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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쿠바 한인이민사

서성철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이베로아메리카硏究 제11권 2000.12 pp.137-159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382

극동연해주에서의 러시아한인 민족자치주 : 역사적 사실 및 전망

심헌용

한국시베리아학회 한국시베리아학보 창간호 1999.11 pp.65-105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383

러시아 사할린주 한인의 실태 연구

이정희

영남정치학회 영남정치학회보 제7호 1997.08 pp.257-314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384

Korean Immigrants’ Place in the Discourse of Mestizaje : A History of Race-Class Dynamics and Asian Immigration in Yucatán, Mexico KCI 등재

Hahkyung Kim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이베로아메리카硏究 제23권 3호 2012.12 pp.221-271

...한인 이민자들은 확실히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의 면에서 멕시코에서 자리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즉, 물리적 개인들로서는 불가피하게 멕시코 사회에 혼합되었을지 모르나 한인이라는 민족성에 있어서 는 메히까니다드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지 못한 것이다. 본 논문은 1904년에서 1909년 까지 의 한-일-멕 정부 서신들과 유까딴 반도 내 신문 기사들(의 부재)를 조사함으로써 멕시코 정 부와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한인 이민의 의의를 재해석한다.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노예 생활 로, 한인 이민사를 한국만의 역사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짙은 한국 아카데미아의 관점과는 달 리 한인 이민과 정착 과정을 멕시코 역사의 맥락에서 바라본다. 그런 과정에서 멕시코 정부 와 유까딴 농장 소유주들이 한인 이민자들에 관련하여 어떤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지 는지를 짚어내고, 어떻게 둘의 불균형이 멕시코가 한인 개개인의 신체를 수동적이게나마 생 물학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한인 정체성을 수동적으로 배제하는 지를 시사한다.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멕시코는 카스트 전쟁, 에네껜 산업의 팽창, 그리고 뽀르피리오 정권을 겪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에 더불어 위의 사건들이 당시의 이민 정책과 맞물려 동아시아 이민이 증가했고 이는 특별히 유까딴 주의 인종-계급 역학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민 초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인들은 멕 시코에서의 장기 거주를 통해 새로운 사회계급을 형성하였고 결과적으로 그들을 기존의 사 회역학관계에 위치하는 것에 어려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주목할 것은 멕시 코가 해외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동아 시아인들을 반겼을지 모르나 그들은 궁극적으로 메스띠사헤 담론에서 배제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위의 동아시아 이민자들 중에는 1905년 5월 15일에 유까딴 주 메리다에 도착하여 에네껜 농장에서 일하게 된 1,033명의 계약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멕시코의 모순적 태도와 더불어 당시 인종-계급 역학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경우로 주목할 만 하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한국 정부에 의해 잊힌, 시간이 갈수록 줄 어드는 경제적 가치와 적은 인구수로 인해 멕시코 정부의 무관심에 묻힌 한인 이민자들은 확실히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의 면에서 멕시코에서 자리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즉, 물리적 개인들로서는 불가피하게 멕시코 사회에 혼합되었을지 모르나 한인이라는 민족성에 있어서 는 메히까니다드를 구성하는 일부가 되지 못한 것이다. 본 논문은 1904년에서 1909년 까지 의 한-일-멕 정부 서신들과 유까딴 반도 내 신문 기사들(의 부재)를 조사함으로써 멕시코 정 부와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한인 이민의 의의를 재해석한다.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노예 생활 로, 한인 이민사를 한국만의 역사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짙은 한국 아카데미아의 관점과는 달 리 한인 이민과 정착 과정을 멕시코 역사의 맥락에서 바라본다. 그런 과정에서 멕시코 정부 와 유까딴 농장 소유주들이 한인 이민자들에 관련하여 어떤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지 는지를 짚어내고, 어떻게 둘의 불균형이 멕시코가 한인 개개인의 신체를 수동적이게나마 생 물학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한인 정체성을 수동적으로 배제하는 지를 시사한다.

At the turn of the nineteenth century, Mexico experienced a series of historic events: the Caste War, the rise of the henequen industry, and the Porfirian project of modernization. These events, combined with the immigration policies at the time, begot an increase of East Asian immigration, which complicated the race-class dynamics especially in the state of Yucatán. Despite the arrival of East Asian immigrants initially as laborers, the changes in their class identity in the process of permanent settlement resulted in the creation of new social categories and the difficulty in positioning them in the existent social dynamics. Amid such difficulty was the contradiction in the Mexican reception of foreign immigrants. Even though Mexico welcomed East Asians in the first place, they were later excluded from the discourse of mestizaje. The account of the first wave of Korean immigration to Mexico is most notable as a case that demonstrates the contradictory attitudes and the complexity of the race-class dynamics in Mexico at the time. Forgotten by Korea due to a political turmoil in East Asia and disregarded by Mexico due to their diminishing economic value and small size, the Korean immigrants were indeed without a place in terms of national and cultural identity in the host country. That is, while Koreans as physical individuals inevitably mixed into Mexican society both biologically and culturally, Korean as an ethnicity was unable to become a part of what constituted Mexicanidad. By looking into the (lack of) Mexican references to Korean immigrants in official government correspondences and Yucatecan print media from 1904 to 1909, this thesis reinterprets the significance of Korean immigration from a Mexican perspective. Unlike most analyses that tend to read Korean immigration only as an extension of Korean history, it contextualizes the event within Mexican history. It also identifies the economic and political interests of the Mexican government and Yucatecan plantation owners in relation to its Korean pop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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Особенности семейных отношений сахалинских корейцев KCI 등재후보

Пак Сын Ы

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한국시베리아연구 제16집 제2호 2012.11 pp.1-23

...한인의 가족관계 한국의 가족생활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한국가족의 특징을 이해한다면 가족생활이 좀 수월할 수 있으며,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족문화는 각 가정마다 차이가 있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한국가족문화는 유교문화권 국가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지만,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가족문화도 점차 변하고 있다. 가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 못지않게 가족 간의 화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족 내 위, 아래의 순위와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가정에서는 부모, 조부모, 친척 중 웃어른을 공경할 것을 가르친다. 부모-자녀 관계가 특별하다. 한국부모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편이다. 때로는 이러한 사랑이 지나쳐서 자녀를 의존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다. 효도란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노후에 편히 지내시도록 잘 모시는 것을 말한다. 부부간의 관계도 좋아야 하지만, 가족 내에서 자녀로서의 역할, 부모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을 중히 여긴다. 집안일이나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여자의 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남자들도 집안일이나 아이를 키우는 일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한국 남성들은 아내에게 애정표현을 잘 못하는 편이다. 특히 부모님이나 가족들 앞에서 아내에 대한 칭찬이나 애정표현은 못난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조심하는 편이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의 경우 우선적으로 문화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중요하다. 한국의 가족 생활 문화가 고국과 다른 부분이 있어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권한다. 서로의 가족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배우자나 배우자의 부모에게 가족 전통을 물어보기, 그 집안 문화를 존중하고 우선 따라 해보기, 가족생활에서 힘든 부분은 대화하여 해결하기,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기등이다.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 구성은 기본적으로 직계가족이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가족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기의 한인들은 가능하면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만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점차 러시아 사람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지금은 국제결혼이 일반화되어 있다. 사할린 한인들의 친족관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들의 친족관계가 양면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이다. 혼인을 통해 가족이 구성되고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가정은 성장한다. 가족은 경제 단위인 동시에 심리적 안정을 위한 안식처 역할을 한다. 모든 사회에서 가족이 존재하지만 그 의미나 성격은 사회마다 다르다. 또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가족의 의미는 재해석되고 재규정된다. 유교의 도덕규범 가운데 가장 중요한 2가지 덕목이 군주와 부모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가리킨다. 충과 효의 동일성은 가부장적 가족 내에서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태도와 집권적 정치체제 내에서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태도가 같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일상적인 가정생활 속에서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자세가 길러지면 자연히 관료가 되어서도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자세가 된다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적 가족이론 시각에서 보면 한국의 가족은 상당히 독특한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광복 이후에는 유교 전통과 급격히 단절되면서 전통 유교적 가족제도가 일시에 붕괴됐다. 1970년대 이후에는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 중심의 공동체적 가족문화가 도시 중심의 핵가족 문화로 급격하게 전환됐다. 현재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가족의 모습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기러기 아빠로 대변되는 이산가족, 세계 최고를 기록하는 이혼율,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등은 더 분화된 핵가족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처럼 빠르게 변하는 가족의 모습 속에 아직도 전통의 공동체적 모습이 잔존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빠른 근대화의 진척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가족주의가 아직도 그 위력을 잃지 않고 있다. 특히 직계가족 중심의 배타적 가족주의가 아직도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문화는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가 뒤섞여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21세기 한국가족의 형태는 근대 혼인가족을 벗어나 다양해지고 있다. 한부모가족, 재혼가족, 동거・사실혼가족, 동성커플, 다문화가족 등의 증가는 우리 사회에 이른바 "정상가족"의 범주 외에 다양한 가족이 존재함을 사회적으로 가시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가족 관련 법제는 '법률혼'과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을 기본 모델로 하고 있어, 정상가족의 범주 외에 존재하는 가족을 둘러싼 법적 문제를 다루는데 한계가 있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의 출현과 증가는 우리에게 기존의 가족의 개념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가족의 개념을 재구성할 것인지, 국가와 가족의 관계 맺기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에 대한 입체적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한인의 가족관계 한국의 가족생활은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한국가족의 특징을 이해한다면 가족생활이 좀 수월할 수 있으며,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가족문화는 각 가정마다 차이가 있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한국가족문화는 유교문화권 국가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지만,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가족문화도 점차 변하고 있다. 가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 못지않게 가족 간의 화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족 내 위, 아래의 순위와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가정에서는 부모, 조부모, 친척 중 웃어른을 공경할 것을 가르친다. 부모-자녀 관계가 특별하다. 한국부모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편이다. 때로는 이러한 사랑이 지나쳐서 자녀를 의존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한다. 효도란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노후에 편히 지내시도록 잘 모시는 것을 말한다. 부부간의 관계도 좋아야 하지만, 가족 내에서 자녀로서의 역할, 부모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을 중히 여긴다. 집안일이나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여자의 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남자들도 집안일이나 아이를 키우는 일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한국 남성들은 아내에게 애정표현을 잘 못하는 편이다. 특히 부모님이나 가족들 앞에서 아내에 대한 칭찬이나 애정표현은 못난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조심하는 편이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의 경우 우선적으로 문화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중요하다. 한국의 가족 생활 문화가 고국과 다른 부분이 있어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권한다. 서로의 가족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배우자나 배우자의 부모에게 가족 전통을 물어보기, 그 집안 문화를 존중하고 우선 따라 해보기, 가족생활에서 힘든 부분은 대화하여 해결하기,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기등이다.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 구성은 기본적으로 직계가족이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가족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기의 한인들은 가능하면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만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점차 러시아 사람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지금은 국제결혼이 일반화되어 있다. 사할린 한인들의 친족관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들의 친족관계가 양면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Если проследить жизненный путь корейца с самого рождения и до смерти, то можно заметить, что он живёт по законам конфуцианства. Взаимоотношения в семье, обществе и государстве основаны на конфуцианской идеологии. Основополагающей идеей в морально-этических воззрениях этого учения является мысль о трёх началах и пяти нормах человеческих отношений – самган орюн. Конфуцианство считало важным сосредоточить внимание на образовании и воспитании, соблюдении правил поведения и нравственности. Во все времена корейцы поклонялись чувству долга и самовоспитанию и самообразованию и при возникновении опасности для родины проявляли патриотизм и самопожертвование. В корейских семьях всегда существовали родительская любовь и почтительное отношение к родителям. Это давало возможность корейцу выбрать самый правильный путь в нравственном воспитании подрастающего поколения. Представляется, что самым главным критерием в этом деле является личный пример самих родителей. Из поколения в поколение передавалась одна из главных национальных черт корейского народа – стремление дать детям образование при любых условиях, где бы они ни находились. Большое внимание уделялось трудовому воспитанию, поддержанию строгой дисциплины. Первые корейцы попали на Северный Сахалин в годы, когда остров был каторгой См. Кузин А.Т. Переход корейцев в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е пределы россий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 Ю-Сахалинск, 2001. С. 49. Бок Зи Коу. Корейцы на Сахалине. – Ю-Сахалинск, 1993. С. 18. . Ежедневный труд их был борьбой за выживание. Корейские переселенцы были малограмотны, и им было особенно трудно на чужой земле. Дети наравне с взрослыми учились преодолевать трудности. На Карафуто Так называлась часть Сахалина южнее 50-ой параллели, отошедшая по Портсмутскому договору Японии после поражении России в русско-японской войне 1904-1905 гг. корейцы были насильно завезены в конце 30-х годов XX века преимущественно из южной части Кореи. Это были молодые крестьяне, у которых имелось начальное образование, да и то не у всех. У себя на родине они трудились на клочке земли от зари до зари, чтобы, вырастив скудный урожай, отдать большую долю японцу – хозяину земли. Образование для них было несбыточной мечтой. И их дети – сахалинские корейцы второго поколения с молоком матери впитали ту мораль, по которой жили их предки: трудолюбие, взаимовыручку и сыновнюю почтительность не только к своим родителям, но и ко всем старшим по возрасту. К сожалению, у нынешних детей – сахалинских корейцев третьего-четвертого поколений во многом тот корень, стержень, который передавался от предков к потомкам, начинает разрушаться. Не зная языка и культуру родителей, воспитываясь в совершенно другом культурном пространстве, становятся невосприимчивы к тем ценностям, которые проповедовали предки на исторической родине и на Сахалине. Но это не значит, что корейские дети на Сахалине совершенно лишены чувства сыновней почтительности хё. Несмотря на то, что не у кого стало учиться традиционным нормам поведения, они как бы бессознательно следуют тем принципам уважения к старшим людям, которые им передали предки вместе с кровью и генам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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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Mothers' Folk Theory about American Education KCI 등재후보

Min-Jung Lim

중앙대학교 한국교육문제연구소 한국교육문제연구 제30권 제2호 2012.06 pp.323-339

...한인 어머니들이 지닌 자녀의 미국교육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민속이론에 근거하여 살펴보았다. 어머니 두 명의 나래티브 자료가 3차에 걸친 현상학적 면담을 통해 수집되었다. 연구결과 어머니들은 성공을 위해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적 믿음에 부합한 견해를 나타내었고, 미국교육이 영어 숙달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여 자녀의 장래를 최적화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미국교육에서 자녀가 지닌 소수민으로서의 불이익을 인식하였으나, 자녀들의 영어 역량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전략적인 가정 부모참여 방안을 모색하였다. 연구결과를 토대로 소수민 가정의 부모참여에 관한 시사점을 논의하였다.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본 연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어머니들이 지닌 자녀의 미국교육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민속이론에 근거하여 살펴보았다. 어머니 두 명의 나래티브 자료가 3차에 걸친 현상학적 면담을 통해 수집되었다. 연구결과 어머니들은 성공을 위해 교육을 중시하는 문화적 믿음에 부합한 견해를 나타내었고, 미국교육이 영어 숙달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여 자녀의 장래를 최적화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미국교육에서 자녀가 지닌 소수민으로서의 불이익을 인식하였으나, 자녀들의 영어 역량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전략적인 가정 부모참여 방안을 모색하였다. 연구결과를 토대로 소수민 가정의 부모참여에 관한 시사점을 논의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intended to uncover a folk theory grounded in the perspectives and experiences of Korean mothers on their children’s American education. The narratives of two Korean mothers were collected through three-phased phenomenological interviews. The findings revealed that Korean mothers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education that resonated with their cultural belief in education leading to success. They viewed American education as a means to master the English language and thereby to optimize their children’s futures. While the mothers recognized the disadvantages inherent in their children’s minority status within the American educational system, their desire for English competency helped them seek out strategic involvement practices at home. Implications for minority parent involvement are discu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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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ining Youth Group Leaders in Korean American Immigrant Churches : Curriculum Issues

Park, Joung Sik

한국복음주의기독교교육학회 복음과 교육 제8집 2011.06 pp.15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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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光洲의 문학작품을 통해 본 海港都市 上海와 韓人社會 KCI 등재

최낙민

동북아시아문화학회 동북아 문화연구 제26집 2011.03 pp.18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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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aracteristics and Prospect of the Korean Community in Brazil in the Era of Neoliberalism KCI 등재후보

Choi, Keum-Joa

한국포르투갈브라질학회 포르투갈-브라질 연구 Vol.6 No.2 2009.12 pp.205-253

...한인의 수가 700만 명 이상이고, 그 중 1965년 시작된 미국이민자의 수가 진작 200만 명을 훌쩍 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 수가 늘지 않은 이유를 밝히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본 논문은 브라질이 시장을 개방한1990년을 전후로 나누어 한인사회를 분석한다: 첫 시기에서는 한국인들의 브라질 도착과 적응과정에 대해 다루면서, 왜 1960년대 한국인들의 농업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왜 도시로 이주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제품”을 시작하여 경제적 기반을 닦았는지를 다루며; 두 번째 시기에서는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하에서 재브라질 한인 커뮤니티의 정착과 브라질 사회로의 동화과정을 다룬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그 동안 재브라질 한국인들의 브라질 국내적 혹은 국제적 인구이동이 한국인들만의 현상이 아니라, 산업화와 도시화가 한창 일어나던 브라질의 1960년대 브라질인들의 이농현상과 한국인들이 도시로 이주한 것이며, 또한 ‘잃어버린 10년’ 이었던 1980년대 한국인들의 미국으로의 이주 역시 브라질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남미에서 북미로’의 이주물결과 일치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즉 이민이라고 하는 것이 지역간 혹은 국가간의 경제적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비록 재브라질 한인커뮤니티의 구성원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존재는 대한민국 해외 한인사의 중요한 장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브라질 사회가 닮고 싶어하는 “모범이민” 집단으로 꼽히는 성공케이스이기도 하며, 또한 양국간의 교역증진에도 결정적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963년 2월 12일 제1차 농업이민(17세대 92명과 11명의 전향군인들)이 브라질 산토스항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된, 한국인들의 대 브라질 이민은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이민이다. 하지만 재브라질 한국이민자의 수는 그 역사가 50년이 가까워 오는 데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5만 명 미만이다. 현재 재외한인의 수가 700만 명 이상이고, 그 중 1965년 시작된 미국이민자의 수가 진작 200만 명을 훌쩍 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 수가 늘지 않은 이유를 밝히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본 논문은 브라질이 시장을 개방한1990년을 전후로 나누어 한인사회를 분석한다: 첫 시기에서는 한국인들의 브라질 도착과 적응과정에 대해 다루면서, 왜 1960년대 한국인들의 농업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왜 도시로 이주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제품”을 시작하여 경제적 기반을 닦았는지를 다루며; 두 번째 시기에서는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하에서 재브라질 한인 커뮤니티의 정착과 브라질 사회로의 동화과정을 다룬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그 동안 재브라질 한국인들의 브라질 국내적 혹은 국제적 인구이동이 한국인들만의 현상이 아니라, 산업화와 도시화가 한창 일어나던 브라질의 1960년대 브라질인들의 이농현상과 한국인들이 도시로 이주한 것이며, 또한 ‘잃어버린 10년’ 이었던 1980년대 한국인들의 미국으로의 이주 역시 브라질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남미에서 북미로’의 이주물결과 일치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즉 이민이라고 하는 것이 지역간 혹은 국가간의 경제적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비록 재브라질 한인커뮤니티의 구성원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존재는 대한민국 해외 한인사의 중요한 장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브라질 사회가 닮고 싶어하는 “모범이민” 집단으로 꼽히는 성공케이스이기도 하며, 또한 양국간의 교역증진에도 결정적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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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の 『滿洲國』統治と 在滿韓人問題 : 『五族協和』と『內鮮一体』の相剋

田中隆一

만주학회 만주연구 제1집 2004.06 pp.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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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在蘇 韓人의 시문학과 정체성

이명재

한국시문학회 한국시문학 제14집 2004.05 pp.189-216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392

韓人의 사할린移住와 文化變容

崔吉城

동북아시아문화학회 동북아 문화연구 제1집 2001.10 pp.243-271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393

露領地域에 移住한 韓人들의 農業活動

李尙根

경희사학회 경희사학 제19집 1995.02 pp.23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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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國에서 北魏로 ―拓跋 統治者의 性格 變化와 漢人士族의 收用―

김성희

[NRF 연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 이화사학연구 Vol.41 2010.12 pp.243-285

...漢人士族) and contact with the midland culture changed the nature of their regime. Damudi's pursuit of Hebei(河北) began with a practical cause, which was to suppress the opposing power inside BeiWei Kingdom. He indeed used the outside force of Houyan(後燕) to solve the problems within BeiWei Kingdom and strengthen his own authority. Houyan was the ruler of the midland in name those days, but it had a deadly weakness, which was the controversy over succession to the throne among the monarchs of royal families that dominated the military forces. Damudi turned the situation in favor of his military strategy. Before going on a campaign to conquer Houyan, he overwhelmed many villages around Shanxi(山西) several times and secured the military personnel and horses for the upcoming war. He also included many Tuoba royal members(拓跋宗室) in the invasion of Hebei to solidify the connections. After the campaign, he conducted a series of service examination and granted awards whose service was deemed to be beneficial to his cause, thus eradicating those who were not favorable to him. Those military acts he took claimed more than the significance as a campaign whose nature as a nomad expedition was strong. He did not take an aggressive approach toward Houyan in the beginning. He first dominated Shanxi before advancing into Hebei in the form of alliance with xiyan(西燕). He refused to become a member of the Houyan-centric international community or part of the distant barracks of Houyan. He was able to take those actions because BeiWei Kingdom was relatively more stable than other regimes as far as the controversy over succession to the throne, which frequently happened in nomad kingdoms, was concerned. He was confident that his kingdom was more powerful including military preparations, and the midland situations in the late 4th century were much more unstable than the Daiguo Period including the Shiyiqian(什翼犍) Period. As a result, there was plenty of room for Damudi to intervene. There were relatively fewer external threats to Daiguo during the Shiyiqian Period when Qianzhao(前趙), Houzhao(後趙), Qianyan(前燕) and Qianqin(前秦) were confronting against one another. However, the Xiongnu(匈奴) Tiefubu(鐵弗部) was strong, and it was not easy to subjugate them. Shiyiqian too made use of external elements to gain power after returning from Houzhao. He rearranged the bureaucratic organizations following the example of Xijin(西晉) and recruited Chinese people in the process. He also formed Jinxi(近侍) groups with the children of tribal leaders and powerful clans, trying to resolve inside confrontations by maintaining the tribal system inside Daiguo. He especially maintained the marriage relationships with Qianyan and established friendship with Houzhao, which is probably because his power as a monarch was not strong enough to encompass the farms and pastures those days. Daiguo remained as one of the members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evolving around Jin(晉), going through Tuoba Liwei(力微), Yiyi(猗㐌) and Yilu(猗盧) Period. It was part of Jin's military alliance when the situations of Beibian(北邊) were unstable including Bingzhou(幷州) and Youzhou(幽州) as Liuyuan(劉淵) and Shilei(石勒) invaded the midland in late Xijin. Jin's installations were able to support the political authority of the Tuoba rulers. Having some land allocated to it based on Jin's installations, Daiguo expanded its power to Bingzhou and Jizhou(冀州) of Hebei and summoned the Chinese people living in Beibian. It was a good example in the opposition to Damudi's refusal of Hou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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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acing the conclusion, this section will investigate how Damudi(道武帝)'s identity as a monarch was different from the identities of the Tuoba rulers(拓跋統治者) during the Daiguo(代國) Period including Shiyiqian(什翼犍). The effort would provide circumstantial evidence about how the acceptance of Chinese noble families(漢人士族) and contact with the midland culture changed the nature of their regime. Damudi's pursuit of Hebei(河北) began with a practical cause, which was to suppress the opposing power inside BeiWei Kingdom. He indeed used the outside force of Houyan(後燕) to solve the problems within BeiWei Kingdom and strengthen his own authority. Houyan was the ruler of the midland in name those days, but it had a deadly weakness, which was the controversy over succession to the throne among the monarchs of royal families that dominated the military forces. Damudi turned the situation in favor of his military strategy. Before going on a campaign to conquer Houyan, he overwhelmed many villages around Shanxi(山西) several times and secured the military personnel and horses for the upcoming war. He also included many Tuoba royal members(拓跋宗室) in the invasion of Hebei to solidify the connections. After the campaign, he conducted a series of service examination and granted awards whose service was deemed to be beneficial to his cause, thus eradicating those who were not favorable to him. Those military acts he took claimed more than the significance as a campaign whose nature as a nomad expedition was strong. He did not take an aggressive approach toward Houyan in the beginning. He first dominated Shanxi before advancing into Hebei in the form of alliance with xiyan(西燕). He refused to become a member of the Houyan-centric international community or part of the distant barracks of Houyan. He was able to take those actions because BeiWei Kingdom was relatively more stable than other regimes as far as the controversy over succession to the throne, which frequently happened in nomad kingdoms, was concerned. He was confident that his kingdom was more powerful including military preparations, and the midland situations in the late 4th century were much more unstable than the Daiguo Period including the Shiyiqian(什翼犍) Period. As a result, there was plenty of room for Damudi to intervene. There were relatively fewer external threats to Daiguo during the Shiyiqian Period when Qianzhao(前趙), Houzhao(後趙), Qianyan(前燕) and Qianqin(前秦) were confronting against one another. However, the Xiongnu(匈奴) Tiefubu(鐵弗部) was strong, and it was not easy to subjugate them. Shiyiqian too made use of external elements to gain power after returning from Houzhao. He rearranged the bureaucratic organizations following the example of Xijin(西晉) and recruited Chinese people in the process. He also formed Jinxi(近侍) groups with the children of tribal leaders and powerful clans, trying to resolve inside confrontations by maintaining the tribal system inside Daiguo. He especially maintained the marriage relationships with Qianyan and established friendship with Houzhao, which is probably because his power as a monarch was not strong enough to encompass the farms and pastures those days. Daiguo remained as one of the members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evolving around Jin(晉), going through Tuoba Liwei(力微), Yiyi(猗㐌) and Yilu(猗盧) Period. It was part of Jin's military alliance when the situations of Beibian(北邊) were unstable including Bingzhou(幷州) and Youzhou(幽州) as Liuyuan(劉淵) and Shilei(石勒) invaded the midland in late Xijin. Jin's installations were able to support the political authority of the Tuoba rulers. Having some land allocated to it based on Jin's installations, Daiguo expanded its power to Bingzhou and Jizhou(冀州) of Hebei and summoned the Chinese people living in Beibian. It was a good example in the opposition to Damudi's refusal of Hou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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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魏平城時代 平城 거주 漢人의 다문화 공존 ― 漢人의 유목문화ㆍ西域文化 수용 양상을 중심으로 ―

최진열

[NRF 연계] 동양사학회 동양사학연구 Vol.170 2025.03 pp.4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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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人이 주체가 되는 중화민국에 직면하여 : 辛亥變局 하에서의 小數族群의 어려움과 선택

吳啟訥

[NRF 연계] 중국근현대사학회 중국근현대사연구 Vol.56 2012.12 pp.139-165

...漢人革命所建立的新國家取代,各非漢人族群面臨新的挑戰和棘手的選擇。位於中華帝國的同心圓式「藩屬-朝貢」體系的「外圍」與「內圈」之間,曾作為滿洲貴族集團統治漢人地區同盟的「內藩」與王朝南方丘陵地帶的非漢人社會,在這一刻之前,正同時處在(本身已中國王朝化的清朝在牡丹社事件與馬嘉理事件後所推動的)「邊疆化」的進程中。夾在剛剛將「驅除韃虜」的旗幟更換為「五族共和」招牌的新政府,與業已啟動殖民化進程的前「藩屬-朝貢」體系「外圍」之間,前清朝邊疆地區非漢人族群的內部浮現爭議。這些非漢人族群內部的一部份貴族和菁英,比較習慣於大清皇帝子民的身份,而貴族在不同方面,不同程度地漢化,中國除了以往令人嚮往的一面依然未完全消失,也出現革故鼎新的一面。其自我修復的能力亦在未定之際。況且,一如漢人,貴族對來自不同文化政治背景下的列強,同樣存在陌生感和隔膜,同樣有對傳統喪失的焦慮。因此,只要新的漢人國家不進一步採取清末針對邊疆的內地化措施,保留這些地區恢復傳統秩序的可能,則安全的選擇就是加入新國家。碰巧,新國家正好面臨嚴重的內部整合問題,有心但無力延續清末的政策,被迫回歸傳統的羈縻和間接統治政策。民初的妥協政策,是五族未完全離心的重要外在因素。非漢人族群內部的另一部份菁英則意識到,列強推行的殖民化政策重繪了亞洲的政治地圖,在中國王朝的「藩屬-朝貢」體系崩毀之際,非漢人族群更要面對建立在西歐現代政治原理與政治現實之上,並正在向歐洲以外急遽擴張的強權國家。這些強權既否定亞洲等地傳統政治秩序,也無意承認該秩序下(無論是在「外圍」,還是在「外圍」與核心之間)一切傳統政治-文化體的主體性,但卻很可能樂見這些政治-文化體借用西歐發明的民族國家和主權原則作為擺脫舊宗主的武器。因而,借用這件新武器,以及隨之附送的「現代化」禮物,不僅可以擺脫舊宗主,甚至可以對抗新的殖民者,真正尋求本族群的主體性。這種思維,使得邊疆民族內部的變革派,有相當一部份本能地蛻變為離心派、獨立派。以往研究中國民族史,都是從國家整合與國家族群政策的角度切入,忽略非漢人族群本身的感受與族群中心的歷史。本文有意從非漢人族群的角度切入,探討少數族裔群體在漢民族主體國家中的境遇,以及少數族裔與中華民族國家建構的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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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年前,多民族的清帝國被漢人革命所建立的新國家取代,各非漢人族群面臨新的挑戰和棘手的選擇。位於中華帝國的同心圓式「藩屬-朝貢」體系的「外圍」與「內圈」之間,曾作為滿洲貴族集團統治漢人地區同盟的「內藩」與王朝南方丘陵地帶的非漢人社會,在這一刻之前,正同時處在(本身已中國王朝化的清朝在牡丹社事件與馬嘉理事件後所推動的)「邊疆化」的進程中。夾在剛剛將「驅除韃虜」的旗幟更換為「五族共和」招牌的新政府,與業已啟動殖民化進程的前「藩屬-朝貢」體系「外圍」之間,前清朝邊疆地區非漢人族群的內部浮現爭議。這些非漢人族群內部的一部份貴族和菁英,比較習慣於大清皇帝子民的身份,而貴族在不同方面,不同程度地漢化,中國除了以往令人嚮往的一面依然未完全消失,也出現革故鼎新的一面。其自我修復的能力亦在未定之際。況且,一如漢人,貴族對來自不同文化政治背景下的列強,同樣存在陌生感和隔膜,同樣有對傳統喪失的焦慮。因此,只要新的漢人國家不進一步採取清末針對邊疆的內地化措施,保留這些地區恢復傳統秩序的可能,則安全的選擇就是加入新國家。碰巧,新國家正好面臨嚴重的內部整合問題,有心但無力延續清末的政策,被迫回歸傳統的羈縻和間接統治政策。民初的妥協政策,是五族未完全離心的重要外在因素。非漢人族群內部的另一部份菁英則意識到,列強推行的殖民化政策重繪了亞洲的政治地圖,在中國王朝的「藩屬-朝貢」體系崩毀之際,非漢人族群更要面對建立在西歐現代政治原理與政治現實之上,並正在向歐洲以外急遽擴張的強權國家。這些強權既否定亞洲等地傳統政治秩序,也無意承認該秩序下(無論是在「外圍」,還是在「外圍」與核心之間)一切傳統政治-文化體的主體性,但卻很可能樂見這些政治-文化體借用西歐發明的民族國家和主權原則作為擺脫舊宗主的武器。因而,借用這件新武器,以及隨之附送的「現代化」禮物,不僅可以擺脫舊宗主,甚至可以對抗新的殖民者,真正尋求本族群的主體性。這種思維,使得邊疆民族內部的變革派,有相當一部份本能地蛻變為離心派、獨立派。以往研究中國民族史,都是從國家整合與國家族群政策的角度切入,忽略非漢人族群本身的感受與族群中心的歷史。本文有意從非漢人族群的角度切入,探討少數族裔群體在漢民族主體國家中的境遇,以及少數族裔與中華民族國家建構的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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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漢人王朝 前涼(332∼376)의 정치국면과 그 변화― 張祚의 ‘僭號稱帝’ 전후 국내외 사정을 중심으로 ―

이춘호

[NRF 연계] 동양사학회 동양사학연구 Vol.141 2017.12 p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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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前凉(332-376)历史上,张祚的“僭号称帝”之事具有非常重要的意味,以此为界可分成前期和后期。与此同时,可发现此事使前凉走上衰落、灭亡之路。因而,笔者认为在探讨前凉的对外政治局面如何发展变化时,有必要认识“僭号称帝”之事。 据悉,张氏政权到张骏在位的332年时其政权性质发生了本质性的变化,不再追求晋朝所派生的“地区政权”,而开始转变为具有“自主”的独立王朝了。这种变化可穿透于当时汉人汜祎和宋辑的言论之中。比如,张骏在采用建兴十二年时,汜祎对此劝道:“案建兴之年,是少帝始起之号。帝以凶终,理应改易。朝廷越在江南,音问隔绝,宜因龙改号,以章休征。”从此之后,其政体应不是“张氏政权”,而是“前凉王朝”了。笔者认为关于前凉政治局面的变化,其前期应属于鼎盛时期,疆域最辽阔、文化最繁荣、言论最积极,然而也看到统治阶层腐朽、奢侈的一面。特别是,及至张重华末年,他以为连续击败后赵的入侵,而“颇怠政事”。这种政治环境直接给其庶兄张祚带来篡位的机会了。张祚拉拢张重华嬖臣赵长等人以及其母马氏,在整个篡位过程中,始终利用他们。尤其是,拉拢马氏具有何种意味?张祚要利用她的“王太后”之威,以宣布即他的皇帝位。张祚虽成功篡位,自称“凉帝”,但其统治时间不满二年。在这期间各种天灾、人灾频发,之所以如此,很可能关系到史家的“笔法”,即不积极对待其篡位之事,特意用灾难之事,以显示它得不到天、人的支持。张祚被杀,以宣告他统治的结束。而后张玄靚被张瓘等权臣推戴,以担任大都督、大将军、护羌校尉、凉州牧、西平公。然而,我们发现他因既幼冲又仁弱,始终受到权臣们的压制,前凉国权先后由张瓘、宋混、宋澄、张邕、张天锡来把持。最后的胜利者正是张天锡。张天锡既是张祚之弟,又是张玄靚之叔,已目睹张祚之篡位、权臣之掌权在政治上的“异常”。笔者认为这正是他掌握大权后而实行“友昵政治”的根本原因。他不相信将相大臣,不信赖张氏宗亲,只依靠身边的“小人”。“友昵政治”是指张天锡主要凭借个人感情,选用亲臣、小人,使他们参与政治的一种“政治变态”。当然其体现所带来的后果是可想而知的。在这种政治局面下,前凉在376年遭遇了前秦的猛攻。张天锡未能采取任何有效的防御举措,而前凉诸将节节败退,最终决定投降。如此,从301年张轨割据河西而奠定前凉王朝的基础以来,至376年张天锡失去国运,已经历了九代76年的时间。另外,前凉王朝的对外关系及其结构如何?这也是本研究的论述重点。我们发现前凉主要维持了与前赵等五胡王朝以及东晋,还有西域诸国间的关系。首先,在与五胡王朝间的关系中,前凉多次考虑北中国的局势变化,始终按照对方的权力大小进行了“和”或“战”的关系。张骏向前赵派遣王骘,或确认前赵趋于衰落后抛弃其册号,而恢复东晋官职,这些正显示出前凉对五胡王朝所进行的外交关系。除此之外,我们在前秦派遣阎负、梁殊于前凉,和权臣张瓘讨论两国关系时,可看到前凉的外交方针。对前凉而言,“和”关系意味着向该胡人王朝进行“事大外交”,而“战”关系意味着不承认该胡人王朝的任何名分,而直接进入战争状态。其次,在与东晋间的关系中,前凉基于“奉晋勤王”的理念,始终维持着友好关系。在双方关系的建立和发展中,前凉作出了主导性的作用,比如从张骏、张重华的上疏文中可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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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治 연간의 漢人 貳臣과 ‘滿漢一家’의 실상

박일현

[NRF 연계]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Vol.53 2020.04 pp.17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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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rchen, Han Chinese officials who collaborated with the Qing Dynasty, were viewed as disloyal traitors from the middle period of the Qing Dynasty, even though they actually enabled the Qing to control China. In particular, their activities supported the pro-Han policies of the Qing, carried out under the slogan “Manhan yijia(Manchus and Hans are one family).” They also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Manchu-Han relationship. This thesis aims to examine the reality of this relationship and the slogan underpinning it, focusing on the Erchen during the early Qing Dynasty, especially during the Shunzhi period, which came about directly after the collapse of the Ming Dynasty. Even before taking over the reins of China, the Qing Dynasty effectively worked to win Ming officials over to its side. Han Chinese officials who submitted to the Qing were able to expand the scope of their activities in the royal court through the organization of the national system. And when Qing’s rule began, the Qing set out to foster the loyalty of former Ming officials. The Erchen capitulated to the Qing and engaged in political activities in various fields to consolidate national power and to stabilize Chinese society. Although the Erchen’s diverse backgrounds brought about internal divisions and rivalries among them, conflicts between the conqueror, the Manchus, and the conquered, the Hans, were even more intense during this period, and the Erchen were caught up in them. The Qing Dynasty advocated the idea that the Manchus and the Hans were part of one family, a tenet which emphasized the equal treatment of both, and they sought to employ this philosophy in order to rule China. The Erchen supported this thinking and tried to make it even more convincing. The activities of the Erchen which were supportive of Qing’s pro-Han policies showed the possibility of unifying China. However, in reality, the Manchus and the Erchen distrusted each other. The Manchus tried to hold the Erchen in check and control them, and this led to continuous conflicts between the two over the course of Shunzhi's rule. Tensions arose mainly in regard to the interests of the Manchus, and as the ruler of the Qing Dynasty continued to control the Erchen, he took the Manchus’s side. This study examines the Manchu-Han relationship in the early Qing Dynasty, focusing on the role of the Erchen. It finds that there were conflicts between the Manchus and the Hans at that time, which suggests that the goal of the Manchus and the Hans being one family was not realized in reality. It cannot be said that the Erchen’s wide range of activities during the Shunzhi period reflected this unifying message. The strict constraints on and control over the Erchen imposed by the Qing demonstrate that its political slogan “Manchus and Hans are one family” was actually used to defend the Manchus’ interests. In other words, it actually contributed to strengthening the Manchu's dominance. Therefore, this strand of thought functioned as a dual logic in relation to the Erchen, simultaneously a useful ideology to promote and a mere rhetorical strategy that was not at all reflective of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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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胡時期 漢人王朝 冉魏와 그 性格 ― 胡漢對立과 그 克服의 限界를 중심으로 ―

이춘호

[NRF 연계] 중국고중세사학회 중국고중세사연구 Vol.23 2010.02 pp.11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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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过“徙胡之举”、“杀胡之令”、“轻胡之事”对在从冉魏建国至灭亡时有关胡汉对立的诸问题进行分析,得出了如下的认识:后赵末,掌握军政大权的冉闵率领乞活等众多汉人与“亲赵”势力展开军事斗争。这时由于后赵石氏一族所造的倒行逆施,而困于达数百万的胡汉人自发而起做下从华北之地逃往原土的壮举。这一壮举是他们面对着此地农业经济属于破坏以及政治、社会状态处于不稳定时,能够表现出的行动之一。不过,由此所带来的此地空洞化现象有助于了解使冉闵本人有任务拉拢或安抚胡汉人,而且由他所建的王朝有理由和胡人集团搞好关系。因此,在颁布“杀胡之令”之前冉闵及其随从者为了补充劳动力和兵力,作出了拉拢众多胡人的努力。不过,以羯族为首的“反对冉闵”的胡人集团始终存在,并且将成为对冉闵造成更大的威胁。这对冉闵来说,在无法和胡人集团达成友好关系,如此的情况下终于颁布“杀胡之令”了。众所周知,此命令不是单独颁布下去的,即按“宣令”、“下令”、“班令”的顺序实行下去的。如果“宣令”、“下令”是依然把胡人看成拉拢和安抚的对象而出现的话,“班令”与命令给以汉人出身的各地地方将领的“书命”是针对屠杀胡羯而发起的。冉闵对胡羯进行屠杀后,不立即建立汉人王朝,而推举后赵的合法继承者石鉴,与此同时,据于谶文上的“继赵李”,改国号为“卫”,并改姓为“李”。此事正说明“班令”和“书命”是冉闵在不得已之下所发起的。此事意味着继“杀胡之令”而进行的后续措施,冉闵就要这么做,是因为一来要推举石鉴消除对他自己“屠杀胡羯的罪名”,二来要希望和胡人集团保持友好关系。可是,不出现和冉闵保持友好关系的胡人集团,并且在石鉴的背叛之下,对冉闵来说最后的选择就是他自称皇帝,建立汉人王朝。冉闵在称帝的过程中所做的表现很类似于在中国历史上众多开国君主称帝时的情况,但他通过此事聚合自己的党羽,并且要试探自己的潜在竞争对手李农的本心。不管怎样,被胡羯所排斥的冉闵就通过颁布“杀胡之令”,终于建立起冉魏王朝的。不久他在面对着管理并治理国家的实质问题时,立刻派遣使臣给据于地方各地拥有军事力量的胡人集团打好关系,与此同时,针对被俘或投降的胡人而设置大单于,并把胡人安排到各将领的统治之下。尤其是,冉魏建立后,汉人似乎不支持参与其王朝,这直接影响到冉闵更积极地拉拢众多胡人。这样,冉闵虽根据“反胡”、“亲汉”的理念建立汉人王朝,但以后只要走上“亲胡”之路,这种情况在冉魏王朝内始终存在。众所周知,冉魏和后赵残余势力所展开的军事斗争共有六次发生,不过两者间都是用你死我活的方式进行斗争的。尤其是,其军事斗争的形式是后赵残余势力向冉魏挑战的形式进行的,这意味着后赵残余势力对冉魏保持更多的敌对感。一般而言,在战场上轻视敌人,并傲视自己是不可取的。冉闵仅有一次的大败是在这种傲视之下发生的。在这里,值得一提的是,这种情况再现于和慕容鲜卑之间的军事斗争当中。其后他被俘,并其王朝告灭亡。在这种“前车之覆,后车之鉴”的鉴戒当中,难道冉闵从此未吸取教训吗?当时,冉闵认为偏安政权的东晋无法满足居于北方的汉人的要求。更重要的是,他灭掉曾统一北方的后赵而自居,并且深深受到“自古无胡人为天子者”的观念。因此,他不能从“前车之覆,后车之鉴”中吸取教训,不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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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胡前期 漢人士族의 ‘克復神州’와 그 眞相 - 劉琨의 西晉再興을 위한 諸努力을 중심으로 -

이춘호

[NRF 연계] 중국고중세사학회 중국고중세사연구 Vol.22 2009.08 pp.32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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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晋以来, 已迁于塞内而居的五胡在‘奴隶御我’的困境中开始醒悟民族自觉, 并在利用西晋王朝统治阶级内部的腐败和司马氏诸王之间的权力斗争, 最终建立了自己的‘王朝’。当时以刘琨为代表的汉人士族对如此的历史事实有如何的行动和表现呢?笔者认为, 刘琨的行为和表现足以说明一般汉人士族对当时历史事实的认识, 甚至成为较好地论述他自己要以‘戮力王室’而要追求的‘克复神州’的依据。据了解, 在汉人士族当中, 有的不肯接受胡人成为支配阶层, 以及他们的政权, 由此不可和他们合作, 并决定离开家乡寻找新的地方去;有的不仅受到宗族观念上的束缚, 而且不易于生存在新的环境, 从而建立以半独立性的组织-‘坞堡’, 和胡人进行合作或反抗;有的因为一方面厌恶西晋的无能和腐败, 一方面迷惑于他们宗族的安慰和个人的成功, 由此, 他们积极地参与五胡政权, 并和他们进行全面合作。刘琨作为并州的最高地方长官, 具有和匈奴刘氏、羯族石氏不可合作的‘志奖王室’和‘翼戴晋室’的存在理念, 并在北方重镇-并州始终把它贯彻下去, 但是因为一、当时汉人士族普遍處在褊狭的排斥性和自私性的觀念中;二、刘琨个人在能力方面的不足和并州得不到拓跋鲜卑的支援;三、刘琨通过和胡人间的妥协, 开始认可匈奴、羯族的现存力量, 最终他本人遭遇悲剧, 并且不可‘庶雪国家之耻’。 笔者拟通过本研究寻找汉人士族对以‘五胡时期的出现’的史实采取如何的行动, 据此, 较好的说明以及理解五胡时期的诸多历史现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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