는 지적교류의 특징을 정리, 분석하고, 사회과학자의 이동에 대한 전략적 접근을 통해 사회과학적 분석기술과 자료면에서 보다 충실한 비교연구가 가능한 차세대 사회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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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한인연구를 함에 있어서 재외한인단체 및 재외한인공동체에 관한 우수한 연구들은 매우 많지만 한인 지식인 네트워크나 한국계 인재의 현황에 대한 기초조사를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공계 쪽에서는 재미과학자협회 등을 통해 해외에서 자리 잡고 있는 학자들간의 활발한 활동도 엿볼 수 있으나, 특히 사회과학관련분야에서 도 크게 두드러지게 지식인 네트워크에 관해 연구한 것은 찾아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기존 “한국학”의 범주에 속한 학술정보 외의 기타 사회과학분야 범주에 관한 정보는 전혀 정리되어있지 않은 점에 착안하여, 본 논문은 점증하는 글로벌 인구이동의 흐름 안에서 지식인사회의 인구이동과 그 영향에 대해 주목하고, 특히 유네스코 사회과학보고서에서 도 언급하고 있는 지역간 지식격차를 줄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서 두뇌순환의 한국적 맥락을 생각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유네스코 세계사회과학보고서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천착하되, 우선 수집 가능한 자료를 토대로 한미경제학회, 한국사회학회, 한국문화인류학회 및 한국연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부터의 관련 자료협조를 얻어 한국사회 과학계의 지식인 네트워크 내지는 지적교류의 특징을 정리, 분석하고, 사회과학자의 이동에 대한 전략적 접근을 통해 사회과학적 분석기술과 자료면에서 보다 충실한 비교연구가 가능한 차세대 사회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
Most researches on Korean diaspora were mainly focused on overseas Korean communities and their settlement processes. This paper is more geared towards the newly emerging researches on the knowledge diaspora network, which developed in line with development programs of international organizations. Using the recent issue of World Social Science Report from UNESCO (2010) as a basic comparative framework, this paper examines the current status of Korean knowledge diaspora from the viewpoint of brain circulation in order to find a better way to tap the potentials of overseas Koreans.
社会进化论视角下韩国开化期报纸『独立新闻』中的清、日形象比较 KCI 등재
한중인문학회 한중인문학연구 제79집 2023.06 pp.247-265
...한국에 전입되어 개화파를 비롯한 한국 근대 지식인들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주로 독립협회 임원들에 의해 운영된 『독립신문』의 논설에서 청국, 일본을 각각 생존경쟁에서의 실패자와 우승자, 변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는 나라와 변혁을 통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나라로 묘사하였다. 그 배후에 사회진화론의 ‘우승열패(優勝劣敗)’와 ‘적자생존(適者生存)’ 논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독립신문』에서는 사회진화론 중의 종족주의를 변용한 ‘동아동종론(东亚同种论)’을 내세워 청국, 일본을 한국과 상호 의존하는 형제라고 역설하였다. 한민족의 입장에서 서양의 백인 우월주 의를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면에 전통적 유교 사상을 이용해 청국, 일본과의 단합을 강화함으로써 본국 이익의 최대화를 실현하려는 실용적인 의도가 깔려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독립신문』에서의 청국·일본 형상은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이 나라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서 양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면서 본 민족의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변용을 한 것이 잘 나타 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화기는 한국이 동아시아 중요 인국인 청국과 일본을 새로 인식 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사회진화론 시각에서 한국 개화기 민족지 『독립신문』 중의 청국과 일본 형상을 비교하여 그 배후의 사상적 논리와 현실적 원인을 규명한다. 본 연구를 통해 근대 전환기 한국의 세계 인식과 동아시아 지역 인식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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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서세동점의 흐름에 따라 사회진화론이 한국에 전입되어 개화파를 비롯한 한국 근대 지식인들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주로 독립협회 임원들에 의해 운영된 『독립신문』의 논설에서 청국, 일본을 각각 생존경쟁에서의 실패자와 우승자, 변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는 나라와 변혁을 통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나라로 묘사하였다. 그 배후에 사회진화론의 ‘우승열패(優勝劣敗)’와 ‘적자생존(適者生存)’ 논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독립신문』에서는 사회진화론 중의 종족주의를 변용한 ‘동아동종론(东亚同种论)’을 내세워 청국, 일본을 한국과 상호 의존하는 형제라고 역설하였다. 한민족의 입장에서 서양의 백인 우월주 의를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면에 전통적 유교 사상을 이용해 청국, 일본과의 단합을 강화함으로써 본국 이익의 최대화를 실현하려는 실용적인 의도가 깔려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독립신문』에서의 청국·일본 형상은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이 나라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서 양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면서 본 민족의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변용을 한 것이 잘 나타 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화기는 한국이 동아시아 중요 인국인 청국과 일본을 새로 인식 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사회진화론 시각에서 한국 개화기 민족지 『독립신문』 중의 청국과 일본 형상을 비교하여 그 배후의 사상적 논리와 현실적 원인을 규명한다. 본 연구를 통해 근대 전환기 한국의 세계 인식과 동아시아 지역 인식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Social Evolutionism introduced into Korea with the eastern penetration of western powers and was actively accepted by Korean enlightened intellectuals. In the editorials of 『TONGNIP SINMUN』 run mainly by the members of Independence Club, the Qing and Japan were described as the inferior loser and superior winner in the survival competition, a country that seeks to overcome the crisis through reform and a country that has entered the ranks of the civilized countries through transformation. Behind this, the ideological logic is the ‘superiors win and inferiors lose’ and ‘survival of the fittest’. At the same time, 『TONGNIP SINMUN』 put forward the ‘East Asian Racial Homogeneity Theory’ which was a variation of the racism, and argued that the Qing and Japan were brothers who interdependent with Korea. From the perspective of the Korean people, it seems to have transformed white supremacy in the West. It is speculated that behind this lies a practical intention to maximize the interests of the home country by using traditional Confucian ideology to inspire unity with Qing and Japan. The image of Qing and Japan in the 『TONGNIP SINMUN』 shows that enlightenment intellectuals actively accepted western ideas for the enlightenment and independence of the country and transformed the theory of social evolutionism from the perspective of this nation. The Enlightenment period can be described as a time when Korea began to perceive the significant neighboring countries of Qing and Japan in East Asia in a new way. This study examines the ideological logic and practical causes behind the portrayal of Qing and Japan in the Korean Enlightenment nationalist newspaper 『TONGNIP SINMUN』 from a perspective of social evolution. Through this study, it is believed to contribute to the understanding of Korea's global perception and its perception of the East Asian region during the modern transition period.
한말 기독교 사회,민족운동의 신학적 배경과 그 성격에 관한 연구
숭실대학교 역사문물연구소(구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21집 2008.12 pp.213-254
...한국 기독교의 사회개혁과 민족운동의 역사적 전개와 신학적 배경,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하여 논구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초기 한국기독교인의 사회개혁과 민족운동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특히 초기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교리와 윤리에 입각한 사회개혁운동과 독립협회의 사회․민족운동을 기독교와의 관계 하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하였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1870년대 만주지역에서 입교한 기독교인들은 인간과 영원, 죄와 형벌의 종교적 고민과 관련되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들은 개화파 인사들과는 달리 성경과 기독교 소책자를 통해 기독교에 접근했으며, 기독교를 사회사상적, 개화운동적 차원에서 보다는 인간의 내면적 고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로 파악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 교회가 성장하고 기독교인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성경, 전도문서에 의한 기독교 교육은 한국사회에 소규모였지만, 기독교 윤리에 근거한 사회개혁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기독교 윤리에 근거한 사회개혁운동은 우상숭배와 제사의 거부, 술, 담배, 아편의 금지, 그리고 혼례와 장례의 문제, 여성의 인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같은 봉건적, 민족적 모순에 대한 비판과 개혁노력으로 나타났다.한편 초창기 기호지방의 개화파 지식인들에 기독교 선교는 직접적인 복음전도 보다 신교육을 통한 간접적인 문화선교 방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윤치호(尹致昊), 서재필(徐載弼) 등 당시 지식인들은 문명개화의 맥락에서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이렇게 ‘서구 기독교 문명의 힘’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신지식층 학생들과 양반 개혁 관료출신의 지식인들은 배재학당 내의 협성회와 독립협회를 통하여 사회개혁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독립협회의 창립과 지부 결성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만민공동회를 비롯한 반봉건, 반외세, 애국계몽과 국권회복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이 논문에서 이와 같은 역사적 논구를 바탕으로 선교초기 한국 기독교의 사회․민족운동의 신학적 배경을 파악하였다. 즉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선교초기 한국 기독교의 사회․민족운동은 한국에 내한한 선교사들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과 청교도적 경건주의 신앙, 네비우스의 선교방법론과 제임스 덴니스의 선교신학을 그 신학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논문은 한국 기독교 사회․민족운동의 성격을 규명하였다. 즉 필자는 본 논문에서 한말 기독교 사회·민족운동은 성서적 사회․민족운동, 반봉건적 사회운동, 반외세적 민족운동, 그리고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갈등을 뛰어넘는 통전적 사회․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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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초기 한국 기독교의 사회개혁과 민족운동의 역사적 전개와 신학적 배경,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하여 논구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초기 한국기독교인의 사회개혁과 민족운동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특히 초기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교리와 윤리에 입각한 사회개혁운동과 독립협회의 사회․민족운동을 기독교와의 관계 하에서 역사적으로 고찰하였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1870년대 만주지역에서 입교한 기독교인들은 인간과 영원, 죄와 형벌의 종교적 고민과 관련되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들은 개화파 인사들과는 달리 성경과 기독교 소책자를 통해 기독교에 접근했으며, 기독교를 사회사상적, 개화운동적 차원에서 보다는 인간의 내면적 고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로 파악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 교회가 성장하고 기독교인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성경, 전도문서에 의한 기독교 교육은 한국사회에 소규모였지만, 기독교 윤리에 근거한 사회개혁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기독교 윤리에 근거한 사회개혁운동은 우상숭배와 제사의 거부, 술, 담배, 아편의 금지, 그리고 혼례와 장례의 문제, 여성의 인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같은 봉건적, 민족적 모순에 대한 비판과 개혁노력으로 나타났다.한편 초창기 기호지방의 개화파 지식인들에 기독교 선교는 직접적인 복음전도 보다 신교육을 통한 간접적인 문화선교 방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윤치호(尹致昊), 서재필(徐載弼) 등 당시 지식인들은 문명개화의 맥락에서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이렇게 ‘서구 기독교 문명의 힘’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신지식층 학생들과 양반 개혁 관료출신의 지식인들은 배재학당 내의 협성회와 독립협회를 통하여 사회개혁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독립협회의 창립과 지부 결성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만민공동회를 비롯한 반봉건, 반외세, 애국계몽과 국권회복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이 논문에서 이와 같은 역사적 논구를 바탕으로 선교초기 한국 기독교의 사회․민족운동의 신학적 배경을 파악하였다. 즉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선교초기 한국 기독교의 사회․민족운동은 한국에 내한한 선교사들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과 청교도적 경건주의 신앙, 네비우스의 선교방법론과 제임스 덴니스의 선교신학을 그 신학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논문은 한국 기독교 사회․민족운동의 성격을 규명하였다. 즉 필자는 본 논문에서 한말 기독교 사회·민족운동은 성서적 사회․민족운동, 반봉건적 사회운동, 반외세적 민족운동, 그리고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갈등을 뛰어넘는 통전적 사회․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This paper is to study the social reform and national movements of christianity and its characteristics from 1884 to 1900 in Korea. Although Christianity was publically accommodated by an opening will of Innovational faction in Seoul, it spontaneously accepted by Korean people in Manchuria area since 1870. The Koreans converted from the heathendom world to christianity with a religious worry like human and eternity, sin and penality. They approached christianity through the bible and christianity pamphlets. They saw christianity as a religion that solved only the worry of human and the problem of the death. However, when a church grew and christian was increased, they learned christian ethics through the bible and evangelical pamphlets. And also, the christian education caused social innovational movement based on christian ethics to them.Meanwhile, social innovational movement refused worship and sacrifice to image, and prohibited a liquor, a cigarette, and opium in traditional Korea society. In Korea, it reformed the feudal and national contradictions like a problem of marriage and funeral, feminine right, and corruption of bureaucrat. The independency association made by Seo, Jae-pil attempted active social reform movement and national movement from 1896 to 1899.These movements have theologically three backgrounds. At first, it was conservative and evangelical theology. In Korea, the conservative and evangelical theology made by America's missionaries emphasized religious ethics. And it had an ideal that christianity is the source for civilization. Therefore, In Korea, conservative and evangelical theology could change the traditional social thought and system. Secondly, It was Puritan-Pietism Faith. It required ethical purity of church and high ethics of believers in order to practice them. Christian in Korean practiced Puritan-Pietism Faith in realm of ethic through the refuge of worship to Image. Thirdly, It was Nevius and Denis' Mission theology. It served as an principle of social participation in Korea. Meanwhile, These movements have three elements in Characteristics. At first, it has an characteristic of biblical movement. Secondly, it has an characteristic of anti-feudalism and anti-foreign movement. Thirdly, it has an characteristic of Holism.
Lost and Found : Go Hui-dong and Diamond Mountain KCI 등재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제52집 2015.08 pp.37-91
...한국미술사에서 고희동의 의미와 기여를 알아보았다. 고희동은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로 널리 알려졌으나 본 연구에서는 혼란스러운 격동기인 20세기 초를 살았던 그가 화가로서 또한 민족주의자로서 겪었던 갈등과 그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작품 활동을 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일본유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화가로서 고희동은 새로운 접근법과 풍경에 대한 객관적 표현을 시도함과 동시에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민족주의자로서 한국의 민족정기와 정체성, 그리고 자부심등을 보존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였다. 그는 역사적, 문화적 혼란기에서 그가 맞닥뜨린 여러 가지 미술양식, 기법과 재료들에 대한 모순과 갈등적 요소를 해결 또는 청산하고 끊임없이 절충하고 융합하여 독특하고 새로운 미술세계를 개척해냈다. 둘째, 이 연구에서는 한국회화사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금강산도가 일제강점기에 고희동과 그의 지식인 동료들에게 어떤 상징적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민족주의자로서 고희동은 금강산이 완전한 자연미의 덩어리 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한국인의 민족정신, 그리고 자부심 을 대표하는 영산이라 여기며 금강산도 연작활동을 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고희동의 현존하는 금강산도를 살펴보는 동시에 그동안 한국미술사가들에게 원작이 망실되어졌다고 알려진 1934년 고희동이 서화협회전에 출품했던 <금강오제>를 소개하였다. 1930년대 한국학생회를 통해 미국 뉴욕에 위치한 콜롬비아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 기증된 이 작품은 동아시아 도서관 소장품으로 지난 1970년대까지 도서관에 전시되어졌다. 최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보존연구실 팀에 의해서 복구된 금강산의 진주담을 그린 이 작품은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1940년과 1946년에 제작된 <진주담도>보다 더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고희동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1930년대 강점기에 민족정신과 자부심을 복구하려던 한국 미술가들과 미술세계를 이해하는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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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두 가지를 중심으로 연구했다. 첫째, 한국미술사에서 고희동의 의미와 기여를 알아보았다. 고희동은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로 널리 알려졌으나 본 연구에서는 혼란스러운 격동기인 20세기 초를 살았던 그가 화가로서 또한 민족주의자로서 겪었던 갈등과 그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작품 활동을 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일본유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화가로서 고희동은 새로운 접근법과 풍경에 대한 객관적 표현을 시도함과 동시에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민족주의자로서 한국의 민족정기와 정체성, 그리고 자부심등을 보존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였다. 그는 역사적, 문화적 혼란기에서 그가 맞닥뜨린 여러 가지 미술양식, 기법과 재료들에 대한 모순과 갈등적 요소를 해결 또는 청산하고 끊임없이 절충하고 융합하여 독특하고 새로운 미술세계를 개척해냈다. 둘째, 이 연구에서는 한국회화사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금강산도가 일제강점기에 고희동과 그의 지식인 동료들에게 어떤 상징적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민족주의자로서 고희동은 금강산이 완전한 자연미의 덩어리 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한국인의 민족정신, 그리고 자부심 을 대표하는 영산이라 여기며 금강산도 연작활동을 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고희동의 현존하는 금강산도를 살펴보는 동시에 그동안 한국미술사가들에게 원작이 망실되어졌다고 알려진 1934년 고희동이 서화협회전에 출품했던 <금강오제>를 소개하였다. 1930년대 한국학생회를 통해 미국 뉴욕에 위치한 콜롬비아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 기증된 이 작품은 동아시아 도서관 소장품으로 지난 1970년대까지 도서관에 전시되어졌다. 최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보존연구실 팀에 의해서 복구된 금강산의 진주담을 그린 이 작품은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1940년과 1946년에 제작된 <진주담도>보다 더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고희동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1930년대 강점기에 민족정신과 자부심을 복구하려던 한국 미술가들과 미술세계를 이해하는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This paper has two objectives. First, it explores the contributions of Go Hui-dong (1886–1965) to Korean art history. He is best known as Korea’s first Western-style painter, but here I focus on his struggles, how he tried to define himself as artist and nationalist in the tumultuous and confusing first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As an artist, Go experimented with new approaches, trying to produce “objective” representations of actual scenes, while at the same time seeking to preserve Korean national spirit, values, identity, and pride. He navigated the turbulence of his time, adjusting and compromising along the way, to resolve contradictions and conflicts in style, methodology, and media. The second part of the paper examines the painting tradition relative to Korea’s beautiful and beloved natural wonder, Diamond Mountain of Geumgang-san, and explores its symbolic role for Go Hui-dong and his intellectual colleagu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s a nationalist, Go found that Diamond Mountain could represent not only the pure beauty of nature in general, and the Korean landscape in particular, but also the pride and spirit of the Korean nation. A significant aspect of this paper is its introduction of Go’s rediscovered Jinju Pond painting in the collection of the Columbia University East Asian Library in New York. Once thought lost, it provides a missing link in Go’s artistic development of the 1930s. The painting, through its bold depiction of a part of Diamond Mountain, also expresses a determined, forward-looking Korea, struggling to emerge from foreign control.
체육계열 입시생의 입시학원 유입을 위한 광고 전략 연구 KCI 등재
한국스포츠학회 한국스포츠학회지 제18권 제4호 2020.12 pp.89-98
...협회 모의 실기 테스트에 참여한 체육계열 입시생들 273부를 최종분석 자료로 활용하였 다. 자료처리는 SPSS23.0을 활용하여 빈도분석을 하였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원 등록 경로와 관련된 내용에서 친구 추천, 학원공책 광고, 인터넷(SNS, 기사, 지식인 등)이 순위에 포함됐다. 둘째, 학원 고려사항과 관련된 내용에서 지도자․강사의 능력, 학원프로그램 내용, 전문장비 구축이 순위에 포함됐다. 셋째, 체육계열 입시 결정 이유와 관련된 내용 에서 스포츠계열입사, 체육교사, 대학교 입학 수단이 순위에 포함됐다. 넷째, 학원을 옮기는 이유와 관련된 내용에서 지도 자․강사의 능력부족, 비용 문제, 학원장비구축 부족이 순위에 포함됐다. 다섯째, 운동능력 향상 방법과 관련된 내용에서 지도자․강사에게 문의, 친구 또는 선배에게 문의, 유튜브실기영상이 순위에 포함됐다. 여섯째, 선호하는 교육 스타일과 관련된 내용에서 교육의 전문성, 개인 맞춤성, 교육의 흥미성이 순위에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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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체육계열 입시생의 입시학원 유입을 위한 광고 전략을 알아보고 분석하는 것이다. 연구의 대상은 2019년 8월 10일 체대입시학원협회 모의 실기 테스트에 참여한 체육계열 입시생들 273부를 최종분석 자료로 활용하였 다. 자료처리는 SPSS23.0을 활용하여 빈도분석을 하였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원 등록 경로와 관련된 내용에서 친구 추천, 학원공책 광고, 인터넷(SNS, 기사, 지식인 등)이 순위에 포함됐다. 둘째, 학원 고려사항과 관련된 내용에서 지도자․강사의 능력, 학원프로그램 내용, 전문장비 구축이 순위에 포함됐다. 셋째, 체육계열 입시 결정 이유와 관련된 내용 에서 스포츠계열입사, 체육교사, 대학교 입학 수단이 순위에 포함됐다. 넷째, 학원을 옮기는 이유와 관련된 내용에서 지도 자․강사의 능력부족, 비용 문제, 학원장비구축 부족이 순위에 포함됐다. 다섯째, 운동능력 향상 방법과 관련된 내용에서 지도자․강사에게 문의, 친구 또는 선배에게 문의, 유튜브실기영상이 순위에 포함됐다. 여섯째, 선호하는 교육 스타일과 관련된 내용에서 교육의 전문성, 개인 맞춤성, 교육의 흥미성이 순위에 포함됐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ut the advertising effect strategy for the admission of physical education students to the entrance examination academy. The subject of the study was 273 copies of physical education admissions students who participated in the practice test of the sports training academy association on August 10, 2019 as final analysis data. For data processing, frequency analysis was performed using SPSS23.0. The result is as follows. First, in the content related to the academy registration path, friend recommendation, academy notebook advertisement, and the Internet(SNS, articles, intellectuals, etc.) were included in the ranking. Second, in the content related to the consideration of academy, the ability of instructors and lecturers, the content of the academy program, and the establishment of specialized equipment were included in the ranking. Third, in the content related to the reason for deciding the admission to the physical education field, the means of entering a sports field, a physical education teacher, and a university Fourth, in the content related to the reason for moving the academy, the lack of ability of the instructors and instructors, the problem of cost, and the lack of the construction of the institute's equipment were included in the ranking. Fifth, inquiries to the instructors and instructors regarding how to improve athletic ability , Inquiry to friends or seniors, YouTube live video was included in the ranking. Sixth, in the content related to the preferred educational style, education professionalism, individuality, and interest in education were included in the ranking.
산ㆍ학 컨소시엄을 통한 교육과정 사례에 관한 연구 - A대학의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 KCI 등재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회 일러스트레이션 포럼 Vol.75 2023.06 pp.19-30
...지식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시대에 대학은 지식 습득 방식에서 벗어 나 직무역량을 습득해야하는 중요성을 대두시키고 있 다. 또한 선진국들은 빅데이터 활용을 앞세워 미래사회 가 요구하는 창의융합형 인재를 효율적인 방법으로 양 성하고 있다. 본 연구는 A대학교의 연계전공의 산업계 요구에 부합하는 전문인을 양성하도록 산학컨소시엄 교 육과정의 개발 절차 및 그 결과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에서 제 4차 산업혁명시대가 요구하는 디자인 주도로 공학·경영 학 등과의 다학제적 교육과정 지원 사업을 공고하였고, 이를 교육과정의 모형으로 제시해 분석 모형으로 설정 한다. 제시된 모형의 분석요소는 교육과정의 개괄도, 교과목 개발현황, 컨소시엄(산학협력), 결과물 도출, 수 혜학생 만족도 조사로 선정되었다. 연구 분석 대상의 기간은 2020년~ 2022년까지의 교육과정에 한하며, 총 31명의 수혜학생과 12명의 참여인력으로 진행, 5개의 기업과의 프로젝트 진행, 36건의 시제품 개발을 진행 하였다. 결론적으로 국내 타 대학과는 다르게 융합디자 인 교육과정을 연계전공으로 개설하여 학생들의 역량을 키운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고, 산학협력의 컨소시엄으 로 기존의 대학교의 이론 위주의 수업과는 다른 실무 위주의 현장실습이 가능하다는 강점이 나타난다. 산학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한정된 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양한 역량을 가진 학생들과 결과 물 및 시제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강점으로 나타났고, 수혜 학생 및 산업체 만족도 설문조사를 통 해 지속적으로 만족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향후 융복합 디자인 교육과정을 진행할 때 에 기초 자료로 활용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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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대학은 이론을 위주, 교육 및 연구를 중심으 로 지식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시대에 대학은 지식 습득 방식에서 벗어 나 직무역량을 습득해야하는 중요성을 대두시키고 있 다. 또한 선진국들은 빅데이터 활용을 앞세워 미래사회 가 요구하는 창의융합형 인재를 효율적인 방법으로 양 성하고 있다. 본 연구는 A대학교의 연계전공의 산업계 요구에 부합하는 전문인을 양성하도록 산학컨소시엄 교 육과정의 개발 절차 및 그 결과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에서 제 4차 산업혁명시대가 요구하는 디자인 주도로 공학·경영 학 등과의 다학제적 교육과정 지원 사업을 공고하였고, 이를 교육과정의 모형으로 제시해 분석 모형으로 설정 한다. 제시된 모형의 분석요소는 교육과정의 개괄도, 교과목 개발현황, 컨소시엄(산학협력), 결과물 도출, 수 혜학생 만족도 조사로 선정되었다. 연구 분석 대상의 기간은 2020년~ 2022년까지의 교육과정에 한하며, 총 31명의 수혜학생과 12명의 참여인력으로 진행, 5개의 기업과의 프로젝트 진행, 36건의 시제품 개발을 진행 하였다. 결론적으로 국내 타 대학과는 다르게 융합디자 인 교육과정을 연계전공으로 개설하여 학생들의 역량을 키운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고, 산학협력의 컨소시엄으 로 기존의 대학교의 이론 위주의 수업과는 다른 실무 위주의 현장실습이 가능하다는 강점이 나타난다. 산학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한정된 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양한 역량을 가진 학생들과 결과 물 및 시제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강점으로 나타났고, 수혜 학생 및 산업체 만족도 설문조사를 통 해 지속적으로 만족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향후 융복합 디자인 교육과정을 진행할 때 에 기초 자료로 활용하였으면 한다.
In the era of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universities need to provide experience learning in subjects and comparative departments so that students have the job competencies necessary for entering society, breaking away from the past method of delivering only knowledge. In addition, advanced countries are fostering creative convergence talents required by future society in an efficient way by using big data.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development procedures and results of the curriculum to train professionals who meet the industrial needs of A University's big data literacy design-linked major. The Ministry of Trade, Industry and Energy and the Korea Design Promotion Agency announced a multidisciplinary curriculum support project in engineering and management required by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era, and presented it as a model for the curriculum and set it as an analysis model. The analysis elements of the presented model were selected as a general overview of the curriculum, the current status of curriculum development, consortium (industrial-academic cooperation), outcome derivation, and beneficiary student satisfaction survey. The period of research analysis is limited to the curriculum from 2020 to 2022, and a total of 31 beneficiary students and 12 participants were conducted, projects with 5 companies, and 36 prototypes were developed. In conclusion, unlike other universities in Korea, it is very meaningful to open a convergence design curriculum as a linked major to develop students' capabilities, and the consortium of industry-academic cooperation enables practical field practice different from the existing university's theory-oriented classes. The fact that only a limited number of students could participate in the competition, but also that they were able to produce results and prototypes with students with various abilities, and the satisfaction survey of beneficiary students and industries showed that satisfaction continued to increase. It is hoped that it will be used as basic data when conducting the convergence design curriculum in the future.
20세기 초 한국과 베트남의 근대 지리 담론 수용 비교 연구 KCI 등재
국제한인문학회 국제한인문학연구 제34호 2022.12 pp.231-257
...협회지를 대상으로 하여, 근대 지리 담론이 어떻게 양국에 수 용되었는가를 비교 연구하였다. 베트남의 『육성신문』에는 수십편의 기행문과 지리 담론이 투영된 글들이 수록되어있는데, 대부분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근대 화의 논리를 옹호하거나 국토 개발의 성과를 홍보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이에 비해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근대 지리학을 과학의 한 분과로서 이해하여 계몽을 위한 지식으로 소개했는데, 지리 담론은 서구식 근대화를 위해서는 국토를 개발하고 식산을 위해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논리를 위해 주로 강조되었다. 그러 나 이 같은 논리에는 자국의 국토와 자국민의 태도를 비판해야만 근대적 계몽 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시각이 반영되어있었는데, 이는 결국 서구 열강들의 지 배 논리와 큰 차이를 지니지 못했다. 자기부정의 논리에서 출발한 근대 지리 담 론의 수용은 국토의 효용성에 대한 부정, 국민의 나태함에 대한 부정의 논리로 이어졌고, 베트남과 대한제국 모두 열강의 지배 논리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전 파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같은 이식된 지리 담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가능해진 것은 식민 지배를 본격적으로 받은 후, 개발의 실체가 수탈이었다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한 뒤에나 가능했다. 그것은 식민지민 스스로 자국의 국토와 인민, 역사를 긍정하고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돼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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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20세기 초 베트남의 『육성신문(Lục Tỉnh Tân Văn 六省新聞)』과 대 한제국의 학회 및 협회지를 대상으로 하여, 근대 지리 담론이 어떻게 양국에 수 용되었는가를 비교 연구하였다. 베트남의 『육성신문』에는 수십편의 기행문과 지리 담론이 투영된 글들이 수록되어있는데, 대부분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근대 화의 논리를 옹호하거나 국토 개발의 성과를 홍보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이에 비해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근대 지리학을 과학의 한 분과로서 이해하여 계몽을 위한 지식으로 소개했는데, 지리 담론은 서구식 근대화를 위해서는 국토를 개발하고 식산을 위해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논리를 위해 주로 강조되었다. 그러 나 이 같은 논리에는 자국의 국토와 자국민의 태도를 비판해야만 근대적 계몽 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시각이 반영되어있었는데, 이는 결국 서구 열강들의 지 배 논리와 큰 차이를 지니지 못했다. 자기부정의 논리에서 출발한 근대 지리 담 론의 수용은 국토의 효용성에 대한 부정, 국민의 나태함에 대한 부정의 논리로 이어졌고, 베트남과 대한제국 모두 열강의 지배 논리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전 파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같은 이식된 지리 담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가능해진 것은 식민 지배를 본격적으로 받은 후, 개발의 실체가 수탈이었다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한 뒤에나 가능했다. 그것은 식민지민 스스로 자국의 국토와 인민, 역사를 긍정하고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돼야 했던 것이다.
This study carried out a comparative study on how the discourse of modern geography was accepted in Vietnam and Korea, based on “Lục Tỉnh Tân Văn” of Vietnam as well as academic journals and association journals of the Korean Empire in the early 20th century. “Lục Tỉnh Tân Văn” of Vietnam contains dozens of travel essays and articles reflecting geographical discourse, most of which are focused on defense of the logic of modernization of the French colonial government or promotion of the achievements of national land development. Contrariwise, the intellectuals of the Korean Empire interpreted modern geography as one of the branches of science and introduced it as knowledge aiming at enlightenment. Geographical discourse was mainly emphasized for the logic asserting that Western modernization indispensably required land development and increase of productivity. Nevertheless, this logic reflected the view in which modern enlightenment could only be achieved by criticizing the people and the attitudes of its own people. In the end, there was not much difference between this logic and that of domination of western powers. The acceptance of the modern geographical discourse, which started from the logic of self-denial, led to the logic of negation of the usefulness regarding not only the land, but also the laziness of the people. This resulted in the paradoxical emphasis on the logic of the domination of western powers as well as its widespread distribution. This critical perspective on the geographical discourse which had been transplanted this way could be made only after having been under the full-fledged colonial rule by witnessing and experiencing that the reality of development was a synonym of expropriation. The colonized people themselves should have affirmed their own land, people, and history, recognizing such elements from a subjective perspective.
한국 펜(PEN) 이후 『자유문학』과 민족문학론의 분기(分岐)
[NRF 연계]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한국문학연구 Vol.61 2019.12 pp.259-286
...한국지부(1954)가 창립된 시기는 미국 대외원조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급증하는 가운데 반둥회의가 개최되고 냉전의 다극화 현상이 나타난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한다. 국내적으로는 이승만 정부가 중화민국, 필리핀, 베트남 등과 협의해 아시아집단안보체제(아시아민족반공연맹, APACL)의 결성을 모색하고 정부 주도의 반공/반일문화전선이 구축된 시기였다. 이 논문은 한국 펜의 국제적 활동이 어떤 성격과 규모로 소개되고, 그것이 한국 지식인의 세계성 인식과 민족문학론에 어떤 방식으로 연동되는지를 살핀 글이다. 한국 펜을 주축으로 발간된 『자유문학』(자유문학협회)은 자유아시아, 세계평화 등 정부 주도의 반공주의적 문화외교에 상응하는 독자적인 민족문학론을 전개했다. 특집 「고전과 전통」(1956)을 통해 알 수 있듯, 『자유문학』의 전통계승론과 동양문화론은 한국문인의 세계정세에 대한 전망을 포함한다. 「고전과 전통」 특집에서 최일수는 전통론 붐을 새로운 현상으로 지적하는 가운데 동서문화교류를 “현대와 전통을 역사적으로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계기”, 즉 전통계승론의 유력한 논거로 이해했다. 국제 펜대회 활동 등의 외부 조건이 자유문협과 한국 펜 문인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문학에 관심을 둔 신진비평가에게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을 만큼 그것은 추상적인 슬로건이 아니라 문인들의 국제경험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국제 펜클럽 한국지부(1954)가 창립된 시기는 미국 대외원조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급증하는 가운데 반둥회의가 개최되고 냉전의 다극화 현상이 나타난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한다. 국내적으로는 이승만 정부가 중화민국, 필리핀, 베트남 등과 협의해 아시아집단안보체제(아시아민족반공연맹, APACL)의 결성을 모색하고 정부 주도의 반공/반일문화전선이 구축된 시기였다. 이 논문은 한국 펜의 국제적 활동이 어떤 성격과 규모로 소개되고, 그것이 한국 지식인의 세계성 인식과 민족문학론에 어떤 방식으로 연동되는지를 살핀 글이다. 한국 펜을 주축으로 발간된 『자유문학』(자유문학협회)은 자유아시아, 세계평화 등 정부 주도의 반공주의적 문화외교에 상응하는 독자적인 민족문학론을 전개했다. 특집 「고전과 전통」(1956)을 통해 알 수 있듯, 『자유문학』의 전통계승론과 동양문화론은 한국문인의 세계정세에 대한 전망을 포함한다. 「고전과 전통」 특집에서 최일수는 전통론 붐을 새로운 현상으로 지적하는 가운데 동서문화교류를 “현대와 전통을 역사적으로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계기”, 즉 전통계승론의 유력한 논거로 이해했다. 국제 펜대회 활동 등의 외부 조건이 자유문협과 한국 펜 문인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문학에 관심을 둔 신진비평가에게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을 만큼 그것은 추상적인 슬로건이 아니라 문인들의 국제경험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었다.
After the establishment of Korean PEN Club, America's Foreign Support for Asia increased sharply. Furthermore Bandung Conference was held in 1954 and Cold War was multipolarized. Domestically it was the period when Lee Seungman's government sought the formation of APACL cooperatively witn Republic of China, Philippines and Vietnam, and made up the cultural frontline against Japan and cummunism. This paper is not only to examine what is the scale and Characteristic of international activities by Korean PEN Club, but to its influences on national literature and Koran intelletuals' recognition of globality. Free Literature largely published by Korean PEN Club had developed its own the theory of national literature equivalent for cultural diplomacy by government such as free Asia and world peace. The special section canon and tradition (1956) shown the evidences of making the journal's anti-communism with the theories on tradition succession and oriental culture.
독립협회에 대한 유교 관료와 지식인들의 인식 : 상소문(上疏文)을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사회이론학회 사회이론 Vol.50 2016.11 pp.103-138
...협회를 접근할 경우, 전통적인 책무의 이행자로서 유교 지식인들의 독립협회에 대한 당대의 시각과 평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보편사의 맥락에서 근대로의 편입 이후 한국은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내부 체제정비와 외부 열강간섭과 개입을 배제하는데 실패했다.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고민해야 할 사항은 왜 실패했고 누가 책임져야하는가에 대한 해답이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극적 상황에저항하고 책무를 자임하는 영웅들의 집단적 대두라는 현상이다. 그들이야말로 자주적 근대화의 목표를 성취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성찰하고 실천하려는 정치지성(政治知性)으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새로운 정치지형으로의 재편과정에서 책무를 자임했던 정치주체들에 주목하는 것만큼, 그 과정에서 기존정치과정의 전통적인 정치주체들인 유교 지식인들은 당대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모색하려고 했는지, 또는 정치지성으로의 역할을 수행했는지 여부 역시 당연히 설명되어야 한다. 전통적 정치지성의 범주로 경계 지을 수 있는 유교 관료와 지식인들은 독립협회의 정치개혁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와 정치권위에 대한반역의 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나 정치적 타협의 가능성은 열려있었고, 양자의 배경이 반드시 상치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정치지성으로서 유교 지식인들은 여전히 황제와 확장된 공론의장을 다시 폐쇄하고 자신들의 언어와 말에 의한 공론정치를 유지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독립협회와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자주적 근대화의 실패라는 결과를 전제로 당대 정치지성으로의 책무를 이행하는데 실패했다고유교 지식인들을 평가하는 것 역시 가혹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자신의 정치적 삶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진단에 따른 처방을 공자와 마찬가지로 과거 성공적인 모델에서 찾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정치적 책무의 맥락에서 독립협회를 접근할 경우, 전통적인 책무의 이행자로서 유교 지식인들의 독립협회에 대한 당대의 시각과 평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보편사의 맥락에서 근대로의 편입 이후 한국은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내부 체제정비와 외부 열강간섭과 개입을 배제하는데 실패했다.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고민해야 할 사항은 왜 실패했고 누가 책임져야하는가에 대한 해답이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극적 상황에저항하고 책무를 자임하는 영웅들의 집단적 대두라는 현상이다. 그들이야말로 자주적 근대화의 목표를 성취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성찰하고 실천하려는 정치지성(政治知性)으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새로운 정치지형으로의 재편과정에서 책무를 자임했던 정치주체들에 주목하는 것만큼, 그 과정에서 기존정치과정의 전통적인 정치주체들인 유교 지식인들은 당대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모색하려고 했는지, 또는 정치지성으로의 역할을 수행했는지 여부 역시 당연히 설명되어야 한다. 전통적 정치지성의 범주로 경계 지을 수 있는 유교 관료와 지식인들은 독립협회의 정치개혁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와 정치권위에 대한반역의 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나 정치적 타협의 가능성은 열려있었고, 양자의 배경이 반드시 상치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정치지성으로서 유교 지식인들은 여전히 황제와 확장된 공론의장을 다시 폐쇄하고 자신들의 언어와 말에 의한 공론정치를 유지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독립협회와 긴장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자주적 근대화의 실패라는 결과를 전제로 당대 정치지성으로의 책무를 이행하는데 실패했다고유교 지식인들을 평가하는 것 역시 가혹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자신의 정치적 삶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진단에 따른 처방을 공자와 마찬가지로 과거 성공적인 모델에서 찾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In the context of political duty, this study is to seek views and evaluations of confucian intellectuals as traditional political subject on Korean Independence Society. In process of modernization on self-reliance, Korea Empire was failed to build modern nation-state and exclude external intervention. But nobody took responsibility for fall, the problems on modernization of Korea Empire remain on question. At that time, emergence of heroes struggling with tragic situation was critical point we have to note. They were real political intellectuals who should share a common responsibility for self-duty of reflection and practices to modernization on self-reliance. In contrast, traditional political intellectuals were confucian intellectuals. What did they do? How did confucian intellectuals see new political intellectuals? The typical example of new political intellectuals’ thinking and practice was Korean Independence Society. Korean Independence Society demanded democratic republic polity. Confucian intellectuals doubted new intellectuals’ intentions as treason against Emperor. The tension between both might be originated from confucian intellectuals who did not infringe acquired rights of public section in new age. But it might be severe to shift fall of nation on confucian intellectuals. Because confucian intellectuals also understood their own political life in changing new age, and had political duty finding to successful model as like Confucius did.
[Kisti 연계] 한국조경학회 한국조경학회지 Vol.39 No.6 2011 pp.76-85
...한국인의 공원관 형성과 도시 공원의 성립에 관해 고찰하였다. 즉, 서구로부터 도입된 공원 개념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한국인들이 그것을 어떤 태도로,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하고자 했는지를 파악해 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개항 이후 최초로 외국의 근대 문물을 시찰하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던 수신사의 "수신사기록"에서부터 해외 유학생들의 견문 기록 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볼 수 있는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윤치호의 "윤치호일기", 그리고 한국 최초의 자주적 공원인 '독립공원' 조성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독립신문"을 비롯한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몇 가지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했으며, 가능한 한 1차 문헌에서 관련 내용을 발굴하고 해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개항기 한국의 근대적 개혁을 이끌었던 지식인들 사이 공원 의식이 생겨나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수신사의 공원 인식에서부터 유길준의 공원의 필요성 인식, 그리고 윤치호의 공원에 대한 문화적 예술적 관심에 이르기까지, 공원관이 확대되고 심화되어 가는 과정이 확인되었다. 특히 서재필과 독립협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독립공원은 사회적 의미와 상징을 담은 공간으로 운동, 휴식, 위생, 계몽을 위한 도시 공원이었으며, 이러한 공원을 비롯한 도시 녹지의 필요성에 관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즉,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인들에게는 공원에 대한 의식과 견해가 형성되었으며, 단순한 모방과 이식이 아니라 충분한 이해와 사회적 필요성을 바탕으로 공원이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공원의 근간을 이루는 태동기 역사를 규명하고자 했던 본 논문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소홀히 다뤄져 왔던 한국 공원의 뿌리를 규명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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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1876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 존재해 온 공원의 태동기 역사를 규명하고자 한 본 논문은 개항기 한국인의 공원관 형성과 도시 공원의 성립에 관해 고찰하였다. 즉, 서구로부터 도입된 공원 개념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한국인들이 그것을 어떤 태도로,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하고자 했는지를 파악해 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개항 이후 최초로 외국의 근대 문물을 시찰하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던 수신사의 "수신사기록"에서부터 해외 유학생들의 견문 기록 중 가장 대표적인 저작으로 볼 수 있는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윤치호의 "윤치호일기", 그리고 한국 최초의 자주적 공원인 '독립공원' 조성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독립신문"을 비롯한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몇 가지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했으며, 가능한 한 1차 문헌에서 관련 내용을 발굴하고 해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개항기 한국의 근대적 개혁을 이끌었던 지식인들 사이 공원 의식이 생겨나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수신사의 공원 인식에서부터 유길준의 공원의 필요성 인식, 그리고 윤치호의 공원에 대한 문화적 예술적 관심에 이르기까지, 공원관이 확대되고 심화되어 가는 과정이 확인되었다. 특히 서재필과 독립협회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독립공원은 사회적 의미와 상징을 담은 공간으로 운동, 휴식, 위생, 계몽을 위한 도시 공원이었으며, 이러한 공원을 비롯한 도시 녹지의 필요성에 관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즉,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인들에게는 공원에 대한 의식과 견해가 형성되었으며, 단순한 모방과 이식이 아니라 충분한 이해와 사회적 필요성을 바탕으로 공원이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공원의 근간을 이루는 태동기 역사를 규명하고자 했던 본 논문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소홀히 다뤄져 왔던 한국 공원의 뿌리를 규명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This research explores the Korean perspective on parks and the beginning of urban parks in the port opening period. The purpose of the study is to understand how Koreans viewed and accepted the idea of a park as imported from western culture and with what attitudes. Analyzed sources included: "Susinsa's Record"(修信使記錄) by Susinsa(修信使) who wrote the inspection records of foreign modern cultures for the first time after the port opening, "Seoyukyunmun"(西遊見聞) by Yu Kil-jun(兪吉濬) and "Yun Chi-ho's Diary"(尹致昊日記) by Yun Chi-ho(尹致昊), which are representative works by students sent abroad, as well as some records of Seo Jae-pil(徐載弼) and The Independence Club(獨立協會) such as "The Independent"(獨立新聞), which contains the records of 'IndependencePark'. This research is focused on the literature that reexamins and interprets the related data from primary sources.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the people who led the modern reformation in the Port Opening period adopted and developed social thinking regarding parks. Indeed, it was possible to witness the gradual sophistication of the concept of a park from the time of Susina's thoughts on parks to that of Yu Kil-jun's support for the need and importance of parks and Yun Chi-ho's cultural and artistic interest in parks. Also, Seo Jae-pil and the Independence Club drove the development of Independence Park, which was designed to incorporate social values and symbols while also serving to meet the needs of recreation, leisure, hygiene, and enlightenment. The Independence Club consistently advocated for the necessity of open spaces and delivered this message to the public via article writing. In short, even prior to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oreans shared thoughts and exchanged opinions on parks. Parks were to be created not just as a copy or transplant of western parks, but were constructed based on social demands and necessity. As few studies have taken the approach of identifying this origin of Korean parks, thus, this research which traces back the origin of Korean parks, is significant.
[NRF 연계]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Vol.55 2015.12 pp.245-264
...한국유학생 잡지를 연구하는 데 있다. 이 시기 잡지에 대한 연구는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 아래 놓여있던 한국유학생들이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했는가에 대한 모색과 탐색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를 갖는다. 또한 재일본 한국유학생 잡지에 대한 고찰은 당대 지식인의 변동과 사상계의 동향을 읽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문화와 예술을 받아들여 우리의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한국유학생들의 실천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다. 재일본 한국유학생 잡지 연구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유학생들의 시대인식과 현실극복 의지 등 한국유학생들의 노력과 새로운 인식을 드러내는 모색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한국유학생들의 자기 확립과 시대인식, 그리고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 해결 의지와 근대적 인식 등이 그것이다. 특히 본 연구는 잡지의 ‘창간사’와 ‘발간사’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된다. 창간사는 잡지 간행의 목적 및 의도, 방법을 드러내는 잡지 전체의 방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재일본 한국유학생의 사상과 시대적 인식을 응축해 놓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 가운데 단체 및 협회가 아닌 재일본 대학 소속 한국유학생 잡지인 <학우>, <회보>(명치대학조선유학생동지회회보), <회지>(일본중앙Chuo대학우리동창회회지), <회보>(경도제국대학조선유학생동창회회보), <동창회회지>(조도전대학우리동창회회지)의 총 5종의 잡지 ‘창간사 및 발간사’를 우선적으로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재일본 한국유학생 잡지를 연구하는 데 있다. 이 시기 잡지에 대한 연구는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 아래 놓여있던 한국유학생들이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했는가에 대한 모색과 탐색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를 갖는다. 또한 재일본 한국유학생 잡지에 대한 고찰은 당대 지식인의 변동과 사상계의 동향을 읽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문화와 예술을 받아들여 우리의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한국유학생들의 실천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가 있다. 재일본 한국유학생 잡지 연구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유학생들의 시대인식과 현실극복 의지 등 한국유학생들의 노력과 새로운 인식을 드러내는 모색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한국유학생들의 자기 확립과 시대인식, 그리고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 해결 의지와 근대적 인식 등이 그것이다. 특히 본 연구는 잡지의 ‘창간사’와 ‘발간사’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된다. 창간사는 잡지 간행의 목적 및 의도, 방법을 드러내는 잡지 전체의 방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재일본 한국유학생의 사상과 시대적 인식을 응축해 놓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 가운데 단체 및 협회가 아닌 재일본 대학 소속 한국유학생 잡지인 <학우>, <회보>(명치대학조선유학생동지회회보), <회지>(일본중앙Chuo대학우리동창회회지), <회보>(경도제국대학조선유학생동창회회보), <동창회회지>(조도전대학우리동창회회지)의 총 5종의 잡지 ‘창간사 및 발간사’를 우선적으로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he contemplation on the magazine of Korean students studying in Japan. The research on this magazine is significant in two ways. One is that this represents how Korean students studying tried to overcome the reality under Japanese colonial era, which is peculiar external situation. The other reason, which is more important, is that based on the contemplation on the study, we can figure out the change and the trend of intellects at that time as well as the direction of the practice that Korean students studying had done to create our new culture and arts with accepting foreign’s. Based on this study, we can figure out the results of the endeavor and recognition which Korean students studying had done to overcome their reality. Those is self-establishment, awareness of time, willingness to solve the immediate problems and modern recognition, etc. In particular, this study is focusing more on ‘publication’ of the magazine. With publication, we can measure the whole direction of the purpose or intention of issuing magazine. This is the compressed data which represents the Korean students’ ideology and awareness of the era. The subjects of this study are <Hakwoo(Classmate)>, <Hoebo(Chosun student alumni bulletin in Meiji University)>, <Hoeji(Woori alumni bulletin in Chuo University)>, <Hoebo(Chosun student alumni bulletin in Kyoto Imperial University)>, <Dongchanghoehoeji(Woori alumni bulletin in Waseda University)>. Those fives are the magazine of Korean students studying belonging to college in Japan, and again, publication is the main point in the first place.
근대 초기 한국과 베트남의 과학 담론 수용 양상과 대비적 특질 - 학술지와 잡지 수록 글들을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한국문학과 예술 Vol.42 2022.06 pp.39-64
...한국과 베트남의 근대 초기 서구 근대 과학 담론의 수용 양상을 대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식민지시기를 거친 아시아 각국의 근대화 과정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대한제국 시기의 학회 및 협회지에 수록된 과학 담론 및 지식 관련 글들과 베트남의 종합 잡지 매체인 『남풍』에 수록된 글들을 비교하였다. 그 결과 근대 과학 담론이 지닌 파괴력은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의 양국민들에게 자기부정과 지배에 대한 순응논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상황 속에서 근대 교육에 노출된 지식인들은 근대 과학 담론을 독립적인 근대 국가로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로 이해하여 적극적으로 소개하였고, 식민지 중기에 접어든 베트남의 경우 지배국인 프랑스에 대한 비판은 제거된 채 총독부의 정책에 대한 홍보와 순응이라는 목적을 위해 과학 담론을 전파하였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고는 한국과 베트남의 근대 초기 서구 근대 과학 담론의 수용 양상을 대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식민지시기를 거친 아시아 각국의 근대화 과정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대한제국 시기의 학회 및 협회지에 수록된 과학 담론 및 지식 관련 글들과 베트남의 종합 잡지 매체인 『남풍』에 수록된 글들을 비교하였다. 그 결과 근대 과학 담론이 지닌 파괴력은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의 양국민들에게 자기부정과 지배에 대한 순응논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상황 속에서 근대 교육에 노출된 지식인들은 근대 과학 담론을 독립적인 근대 국가로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로 이해하여 적극적으로 소개하였고, 식민지 중기에 접어든 베트남의 경우 지배국인 프랑스에 대한 비판은 제거된 채 총독부의 정책에 대한 홍보와 순응이라는 목적을 위해 과학 담론을 전파하였다.
This research tried to investigate in detail the issues of the modernization process in Asia countries which have gone through the colonial period by means of analysing and comparing the aspects accepting the modern scientific discourse of The West in Korea and Vietnam in the early modern period. For this purpose, articles about scientific discourse and knowledge in the journals of academies and associations under the Korean Empire were compared to articles in Nam Phong general journal of Viet Nam. As a result, people said that the destructive power of the modern scientific discourse led to a logic of the suitability for self-denial and dominance with people in two Asia countries which were colonies in the past. In the context of the Korean Empire in danger of becoming a colony, intellectuals exposed to modern education have actively given modern scientific discourses as an essential factor for the development of a modern independent nation. When Viet Nam went through the middle of the colonial period, the criticism of France ? the governing country was prohibited and scientific speechs were spreadly conducted in order to propagate and comply with the Governor's policy publicly.
[NRF 연계] 한국교회법학회 교회와 법 Vol.8 No.2 2022.02 pp.10-47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을 육성하였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한글 보급, 남녀평등, 백정 신분 해방 등에 공헌하였다. 교회는 또한 건축에서 당시의 문화 상황을 고려하여 전통 한옥 양식을 가미한 ㄱ자형 건물들을 건축하여 주체적인 수용의 측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서양식 교회양식으로 건축된 교회들도 있었다. 그와 함께 기독교는 조선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제도가 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회자들은 차별적인 직업의식을 타파하고 노동이 소중하다는 청교도적인 직업윤리를 확립시켰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실업교육을 시행하고 대학에서 관련 학문들을 교육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인들은 물산장려운동을 통한 경제 실력양성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민주주의 발전에는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등이 독립협회를 통해 민주주의 훈련을 시작하였다. 안창호는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등을 통해 공화제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흐름들이 종합되어 1919년 3.1운동 후에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조가 제정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근대문화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근대문화유산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문화 유산들 가운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이 다수가 있다. 우리는 근대문화의 뿌리인 이러한 등록문화재를 잘 보존할 뿐만 아니라 후세에 대한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더 나아가 관광자원으로 활동해야 할 것이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1884년 알렌이 선교사로 입국해서 활동한 이후에 기독교는 서양 근대문화가 조선에 들어오는 통로가 되어 근대문화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양식 병원이 세워지고 의료인들이 양성되면서 서양식 근대 의료체계가 형성되었다. 배재, 이화, 경신 학교들이 세워져 고등교육기관으로까지 발전하여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을 육성하였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한글 보급, 남녀평등, 백정 신분 해방 등에 공헌하였다. 교회는 또한 건축에서 당시의 문화 상황을 고려하여 전통 한옥 양식을 가미한 ㄱ자형 건물들을 건축하여 주체적인 수용의 측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서양식 교회양식으로 건축된 교회들도 있었다. 그와 함께 기독교는 조선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제도가 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회자들은 차별적인 직업의식을 타파하고 노동이 소중하다는 청교도적인 직업윤리를 확립시켰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실업교육을 시행하고 대학에서 관련 학문들을 교육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인들은 물산장려운동을 통한 경제 실력양성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민주주의 발전에는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등이 독립협회를 통해 민주주의 훈련을 시작하였다. 안창호는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등을 통해 공화제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흐름들이 종합되어 1919년 3.1운동 후에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조가 제정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근대문화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근대문화유산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문화 유산들 가운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이 다수가 있다. 우리는 근대문화의 뿌리인 이러한 등록문화재를 잘 보존할 뿐만 아니라 후세에 대한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더 나아가 관광자원으로 활동해야 할 것이다.
냉전과 월남지식인, 냉전문화기획자 오영진 - 한국전쟁 전후 오영진의 문화 활동
[NRF 연계] 민족문학사연구소 민족문학사연구 Vol.61 2016.08 pp.195-240
...지식인이다. 북한에서 조선민주당과 평양문협을 거점으로 한 민족문화건설이 좌절된 후 월남하여 대한영화사, 문총, 한국문화연구소 등을 기반으로 단정수립 후 격화된 남한사회의 ‘내부 냉전’의 중심에서 반공분단국가 강화를 선도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도 월남지식인들이란 특수집단을 기반으로 문총북한지부 결성 및 기관지 주간문학예술발간, 중앙문화사 창설 등 문예조직과 미디어의공고한 연계를 토대로 한 전시 문화전을 주도했다. 조선민주당, 서북청년단, 반공통일연맹등 월남인반공단체들과의 공조에 힘입은 바 크다. 오영진은 한마디로 숨은 냉전문화기획자였던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은 세계냉전과의 접속을 통해 촉진/ 제약된다. 오영진은 가장앞서 세계자유문화회의, 유네스코 등 전후 문화냉전 전을 수행하고 있던 세계적 냉전문화기구들과의 협력채널을 개척하여 연대를 모색했다. 이 채널을 통해서 최신의 서구 냉전문화를 수용하여 특유의 냉전문화론을 정립하는 한편 이를 자신이 관장한 미디어를 거점으로효과적인 인정투쟁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문화 권력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또한 미공보원, 미극작가협회, 아시아재단 등 다양한 경로로 미국과 접속해 물적, 인적, 사상적 후원을 받게 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문화냉전 전이 가능했다. 이로 볼 때 오영진은 한국의 냉전문화연구의 유효적절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오영진의 냉전문화기획이 가장 돋보인 것은 전향공간에서 그가 기획․총괄한 한국문화연구소 주최의 종합예술제 개최이다. 이 종합예술제는 문학예술계, 지식인사회 전체를 전향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문화지식인들의 자진 전향을 독려․강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리적, 사상적 남북적대를 확대재생산하는 동시에 지배체제의 우월성을 배타적으로 승인․ 공고화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분산적으로 진행되던 문화적 내부냉전을 공세적으로 확산시켜 내부평정작업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문화적 헤게모니투쟁의 역동적인 장으로 기능했던 전향공간의 정치적 논리를 기회로 포착해 월남지식인이란 불리한 신원을 역전시키며 문화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는 전향공간에서 자기신원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투사된 텍스트이자내부냉전에서 승리한 친일문화인들이 냉전진영론에 입각해 한국문화계를 장악하고 구국또는 애국의 이름으로 문화냉전을 주도하는 주체로 재탄생하는 극적 전환을 암시․정당화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열전의 와중에서 전개된 오영진의 문화냉전 전은 조직, 미디어의물적 토대에다가 국방부 정훈국, 미공보원, 아시아재단 등의 후원과 원조까지 받음으로써더욱 공세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특히 아시아재단과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오영진을 정점으로 한 월남예술인 집단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문화제도권으로 안정적인 진입이 가능했고 대공 사상(심리)전, 문화전의 전초가 될 수 있었다. 오영진의 문화냉전 전의 예술적 전략과 논리는 ‘기록주의’이다. 기록주의는 민족현실에 대한 처절한 위기의식의 산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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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진의 삶과 예술은 냉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미소분할 점령 하 남북한모두에서 민족국가(문화)건설에 실천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경계를 넘나든국제적 냉전경험을 바탕으로 문화냉전 전을 수행한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북한에서 조선민주당과 평양문협을 거점으로 한 민족문화건설이 좌절된 후 월남하여 대한영화사, 문총, 한국문화연구소 등을 기반으로 단정수립 후 격화된 남한사회의 ‘내부 냉전’의 중심에서 반공분단국가 강화를 선도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도 월남지식인들이란 특수집단을 기반으로 문총북한지부 결성 및 기관지 주간문학예술발간, 중앙문화사 창설 등 문예조직과 미디어의공고한 연계를 토대로 한 전시 문화전을 주도했다. 조선민주당, 서북청년단, 반공통일연맹등 월남인반공단체들과의 공조에 힘입은 바 크다. 오영진은 한마디로 숨은 냉전문화기획자였던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은 세계냉전과의 접속을 통해 촉진/ 제약된다. 오영진은 가장앞서 세계자유문화회의, 유네스코 등 전후 문화냉전 전을 수행하고 있던 세계적 냉전문화기구들과의 협력채널을 개척하여 연대를 모색했다. 이 채널을 통해서 최신의 서구 냉전문화를 수용하여 특유의 냉전문화론을 정립하는 한편 이를 자신이 관장한 미디어를 거점으로효과적인 인정투쟁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문화 권력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또한 미공보원, 미극작가협회, 아시아재단 등 다양한 경로로 미국과 접속해 물적, 인적, 사상적 후원을 받게 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문화냉전 전이 가능했다. 이로 볼 때 오영진은 한국의 냉전문화연구의 유효적절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오영진의 냉전문화기획이 가장 돋보인 것은 전향공간에서 그가 기획․총괄한 한국문화연구소 주최의 종합예술제 개최이다. 이 종합예술제는 문학예술계, 지식인사회 전체를 전향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문화지식인들의 자진 전향을 독려․강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리적, 사상적 남북적대를 확대재생산하는 동시에 지배체제의 우월성을 배타적으로 승인․ 공고화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분산적으로 진행되던 문화적 내부냉전을 공세적으로 확산시켜 내부평정작업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문화적 헤게모니투쟁의 역동적인 장으로 기능했던 전향공간의 정치적 논리를 기회로 포착해 월남지식인이란 불리한 신원을 역전시키며 문화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는 전향공간에서 자기신원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투사된 텍스트이자내부냉전에서 승리한 친일문화인들이 냉전진영론에 입각해 한국문화계를 장악하고 구국또는 애국의 이름으로 문화냉전을 주도하는 주체로 재탄생하는 극적 전환을 암시․정당화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열전의 와중에서 전개된 오영진의 문화냉전 전은 조직, 미디어의물적 토대에다가 국방부 정훈국, 미공보원, 아시아재단 등의 후원과 원조까지 받음으로써더욱 공세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특히 아시아재단과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오영진을 정점으로 한 월남예술인 집단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문화제도권으로 안정적인 진입이 가능했고 대공 사상(심리)전, 문화전의 전초가 될 수 있었다. 오영진의 문화냉전 전의 예술적 전략과 논리는 ‘기록주의’이다. 기록주의는 민족현실에 대한 처절한 위기의식의 산물로...
Oh Young Jin's life and art are undivided from the cold war. He practically participated in South and North Korea's nation building, each were under US and Soviet Union military government. He was also a typical intellectual who performed cultural cold wars with his borderless, international cold war experience. He led to entrench anticommunism( and the divided country, the result of that) in the center of South Korea's internal cold war that had been intensified after the establishment of separate government. During the Korean war period, he also led cultural wars by the stable connection between the media and the literature organizations of which the group of the defector intellectuals to south Korea. In a word, Oh Young Jin was a hidden cultural cold war planner. The process of that was promoted/limited by the access to the worldwide cold war. The cultural cold war planning by Oh Young Jin reached its peak at his planning of Composite Art Festival held by Korean Culture Institute. This Composite Art Festival bringing literature artists, intellectuals to the center of the conversion, encouraged and forced self conversions of them. So that it spread and reproduced geometric and ideologic hostility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and served to recognize exclusively the superiority of South Korean ruling system at the same time. Living Lee Jung Sang his excellency is the text for the strong purpose of proving Oh Young Jin himself in conversion situation, as it implies and justifies the moment pro-Japanese winning the internal cold war was reborn who dominated south Korean cultural fields by logic of ideological blocs and led cultural cold wars in the name of patriotism. Oh Young Jin's cultural cold wars during the hot war could be pushed forward with material foundations of the institute and media, in addition to the aid from AFIED(Armed Forces Information and Education Division) of Korea defense ministry, the US information service, and Asia foundation. The group of defector intellectuals to south Korea was able to join stably in Korean nation and orthodox culture by the strong bond with Asia foundation especially, so that it made an outpost for ideological( psychological) and cultural wars to communism. The artistic strategy and logic of Oh Young Jin is 'record priority principle.' The emphasis on record was a effective method for urgent anti-communism struggle, as a result of ambition to seize the initiative in cultural cold wars. It was also a method of an access to western cold war art that the 'record priority principle' of Korean national reality which was focussed on globally. North Korea under Soviet Union military government is the strategic text on record priority principle.
고원(高源)과 냉전 - 1970년대 후진국 지식인의 미주 문학을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문학연구학회 현대문학의 연구 Vol.86 2025.07 pp.89-127
...한국전쟁 중에 시간표 없는 정거장(장호·이민영·고원, 협동문화사, 1952)의 합동 시집을 발간한 후 2000년대까지 13권의 시집을 상찬할 정도로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전후 시인이면서 동시에 국내외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특이한 사례로 평가된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승화된 그의 시적 응전이야말로 특징적이다. 고원은 미주한인문인협회 활동 및 시전문 매체의 발간을 주도하며 디아스포라적 삶을 보여준다. 이는 미주 한인문학의 범례에 해당하면서 또 다른 한편 현실성과 정치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고원은 파편화된 시간과 모순된 존재를 형상화하며 전후시문학의 위상을 보여주지만, 그의 독특한 시 세계가 가장 뚜렷하게 표출된 것은 다름 아닌 미주 문학에서였다. 초창기 고원의 미주 문학은 한국(문학)과의 동시성 및 동일성을 추구하며 급진적인 정치와 창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 논문은 고원에 주목해 그의 한국전쟁 체험 양상을 ‘난민’(refugee: 포로수용소) 정체성으로 구분한 후, 그와 관련된 시와 자전적 기록들을 냉전기 후진국 지식인의 해외 문화교류 활동 및 민주화운동과 중첩시켜 상론하고, 더 중요하게는 뉴욕 신문사의 주필로 활동하며 미주 한인 지식인의 공론장에서 생산된 미주 시집을 살핀 것이다. 이른바 재미문학 1세대의 문학은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 즉 1970년대 이후 나타나 다양하게 분기(分岐)하는 과정에서 주목된다. 고원의 경우 한국 정치사의 격동으로 인해 현실비판론에 부합하는 자기 문학적 쇄신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미국에서 처음 출간한 『미루나무』(1976)와 『북소리에 타는 별』(1979)은 민주주의-인권 이념을 전유함으로써 비판적 해외 지식인의 담론적 거점에 포함된 문학이다. 특히 ‘김지하 구명운동’은 한국전쟁기의 『시간표 없는 정거장』, 4월 혁명기의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와 기행문학 등 체험 위주의 문학 양식으로 수렴되는 활동이었다. ‘김지하’란 적어도 ‘포로’의 원체험을 지닌 고원에게는 냉전체제를 내파(內波)하는 ‘불온한 지식인’의 대표적 사례였을지 모른다. 그는 미주 한인 민주화운동을 매개로 자기 체험의 문학적 성찰과 극복의 서사를 만들고 여기에 역사적 총체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이 글은 ‘재미문학 1세대 고원’이 탄생하는 한국문학의 복잡성을 냉전의 맥락에서 검토하여 고원 연구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한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고원은 한국전쟁 중에 시간표 없는 정거장(장호·이민영·고원, 협동문화사, 1952)의 합동 시집을 발간한 후 2000년대까지 13권의 시집을 상찬할 정도로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전후 시인이면서 동시에 국내외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특이한 사례로 평가된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승화된 그의 시적 응전이야말로 특징적이다. 고원은 미주한인문인협회 활동 및 시전문 매체의 발간을 주도하며 디아스포라적 삶을 보여준다. 이는 미주 한인문학의 범례에 해당하면서 또 다른 한편 현실성과 정치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고원은 파편화된 시간과 모순된 존재를 형상화하며 전후시문학의 위상을 보여주지만, 그의 독특한 시 세계가 가장 뚜렷하게 표출된 것은 다름 아닌 미주 문학에서였다. 초창기 고원의 미주 문학은 한국(문학)과의 동시성 및 동일성을 추구하며 급진적인 정치와 창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 논문은 고원에 주목해 그의 한국전쟁 체험 양상을 ‘난민’(refugee: 포로수용소) 정체성으로 구분한 후, 그와 관련된 시와 자전적 기록들을 냉전기 후진국 지식인의 해외 문화교류 활동 및 민주화운동과 중첩시켜 상론하고, 더 중요하게는 뉴욕 신문사의 주필로 활동하며 미주 한인 지식인의 공론장에서 생산된 미주 시집을 살핀 것이다. 이른바 재미문학 1세대의 문학은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 즉 1970년대 이후 나타나 다양하게 분기(分岐)하는 과정에서 주목된다. 고원의 경우 한국 정치사의 격동으로 인해 현실비판론에 부합하는 자기 문학적 쇄신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미국에서 처음 출간한 『미루나무』(1976)와 『북소리에 타는 별』(1979)은 민주주의-인권 이념을 전유함으로써 비판적 해외 지식인의 담론적 거점에 포함된 문학이다. 특히 ‘김지하 구명운동’은 한국전쟁기의 『시간표 없는 정거장』, 4월 혁명기의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와 기행문학 등 체험 위주의 문학 양식으로 수렴되는 활동이었다. ‘김지하’란 적어도 ‘포로’의 원체험을 지닌 고원에게는 냉전체제를 내파(內波)하는 ‘불온한 지식인’의 대표적 사례였을지 모른다. 그는 미주 한인 민주화운동을 매개로 자기 체험의 문학적 성찰과 극복의 서사를 만들고 여기에 역사적 총체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이 글은 ‘재미문학 1세대 고원’이 탄생하는 한국문학의 복잡성을 냉전의 맥락에서 검토하여 고원 연구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한다.
This article is an empirical analysis of the ideological history of Ko Won’s first collection of personal poems published in the United States. In other words, what has been overlooked in previous studies of Ko Won is the activities of the Korean American democratic movement abroad in the 1970s. In the early years, Ko Won’s literature in the Americas pursued radical politics and creative activities while seeking synchronicity and identification with Korean literature. In accordance with the above, this paper will focus on Ko Won, categorize his Korean War experience as a ‘refugee’ identity, and discuss his poetry and autobiographical writings by overlapping them with the overseas cultural exchange activities and democratization movements of intellectuals in post-Cold War countries, and more importantly, examine the American poetry collections produced by Korean intellectuals in the United States while working as a main writer for a New York newspaper.
문명담론과 독립협회의 정치체제, 그리고 러젠드르의 전제론
[NRF 연계] 고려사학회 韓國史學報 Vol.66 2017.02 pp.199-227
...한국의 근대 전환기는 전통과 외래문명이 충돌하고 지식과 문화를 상호 전파하는 접촉의 시대였다. 문명개화론의 세례를 받은 독립협회 지식인들은 이른바 문명국의 정치체제를 기획·구축하기 위해 서양의 정치체제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 작업은 ‘입헌’과 ‘민권’에 강조점이 두어졌다. 본 연구에서는 ‘문명담론’과 ‘절대군주론’이라는 키워드로 1898년도 독립협회운동과 ‘제국의 개혁’에 대해 살펴보았다. 필자는 ‘문명담론’이라는 시각으로 120여년 독립협회의 정치담론과 입헌정체, 그리고 그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절대군주제론을 분석하였다. 독립협회 지식인들은 서양인들이 지적한 조선정치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공감하였고, 그들과 동일한 문명담론에 의거하여 정치현실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서양인들이 조선을 표상하는 다양한 언표들, ‘무능과 부패의 정부’, ‘전제왕권’, ‘수탈을 일삼는 지배층’, ‘절대 빈곤에 처해 있는 백성들’ 등이 그대로 개화파지식인들에게 전이되어 재생산되었다. 이제 조선을 구하는 길은 ‘입헌’과 ‘민권’으로 정리되었다. 서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1898년도 ‘제국의 개혁’은 바로 이 두 가지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독립협회와 군주권을 옹호하고자 한 집권층 간의 대결이었다. 물론 양자 모두 ‘부국강병한 독립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체제와 담론, 실현 주체와 역량, 속도에서 차이가 있었다. 고종의 궁내부고문 러젠드르(C.R. LeGendre)는 과거 일본에서 체험했던 자유민권운동의 현실과 파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윤치호 등 독립협회 회원들을 급진적으로 나가지 못하게 설득하거나 ‘자문기구’로서의 중추원 개편안 등을 만들어 타협을 유도하였다. 또한 서구 절대군주제의 장점 등을 논리정연에게 주장하여 고종의 황제권을 수호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1898년도 독립협회와 정부 간의 대결은 ‘상원’ 대 ‘자문기구’로 정리할 수 있으며, 협상이 실패하고, 군주권이 훼손당할 처지에 놓이자 고종은 무력 탄압이라는 강수를 두었다. 고종이 입헌과 민권을 주장하는 독립협회를 탄압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군주제가 ‘야만’과 ‘후진’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개화와 발전을 추동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정치체제이자 우리 정치문화에 적합한 것, 민의 재산과 자유가 더 잘 보장된다는 것이라는 논리를 러젠드르가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1898년 ‘제국의 개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후 중추원은 황제와 의정부의 지휘명령을 받는 자문기구로 격하되었다. 정부 측의 제안인 ‘자문기구’안이 결국 승리한 것이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국의 근대 전환기는 전통과 외래문명이 충돌하고 지식과 문화를 상호 전파하는 접촉의 시대였다. 문명개화론의 세례를 받은 독립협회 지식인들은 이른바 문명국의 정치체제를 기획·구축하기 위해 서양의 정치체제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 작업은 ‘입헌’과 ‘민권’에 강조점이 두어졌다. 본 연구에서는 ‘문명담론’과 ‘절대군주론’이라는 키워드로 1898년도 독립협회운동과 ‘제국의 개혁’에 대해 살펴보았다. 필자는 ‘문명담론’이라는 시각으로 120여년 독립협회의 정치담론과 입헌정체, 그리고 그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절대군주제론을 분석하였다. 독립협회 지식인들은 서양인들이 지적한 조선정치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공감하였고, 그들과 동일한 문명담론에 의거하여 정치현실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서양인들이 조선을 표상하는 다양한 언표들, ‘무능과 부패의 정부’, ‘전제왕권’, ‘수탈을 일삼는 지배층’, ‘절대 빈곤에 처해 있는 백성들’ 등이 그대로 개화파지식인들에게 전이되어 재생산되었다. 이제 조선을 구하는 길은 ‘입헌’과 ‘민권’으로 정리되었다. 서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1898년도 ‘제국의 개혁’은 바로 이 두 가지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독립협회와 군주권을 옹호하고자 한 집권층 간의 대결이었다. 물론 양자 모두 ‘부국강병한 독립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체제와 담론, 실현 주체와 역량, 속도에서 차이가 있었다. 고종의 궁내부고문 러젠드르(C.R. LeGendre)는 과거 일본에서 체험했던 자유민권운동의 현실과 파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윤치호 등 독립협회 회원들을 급진적으로 나가지 못하게 설득하거나 ‘자문기구’로서의 중추원 개편안 등을 만들어 타협을 유도하였다. 또한 서구 절대군주제의 장점 등을 논리정연에게 주장하여 고종의 황제권을 수호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1898년도 독립협회와 정부 간의 대결은 ‘상원’ 대 ‘자문기구’로 정리할 수 있으며, 협상이 실패하고, 군주권이 훼손당할 처지에 놓이자 고종은 무력 탄압이라는 강수를 두었다. 고종이 입헌과 민권을 주장하는 독립협회를 탄압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군주제가 ‘야만’과 ‘후진’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개화와 발전을 추동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정치체제이자 우리 정치문화에 적합한 것, 민의 재산과 자유가 더 잘 보장된다는 것이라는 논리를 러젠드르가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1898년 ‘제국의 개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후 중추원은 황제와 의정부의 지휘명령을 받는 자문기구로 격하되었다. 정부 측의 제안인 ‘자문기구’안이 결국 승리한 것이었다.
[NRF 연계] 한국국어교육학회 새국어교육 Vol.82 2009.08 pp.689-720
...지식인들은 사회와 현실 문제를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는 서구 사실주의극을 공연하여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특히 식민지 사회의 모순과 낙후된 현실을 뚜렷이 자각시키고, 그들의 의식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러시아 사실주의극을 주요 공연레퍼토리로 선택했다. 사실 3·1운동 직후라는 시대공간에 공연된 러시아극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러시아극은 우리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고 삶의 상처를 치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근대극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3·1운동 이후 1920년대 무대에 공연된 러시아극을 살펴보고, 민족계몽운동과 관련하여 나타난 특성과 연극사적 의미를 밝혀보고자 했다. 그 외에도 본 연구에서는 그동안 기존 연구자들이 러시아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당시 공연을 잘못 해석하고 그 가치를 폄하했던 시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자 했다. 3·1운동 직후 1920년대에 공연된 러시아작품들은 체호프의 <곰>, 똘스또이의 《부활》과 《산송장》, 안드레예프의 《뺨맞는 그 자식》등이었으며, 토월회와 종합예술협회가 이들 작품들을 한국 무대에 소개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 1920년대 신극단체들은 무엇보다도 당시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내용과 스타일로 공연 레퍼토리를 선택하고자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공연한 러시아극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폭로하거나 인간 내면의 나약함과 인간 상호 불이해 등 인간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따라서 관객들은 러시아극을 통해서 식민지 현실의 모순과 인간에 대해 비판적인 자각을 할 수 있었다. 또한 1920년대 공연된 러시아극은 당시 관객들의 의식 수준을 고려하여 ‘대중성’을 통해 관객과 친밀하게 소통하고자 노력한 무대였다. 그리고 기존 신파극과는 완전히 차별된 사실주의 무대와 연기로 관객들에게 예술 미학을 전달한 공연들이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전국에서 민족자각운동이 전개되면서, 1921년부터 일본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문화예술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연극이 대중계몽에 효과적이라는 인식으로 연극을 통해 민족계몽운동을 펼친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사회와 현실 문제를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는 서구 사실주의극을 공연하여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특히 식민지 사회의 모순과 낙후된 현실을 뚜렷이 자각시키고, 그들의 의식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러시아 사실주의극을 주요 공연레퍼토리로 선택했다. 사실 3·1운동 직후라는 시대공간에 공연된 러시아극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러시아극은 우리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고 삶의 상처를 치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근대극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3·1운동 이후 1920년대 무대에 공연된 러시아극을 살펴보고, 민족계몽운동과 관련하여 나타난 특성과 연극사적 의미를 밝혀보고자 했다. 그 외에도 본 연구에서는 그동안 기존 연구자들이 러시아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당시 공연을 잘못 해석하고 그 가치를 폄하했던 시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자 했다. 3·1운동 직후 1920년대에 공연된 러시아작품들은 체호프의 <곰>, 똘스또이의 《부활》과 《산송장》, 안드레예프의 《뺨맞는 그 자식》등이었으며, 토월회와 종합예술협회가 이들 작품들을 한국 무대에 소개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 1920년대 신극단체들은 무엇보다도 당시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내용과 스타일로 공연 레퍼토리를 선택하고자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공연한 러시아극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폭로하거나 인간 내면의 나약함과 인간 상호 불이해 등 인간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따라서 관객들은 러시아극을 통해서 식민지 현실의 모순과 인간에 대해 비판적인 자각을 할 수 있었다. 또한 1920년대 공연된 러시아극은 당시 관객들의 의식 수준을 고려하여 ‘대중성’을 통해 관객과 친밀하게 소통하고자 노력한 무대였다. 그리고 기존 신파극과는 완전히 차별된 사실주의 무대와 연기로 관객들에게 예술 미학을 전달한 공연들이었다.
[NRF 연계]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인간연구 Vol.38 2019.01 pp.7-44
...한국에서 발간된 신문, 학회지 등의 자료에서 ‘자유’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고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이 시기는 독립협회의 지적 유산이 잔존한 가운데, 막강한 황제권과 외세의 압박에 맞서 변용의 길을 걸어간 때이기도 했다. 이 글은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쓰여졌다. 첫째, 개념사적 방법론을 차용하였다. 즉, 단어, 이념, 사상이 아니라 개념으로서 ‘자유’를 본 것인데, 이는 1차적으로 그 말이 사용되는 맥락을 심도있게 살펴본다는 뜻이다. ‘자유’는 개념사 연구 대상으로도 적절한데, 번역어이면서 서구나 동양 사회가 원래 가지고 있던 다의성 등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둘째, 이 시기 계몽사상과 계몽운동에 관해 새로운 인식 및 내러티브를 보여준 연구들에 기반하였다. ‘근대계몽’과 ‘국수론’의 이질성을 무시하고 ‘근대민족주의의 성립’이라는 당위론적 시각에서 접근하던 연구사들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래서 민권 운동을 주도하던 일진회의 ‘자유’ 용법을 함께 검토하였다. 당대 언론에서 강조한 자유는 대체로 소극적 자유, 약자의 자유, 집단의 자유였다. 또한 ‘독립’과 ‘평등’이라는 단어를 연계시켰는데, 결국 ‘정의’ 곧 ‘올바름’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다. 애초 정부, 관리, 유세자들에 맞서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민들의 소극적 자유였다. 사회의 발달에 따라 이는 점차 적극적·개인적 자유로 변모되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외세가 등장하고 친일 세력 역시 문명과 자유를 내세우는 상황에서, 한국의 계몽지식인들은 약자인 집단, 민족, 국민의 자유에 주목하게 되었다. 즉, 1900년대 한국에서는 집단으로서의 약자를 보호하는 자유가 ‘올바르다’는 담론이 여론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강자의 자유가 결과적 정당성을 얻게 되는 역사적 경험도 하게 된다. 이후로도 ‘올바른 자유에 대한 이상’과 ‘강자의 자유에 대한 선망’ 사이의 부조리한 동거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글은 1900년대 한국에서 발간된 신문, 학회지 등의 자료에서 ‘자유’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고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이 시기는 독립협회의 지적 유산이 잔존한 가운데, 막강한 황제권과 외세의 압박에 맞서 변용의 길을 걸어간 때이기도 했다. 이 글은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쓰여졌다. 첫째, 개념사적 방법론을 차용하였다. 즉, 단어, 이념, 사상이 아니라 개념으로서 ‘자유’를 본 것인데, 이는 1차적으로 그 말이 사용되는 맥락을 심도있게 살펴본다는 뜻이다. ‘자유’는 개념사 연구 대상으로도 적절한데, 번역어이면서 서구나 동양 사회가 원래 가지고 있던 다의성 등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둘째, 이 시기 계몽사상과 계몽운동에 관해 새로운 인식 및 내러티브를 보여준 연구들에 기반하였다. ‘근대계몽’과 ‘국수론’의 이질성을 무시하고 ‘근대민족주의의 성립’이라는 당위론적 시각에서 접근하던 연구사들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래서 민권 운동을 주도하던 일진회의 ‘자유’ 용법을 함께 검토하였다. 당대 언론에서 강조한 자유는 대체로 소극적 자유, 약자의 자유, 집단의 자유였다. 또한 ‘독립’과 ‘평등’이라는 단어를 연계시켰는데, 결국 ‘정의’ 곧 ‘올바름’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이다. 애초 정부, 관리, 유세자들에 맞서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민들의 소극적 자유였다. 사회의 발달에 따라 이는 점차 적극적·개인적 자유로 변모되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외세가 등장하고 친일 세력 역시 문명과 자유를 내세우는 상황에서, 한국의 계몽지식인들은 약자인 집단, 민족, 국민의 자유에 주목하게 되었다. 즉, 1900년대 한국에서는 집단으로서의 약자를 보호하는 자유가 ‘올바르다’는 담론이 여론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강자의 자유가 결과적 정당성을 얻게 되는 역사적 경험도 하게 된다. 이후로도 ‘올바른 자유에 대한 이상’과 ‘강자의 자유에 대한 선망’ 사이의 부조리한 동거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the concept of “liberty” was understood and used in newspapers and journals that were published in Korea during the 1900s. This period was also a time period during which Koreans walked a path of transformation against the pressures of a powerful emperor and foreign powers while the intellectual inheritance of the independent association remained. This article is based on two premises. First, the author borrowed from conceptual historical methodology. In other words, the author did not view “liberty” as a word, ideology, or idea, but rather as a concept, which involves looking in-depth at the context in which the word was used. The study of “liberty” is also appropriate as a subject of conceptual research, especially considering the ambiguity of the original languages of Western and Asian societies. Second, this article was based on the findings of previous studies that reveal a new awareness and narrative regarding the Enlightenment and Enlightenment thought. The author of this article attempted to overcome the research that has approached this subject from the viewpoint of “the establishment of modern nationalism.” As a result, the author examined the use of the Ilchinhoe’s sense of “liberty,” which led to the civilrights movement. The sense of “liberty” that was emphasized by the Korean media was largely passive, weak, and group-focused. It also linked the words “independence” and “equality,” and, in the end, the issues of “justice” and “rightness” became significant. The people’s passive liberty was necessary to protect their living property against the government, the administration, and the contestants. With the development of society, this interpretation of “liberty” was gradually transformed into a positive and personal sense of freedom. However, with the emergence of a strong foreign state and pro- Japanese forces, which also demonstrated civilization and liberty, the enlightened intellectuals of Korea became aware of the weakness of their group, nation, and people. In other words, the discourse of “rightness” to protect the weak as a group led Korean public opinion during the 1900s. On the other hand, however, there is also a historical experience in which the liberty of the strong will eventually gain legitimacy. Since then, it can be said that the absurd coexistence between an “ideal of liberty” and an “envy of stronger liberty” has continued.
[NRF 연계]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Vol.59 2023.02 pp.185-220
...협회에 참여했던 개혁지식인이 『독립신문』 기사를 통해 위생담론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한편 근대적 통치성 수립, 근대적 통치술로서 ‘위생’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19세기 말 서구의 위생 개념과 용어는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에 전파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 개화파에 의해 한국사회에도 수용되었다. 그들은 서구 국가들이 ‘부국강병’하고 ‘문명개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위생’이 중요한 통치술로 작동했음을 인식하고 한국에서 위생정책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개화파에 이어 ‘위생’이 근대적 통치성에서 중요한 기술이라는 점을 인지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과 토론회를 통해 위생담론을 전개하였다. 신문은 정부가 위생정책을 추진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회 전반에 ‘비위생’이 만연하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전했다. 이처럼 ‘비위생’이 여전히 만연한 이유는 무엇보다 일반 인민이 ‘위생’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그 중요성과 실행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위생’을 문명의 중요한 지표로 삼아 일반 인민에게 그 당위성을 설득하고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제시했다. 또 『독립신문』은 일반 인민을 대상으로 ‘위생’ 개념을 전파하고 실행하는 것을 설득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부의 위생정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즉 정부의 위생정책 중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거나 위생 관련 규칙 혹은 시행 방법을 먼저 정부에 제안하며 그 실시를 촉구하기도 했다. 정부의 위생정책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질환이나 전염병 등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였다. 인구의 감소는 인구관리, 즉 생명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생명권력’에 기반한 근대적 통치성이 성립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다. 요컨대 개항 직후 서구의 위생 개념을 수용하여 ‘위생론’을 펼쳤던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와 그들의 뒤를 잇는 문명개화파는 모두 근대국가를 수립하고 통치하는데 근간을 이루는 것이 인구의 건강과 번성, 즉 인구관리이며, 인구를 관리하기 위한 근대적 통치술의 핵심이 ‘위생’이라는 점을 파악했던 것이다. 특히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위생담론을 전개함으로써 정부와 함께 ‘생명권력’ 형태의 근대적 통치성 수립을 지향했던 것이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연구는 19세기 말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개혁지식인이 『독립신문』 기사를 통해 위생담론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한편 근대적 통치성 수립, 근대적 통치술로서 ‘위생’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19세기 말 서구의 위생 개념과 용어는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에 전파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 개화파에 의해 한국사회에도 수용되었다. 그들은 서구 국가들이 ‘부국강병’하고 ‘문명개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위생’이 중요한 통치술로 작동했음을 인식하고 한국에서 위생정책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개화파에 이어 ‘위생’이 근대적 통치성에서 중요한 기술이라는 점을 인지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과 토론회를 통해 위생담론을 전개하였다. 신문은 정부가 위생정책을 추진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사회 전반에 ‘비위생’이 만연하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전했다. 이처럼 ‘비위생’이 여전히 만연한 이유는 무엇보다 일반 인민이 ‘위생’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그 중요성과 실행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위생’을 문명의 중요한 지표로 삼아 일반 인민에게 그 당위성을 설득하고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제시했다. 또 『독립신문』은 일반 인민을 대상으로 ‘위생’ 개념을 전파하고 실행하는 것을 설득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부의 위생정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즉 정부의 위생정책 중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거나 위생 관련 규칙 혹은 시행 방법을 먼저 정부에 제안하며 그 실시를 촉구하기도 했다. 정부의 위생정책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질환이나 전염병 등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였다. 인구의 감소는 인구관리, 즉 생명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생명권력’에 기반한 근대적 통치성이 성립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다. 요컨대 개항 직후 서구의 위생 개념을 수용하여 ‘위생론’을 펼쳤던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와 그들의 뒤를 잇는 문명개화파는 모두 근대국가를 수립하고 통치하는데 근간을 이루는 것이 인구의 건강과 번성, 즉 인구관리이며, 인구를 관리하기 위한 근대적 통치술의 핵심이 ‘위생’이라는 점을 파악했던 것이다. 특히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위생담론을 전개함으로써 정부와 함께 ‘생명권력’ 형태의 근대적 통치성 수립을 지향했던 것이다.
This study revealed the fact that reformed intellectuals who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Club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developed a hygiene discourse through articles in The Independent, and analyzed it in terms of 'sanitation' as a modern governing technique and establishment of modern governance.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Western hygiene concepts and terms were spread to East Asia, including Japan and China, and were also accepted into Korean society by enlightenment party such as Kim Ok-gyun, Park Young-hyo, and Yu Kil-chun. Recognizing that ‘sanitation’ worked as a critical governing technique in the process of Western countries achieving ‘rich country and strong military’ and ‘civilization and enlightenment’, they insisted on implementing a sanitary policy in Korea. Following the Enlightenment Party, the Independence Club, recognizing that ‘sanitation’ was an important technology in modern governance, developed hygiene discourse through The Independent. The newspaper detailed the situation in which “unsanitary” was still prevalent throughout society despite the government’s sanitation policy. The reason why 'unsanitary' was still prevalent like this was that the ordinary people did not properly understand the concept of 'sanitation' and did not properly know its importance and how to practice it. Therefore, 'hygiene' was taken as an important indicator of civilization, convinced the people of its justification, and presented specific implementation methods. In addition, The Independent not only spread the concept of ‘sanitation’ to the public and persuaded them to practice it, but also directly and indirectly influenced the government’s sanitation policy. When the government's sanitation policy was not implemented properly, the biggest problem was the decrease in population due to diseases or epidemics. The decrease in population meant that modern governance based on population management, that is, the ‘biopower’ to maintain and protect life, could not be established. In short, the enlightenment party, such as Kim Ok-gyun and Park Young-hyo, who embraced the Western sanitary concept and developed the ‘hygiene’ discourse right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and the civilization and enlightenment group that followed them, recognized that that population management was the basis for establishing and governing a modern nation, and that the core of modern governance to manage the population is ‘hygiene’. In particular, the Independence Club pursued the establishment of modern governmentality in the form of 'biopower' with the government by developing hygiene discourse through the Independent.
1920-30년대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Folkehøjskole)의 한국·일본 유입과 분화․변용
[NRF 연계]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동아시아문화연구 Vol.75 2018.11 pp.47-77
...한국과 일본의 각기 다른 주체들이 대응하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포착한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시민 배움터인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는 1910년대 초 일본에서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로 번역되어 한국에 유입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농업으로 국가 재건에 성공한 덴마크는 농촌 빈곤문제를 모색하는 여러 국가들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일본의 경우 소작쟁의 및 산업화에 따른 도시․농촌 불균형의 해법을 찾고자 독일 협동조합법 등을 도입했고, 덴마크 협동조합 모델에도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폴케호이스콜레 개념이 소개되었다. 폴케호이스콜레는 도쿄제국대 농학부 연구자들에 의해 소개된 후 일본과 한국의 농촌 청년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설립․활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천황제 중심인 신도를 강조한 그룹에서 폴케호이스콜레를 농촌에 적용하기 위해 1925년 일본국민고등학교협회를 설립한 후 국민고등학교가 전국에 확산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는 ‘농민의 낙원’으로 덴마크가 알려지게 되었고, 지식인들은 1920년 전후로 식민지배 극복에 대한 방안으로 덴마크 농촌 재건 모델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의 기독교 활동가들은 1920년대 중반부터 덴마크 농촌을 직접 답사한 후 농촌에 일본 국민고등학교 모델과 유사한 덴마크식 농민수양소를 설립했다. 반면 한국과 일본의 무교회주의 그룹은 폴케호이스콜레의 기능보다 배움터의 설립 바탕이 된 그룬트비의 기독교 사상 및 자국어와 역사․문화를 강조한 이념에 주목했다. 본 논문은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의 유입과 분화․변용을 농민학교 모델과 소국․자립모델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서구의 새로운 개념이 유입된 20세기 초, 개념을 번역하는 일본과 이를 수용하는 한국은 국가라는 공간적 개념의 차이를 넘어서 조직별로 적용과 분화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드러난다. 이에 본 연구는 일본 농본주의와 한국 기독교 계열, 그리고 한․일 무교회주의 계열의 활동을 분석하여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 개념 유입과 분화를 살펴본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논문은 20세기 초 한․일에 소개된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Folkehøjskole)의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 분화와 변용을 살펴본다. 농촌문제 해결을 위해 두 국가에서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와 협동조합 개념을 도입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한국과 일본의 각기 다른 주체들이 대응하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포착한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시민 배움터인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는 1910년대 초 일본에서 국민고등학교(國民高等學校)로 번역되어 한국에 유입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농업으로 국가 재건에 성공한 덴마크는 농촌 빈곤문제를 모색하는 여러 국가들에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일본의 경우 소작쟁의 및 산업화에 따른 도시․농촌 불균형의 해법을 찾고자 독일 협동조합법 등을 도입했고, 덴마크 협동조합 모델에도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폴케호이스콜레 개념이 소개되었다. 폴케호이스콜레는 도쿄제국대 농학부 연구자들에 의해 소개된 후 일본과 한국의 농촌 청년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설립․활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천황제 중심인 신도를 강조한 그룹에서 폴케호이스콜레를 농촌에 적용하기 위해 1925년 일본국민고등학교협회를 설립한 후 국민고등학교가 전국에 확산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는 ‘농민의 낙원’으로 덴마크가 알려지게 되었고, 지식인들은 1920년 전후로 식민지배 극복에 대한 방안으로 덴마크 농촌 재건 모델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의 기독교 활동가들은 1920년대 중반부터 덴마크 농촌을 직접 답사한 후 농촌에 일본 국민고등학교 모델과 유사한 덴마크식 농민수양소를 설립했다. 반면 한국과 일본의 무교회주의 그룹은 폴케호이스콜레의 기능보다 배움터의 설립 바탕이 된 그룬트비의 기독교 사상 및 자국어와 역사․문화를 강조한 이념에 주목했다. 본 논문은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의 유입과 분화․변용을 농민학교 모델과 소국․자립모델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서구의 새로운 개념이 유입된 20세기 초, 개념을 번역하는 일본과 이를 수용하는 한국은 국가라는 공간적 개념의 차이를 넘어서 조직별로 적용과 분화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드러난다. 이에 본 연구는 일본 농본주의와 한국 기독교 계열, 그리고 한․일 무교회주의 계열의 활동을 분석하여 덴마크 폴케호이스콜레 개념 유입과 분화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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