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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는 ‘서해’에 대한 용어의 신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서해는 중국과 한국의 관계, 남조(북조)백제, 당청해진의 교역의 통로였 다. 따라서 서해는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의 해상활동의 영역이었다. 시기 별로 ‘서해’라는 명칭이 고대부터 현재까지 사용되는 역사적 용어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용 어이다. 한편 고대부터 대한제국까지 ‘황해(Yellow Sea)’라는 용어는 우리의 역사 에서 전혀 사용한 적이 없는 용어이다. 1748년경에 제작한 토마스 제프리스 의 아시아 고지도에서 ‘Yellow Sea’가 출현한다. 청 말에 서양의 지도와 지도 제작 기법이 전래되면서 ‘Yellow Sea’가 한자어 ‘黃海’로 번역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현재의 ‘황해(Yellow Sea)’는 서구인이 만들어낸 서해의 별칭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19세기 말 조선의 사료에 등장하는 ‘조선해’의 경 우도 1748년경에 제작한 토마스 제프리스의 아시아 고지도에 ‘Sea of Corea (조선해)’가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해양사 연구에 자주 등장하는 ‘환황해교역권’과 ‘환황해문 화’ 용어 대신에, 역사성을 반영해서 ‘환서해교역권’과 ‘환서해문화’라는 용어 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At present, we need to establish the terminology of ‘The West Sea’. Historically, The West Sea was a channel for China-Korea relations, Namjo-Baekje, Tang-Chunghaejin. Therefore, the West Sea was the area of maritime activities in Goguryeo, Baekje, Goryeo, and Chosun. The term ‘The West Sea’ is a historical term used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Therefore, even if we use it now, there is no problem at all. Meanwhile, from ancient times to the empire, the term ‘The Yellow Sea’ has never been used in our history. The ‘The Yellow Sea’ emerges from Thomas Jeffries’ Asian highlands around 1748. With the introduction of Western maps and mapping techniques in the Chung Dynasty, the ‘The Yellow Sea’ began to be translated into Chinese characters ‘The Yellow Sea’. Therefore, the present “Yellow Sea” is an alias of West Sea created by Westerners. Similarly, in the case of the ‘Joseon Sea’ appearing in the Joseon Dynasty at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Sea of Corea’ is emerging in Thomas Jeffries’ Asian Highlands around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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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는 한국과 중국에 모두 전승되고 있는 전통명절이다. 한국의 경우, 단 오는 고려시대 9대 명절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여겨져 한국의 대표적인 여름철 명절로 손꼽힌다. 중국의 단오절 은 선진(先秦) 시대에 기원하여 진한(秦漢) 시대 초보적으로 형성되었다. 정 확하게 언제 한국으로 전해 들어왔는지를 알 수 없으나 현존 자료를 살펴보 면 삼국시대까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한국의 단오문화는 중국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단오(端午)”라는 명칭과 명 절의 날짜가 중국과 같을 뿐만 아니라 많은 풍속들도 유사하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한국의 단오문화는 이미 현지화, 자국화되어 처음 중국부 터 유래했을 때의 형태와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한국 단오제와 중국 단오절 을 같은 것으로 보기가 어려워졌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 무형 유산으로 등록 된 한국 강릉단오제의 경우, 중국의 단오절을 모태로 삼고는 있지만 강릉의 민간신앙 등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현지화되면서 완전히 다른 명절이 되었다 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단오절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기원하여 한나라(漢) 때 “악월악 일(惡月惡日)” 설의 영향을 받아 악한 기운을 막고 건강을 기원하는 의례로 진행되었다. 후대에 영웅인물들의 전설과 결합하면서 단오절은 점점 영웅을 기념하고 그에게 제사지내는 날이 되었다. 각 지역에 전승되는 전설은 조금 씩 다르지만 “굴원(屈原)”을 기념하는 설이 가장 보편적이다. 단오 때 종자(粽子)를 먹는 풍속, 용선경도(龍船競渡) 풍속 등이 원래부터 있었는데, “굴 원” 전설이 생기고 나서 이 두 가지 풍속도 굴원과 연결되었다. 현재 중국에 는 지역별, 민족별로 단오절을 지내는 풍속이 조금씩 다르다. 또한 한국에 비 해 중국에서는 전통문화 복원의 중요성을 늦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일부 풍속 은 이미 실전(失傳)되기도 했다. 한국의 강릉단오제가 한국식 단오의 풍습을 잘 보존해 오는 경험을 참고하여 이를 거울로 삼아 중국도 자신의 전통문화 를 잘 보호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강릉단오제가 2005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 서 단오의 소유문제가 한중 양국에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단오 를 중국의 고유 전통명절로 주장하여 학계에 논란이 일어났고 그때부터 자 극받아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전통문화의 전승 등의 문제에 대해서 반성하고 예전에 비해 전통문화의 보호 및 발전에 힘을 집중하기 시작하였 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 및 인접 국가의 각종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도 활성 화되었다. 한국 강릉단오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조선의 문신 (文臣) 허균(許筠)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중기까지 강릉단오제는 신라의 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제사의식이었다. 중국 성황제 (城隍祭)의 영향을 받아 강릉단오제는 점점 읍치 성황제의 모습을 보이게 되 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강릉의 승려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성황신으로 모셔지고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되었다. 이때부터 대장군 김유신은 강릉의 산 신(山神)이 되었다. 강릉단오제는 현재까지 전승하는 과정에 여러가지 변화를 겪었으나 기본 적인 제의를 통해 복을 기원하고 나쁜 기운을 쫓아내는 벽사진경(僻邪進慶) 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현재까지 강릉단오제에서는 유교식 제의와 무속식 제의가 모두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강릉단오제는 전통축제이면서 전형적인 지역축제이다. 공동체의 문화유산이라서 지역사람들이 매우 적극적 으로 참여하고 있다. 강릉단오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지역의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하는 축제로서 알려져,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참여도 늘어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적극적인 참여가 있기 때문 에 강릉단오제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오히려 더욱 흥성하게 국제적인 축제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릉단오제가 전통의 모습을 잃지 않고 온전하게 그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인은 바로 단오제 행사 중의 “난장”이다. 난장은 축제의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를 모두 제공하여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역 의 관람객들을 끌어들인다. 정기적 상설시장보다 오히려 난장과 같은 부정기 시장이 단기간 내에 경제적 효과를 더 발휘하는 셈이다. 본고에서는 한국 강릉단오제와 중국 단오절의 기원 및 역사를 간략하게 살 펴보면서 강릉단오제가 가진 문화적인 가치가 전통명절의 현대화 발전에 미 치는 영향을 논의하였다. 한국 강릉단오제의 성공적 케이스 분석을 통해서 중국 단오절 전승에 있어서 얻을 수 있는 제언을 논의해 보았다.
근대 일본에 있어서의 저작권 문제의 행방 - 초기 저작권법제 안의 문학 -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東硏(동연) 4호 2018.11 pp.3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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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가 추진되는 일본에 있어서 문학이 법에 의하여 보 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869년 [출판조례]에 의해서였다. 단, 아직 저작 자의 권리보호에 대한 언급과 「판권」이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고 있었으나, 1875년의 [출판조례개정]에 「판권」이 등장하고 저작자를 보호하는 조항도 생겼다. 1887년에는 새로이 [각본악보조례]가 신설되었는데, 연극각본 및 악 보의 판권을 인정하고 흥행권을 보호하는 규정으로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1899년, 드디어 [저작권법]이 제정되어 판권이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새로 저 작권이라는 명칭을 만들었으며, 저작권은 자연히 발생하며 등록을 필요로 하 지 않게 되었다. 이렇듯 저작권법이 제정되고 또 확립되는 과정에 연극개량회와 문예가협 회의 존재가 있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연극개량회는 1886년에 발족되어 각 본과 연극과 극장의 개량을 추구하는 연극개량운동을 펼쳤다. 당시에는 「서 양숭배」라는 비난이 집중했으나, 소설과 시 등의 문학만을 문화의 중요한 구 성체로 여기던 당시의 사회에 연극도 문화의 중요한 구성체임을 제언했고, 배우나 흥행주에게 있던 판권과 흥행권을 작가에게 귀속시키도록 제안하였 다. 그리고 이것이 1887년의 [각본악보조례]의 신설에 영향을 준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한편, 1926년부터 1930년대 초반에 걸쳐 문예가협회에 의한 저작권법개정 운동이 펼쳐졌다. 희곡 「坂崎出羽守」소송사건에 촉발되어 저작자의 권리옹 호를 위해 행동에 나서게 된 문예가협회는 저작권법중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 하거나, 정부가 작성한 저작권법개정안 중 저작자인격권의 보호에 위해가 되 는 부분에 반대를 표명하여 그것이 1931년의 [저작권법중 개정법률]에 반영 되고 있다. 근대적인 질서가 확립되어 가던 시기, 일본의 문학은 스스로의 권리를 지 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던 것이다.
After the Meiji Restoration, in 1869, it became possible for the literary arts to be protected by the law in Japan, where modernization is promoted. However, there was still no mention of the author’s rights protection and the term “copyright”, and in 1875, the “copyright law” appeared in the revision of the “publication ordinance” and there was provision to protect the author. In 1887, the New Ordinance on Scriptwriting was newly established, which recognizes the rights of theatrical plays and musical scores, and protects and regulates the rights to perform. In 1899, the [Copyright Act] was finally enacted, abolishing the title of copyright(판권), creating a new copyright name, and copyright naturally occurred and no registration was required. I would like to suggest that there was a theater improvement society and a literary association in the process of making and establishing copyright law. The Theater Improvement Society was established in 1886 and carried out a theater improvement campaign to improve the screenplay, drama and theater. At the time, it was widely criticized as “worship of the West,” but suggested that drama is an important constituent of culture in the society at that time, when only literary works such as novels and poetry were regarded as important constituents of culture, and suggested that the copyright(판권) and entertainment rights of actors and actresses be attributed to the artist. It is also true that this influenced the creation of the 1887 Regulation on Scriptwriting. Meanwhile, from 1926 to the early 1930s, a movement to revise copyright law by the Literary Association was held. The Literary Association, which was inspired by the litigation of the drama “坂崎出羽守” and acted to defend the rights of the author, submitted to the Parliament amendments to the Copyright Act and opposed to the protection of the moral rights of the author and so it was reflected in the revised law of the Copyright Act of 1931. When modern order was established, Japanese Literary Arts acted actively to protect their rights themselves.
『진짜 일본은 요괴문화 속에 있다』(시간의 물레, 2018년 12월 출간 예정) 『일본 요괴문화 상품이 되다』(시간의 물레, 2018년 12월 출간 예정)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 東硏(동연) 4호 2018.11 pp.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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