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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공성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그담당자는 어디까지나 양반 사대부들이었다. 그러나 동학 등장 이후 그것이‘시천주(侍天主)’, ‘다시 개벽’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새롭게 전개되었다. 그것은동학은 ‘시천주’ 즉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영성적 자각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설파함으로써 종래 통치·교화의 객체로 여겨졌던 일반 민중과 여성·천민 등을 공공성의 담당자로 부상시켰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는 동학 초창기부터 3·1독립운동 전후까지의 동학-천도교의 한국적 공공성의 전개에 대해 살펴본다. 이 연구에서는 첫째, 동학의 역사 속에 나타난 공공성의 전개에 대해 살펴본다. 그것은 우선 수운 최제우 재세 당시부터 접포(接包) 안에서의 무차별 평등과 ‘유무상자(有無相資)’로 나타났다. 이어서 교조신원운동과 관의 침탈을 막는 집단행동을 통해 동학교도는 스스로의 사회적 실력과 공공적 사명감을 자각하고 동학농민혁명에서는 일반 농어민의 이해를 대변하기까지 했다. 둘째, 의암 손병희를 통해 공공신앙으로써의 동학-천도교를 밝힌다. 의암은 서양근대문명을 수용하면서 진보회(進步會)=일진회(一進會)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충분히 이루지 못했던 폐정개혁을 추진하고 “크게 민권(民權)을 떨쳤”다. 1919년에 3·1독립운동 때 체포된 의암은 “나의 뇌리에는 국가라는 관념은 없다. 오직 민족이라는 것이 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그에게 국가란 ‘인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가 독립을 지향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의암은 독립한 후 한국이 중국·일본 등과 더불어 국가연합체를만들어서 서양의 침략을 맞고 장차 세계의 나라를 일단(一團)으로 만들어서 아예 침략이란 생각 자체를 없애야 된다는 비전까지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연구의 결과 첫째, 동학의 ‘공공성’은 먼저 신도집단 내부에서 형성대고이어서 교조신원운동,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사회적으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의암에 의해 나라와 나라의 연대, 나아가서는 세계 각국의 연대까지 포괄한 비전을 획득했던 것이다. 둘째, 동학-천도교의 ‘공공신앙’은 오로지 개인의 ‘안심입명’만을 위하거나 고작해야 ‘인심세태(人心世 態)의 개선’을 통해 행정을 보완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바탕으로 한 개인 혹은 공동체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고 사회윤리적의식을 가지면서 이상세계의 비전을 향해 현실을 변혁해 나가는 것임을 확인할 수 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의 ‘공공신학’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종교의식을 공유했었기 때문에 3·1독립운동 때에도 여러 종교의 연대가 가능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Publicness in Korea showed various aspects even the Joseon Dynasty, but it will taken over Yangbans(Scholar-officials). However, after the appearance of Donghak, it has made a new development through the keyword ‘Sicheongju(侍天主)’ ‘Dasi Gaebyeok(Re-Opening in the world)’. Donghak taught ‘Sicheongju’, this is the spiritual awareness that every people is the dignity and equality of human being. The past, the populace, women, and lowly was only the object of governance or enlighten. but now they were emerging as a person who was responsible for publicness. In this research, we will consider the development of publicness in Donghak-Cheongdogyo from the earliest stage to around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First consider is the development of ‘publicness’ in the history of Donghak. From the age of founding master Su-un(水雲) Choe Je-u(崔濟愚), it appeared that equality in the organization(Jeob接 and Po包) and cooperation(Yumu Sangja有無相資). Suun was executed by Joseon government as a heresy distracting the people. But Hae-wol(海月) Choe Si-hyeong(崔時亨) took to lead demonstrations to clear up Suun’s false charge. He tried a dialogue to the government to clear his false charges, tolerate Donghak, and stop the persecution to Donghak disciples. However, because it did not stop that the repression of the disciples of Donghak, confiscation of property and harm these family, Donghak disciples cooperated with each other to exercise their ability to recapture the captured. These collective actions made them to awoke these own social power and public mission. An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led by Jeon Bongjun(全琫準), the Donghak Army acted as an advocate for the interests of farmers and fishermen. Next, we will reveal Donghak-Cheongdogyo as the public faith through Wiam(義庵) Son Byeong-hi(孫秉熙). Wi-am moved to Japan after failure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accepted Western modern civilization while associating with exiled members of the Enlightenment Party. He made to organize a political party(Jinbohoe進步會, the progressive party) to promote Korean civilization opening up. And it became unite with Iljinhoe(一進會) to avoid repression from Korean Government. Iljinhoe=Jinbohoe promoted reform that could not be accomplished by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Extended the rights of the people very much. But because Yi Yong-gu(李容九) agreed to make Korea a protectorate of Japan, Wi-am banished him and his followers, and reformed Donghak to Cheondogyo(天道敎). In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1919, Wi-am arrested as the central figure of it. He stated that “There is no idea of state in my mind. But I have only ethnic.” He believed that the state exists for happiness of the people. Joseon dinasty, Korean Empire, and Japan Empire did not make the people and the ethnic happy either, sodecided independently to build a new country. After independence, He depicted a vision that united Korea, China and Japan fight against the invasion of the Western powers, and in the future they will eliminate the invasion to as a group of countries of the world. In addition, Wiam also insisted that “I planned independence of Korea to achieve the purpose of religion.” He considered the purpose of religion that it is to act correctly itself, and to make remarks and acts actively against to correct the social and political distortion, and to realize the well-being of the people. As a result of this research, it was confirmed that the ‘publicness’ of Donghak was first formed inside the faithful group, next grew to be social being by the founder’s innocent demonstrations an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Wi-am make a vision that it is independent national solidarity and even the solidarity of all countries of the world. Next, Donghak as a public faith was not merely to supplement the administrative that to make peaceful of individual mind or to improve of public morals at best. It based on faith, and recognize the responsibility to historical reality in relation to the world through individuals or communities. Which is also similar to ‘the public theology’ on Christianity, it aims at a vision of a ideal society with a social ethical awareness. We should say it ‘public Donghak’. Because it shared such public religious consciousness precisely, solidarity of religion became possible with 3.1 independent movement.
한국윤리교육학회 한국윤리교육학회 학술대회 동서양의 공공세계와 윤리교육 2011.10 pp.10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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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惠岡崔漢綺(1803-1877)의 氣學的“通”의 윤리관을 신념대립 극복과 소통의 윤리로써 검토하고자 한다. 원래 최한기의 인식론과 윤리관은 “나의 神氣가 그의 神氣와 통하는 것이고, 그의 神氣가 나의 神氣와 통하는 것이라는 通의 관념을 떠나서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신체의 여러 기관들을 횡단매개 하는 神氣의 작용에 의해 연동하고 있다는 다원적ㆍ동태적ㆍ氣通的인 인체의 이미지가 깔려 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神氣가 두루통하는 것이 건강이자 善이고 神氣가 치우치고 정체된 것은 병이고 不善이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를 단지 인간 개체만이 아니라 家(가족 共働態), 國(국가 共働態), 敎(문화권, 문명권 혹은 종교문화 共働態)라는 크고 작은 사회집단에까지 확대 적용시켰다. 그는 세계가 여러 敎에 의해 갈라지고, 조선 국내에서는 정부의 혹심한 천주교 탄압으로 유교(성리학)과 천주교의 신념대립이 들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체계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서로를 황단매개 해서 통하게 하려 한 그의 윤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략 그랬듯이 초월적ㆍ형이상학적ㆍ초감각적인 理에 윤리의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개인이 실제로 서로 협력해서 타자의 쓰임이 되는(人人相爲用) 가운데서 사람들이 함께하고 서로 돕는 道가 생겨온다고 하는 윤리관을 제시했다.
崔漢綺の氣學思想の原型は、個体内でそれぞれ固有のはたらきをする身体の各器官が、一つの 神氣によって横断媒介されて通じあい、総体として一つに調和しているという多元的・動態的・ 有機的な身体イメージにあった。そこでは氣が通ずることが健康・善であり、氣が偏滞している のが病気・不善であるから、この偏滞をいかにして「変通」して通ずるかが根本課題となる。彼 の倫理思想も、この原型を抜きに考えることは難しい。なぜなら彼はこのイメージを、人間の個 体に対してだけでなく社会集団にも適用したからである。そして主要な共動態として、家(家族 共動態)・国(国家共動態)・教(文化圏・文明圏または宗教文化共動態)を挙げた。この中でも注 目すべきは「教」で、彼はすでに儒教中心の世界観を脱して、世界には普遍的価値と倫理道徳を 説く「教」がいくつも存在し、それら一つひとつが多くの国家・地域・民族を統合して文化圏を 形成していることを認識していた。また一方、彼の目の前にあった時代的な課題として、たとえ ば天主教を邪学とみなして残酷な迫害を続ける朝鮮政府(そしてその根底にある性理学)と、弾 圧に対し信徒たちがむしろ喜々として殉教する天主教という、相互に疏通も妥協も不可能な二者 が存在した。 そこで彼は、性理学や天主教はもちろん、従来の多くの倫理思想がそうであったような超越 的・普遍的価値や内在的徳にもとづいた倫理を斥け、具体的な人々の互恵関係を通して相通じ、 相和するに至るという新しい倫理を構想した。また同じ観点から、伝統儒学の五倫も「人人相為 用」つまり人と人が相互に相手の役に立つという倫理として捉え直された。そして彼は人ひとり 異なる能力と人格とはたらきを有する無数の民たち(兆民)が自発的に実現をはかる、地球規模 での和、すなわち兆民致和という目標を提示したのである。
‘公共哲學’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試論 - 중앙대학 이명한 교수의 비판적 견해에 대한 반론을 포함해서 KCI 등재
한국윤리교육학회 윤리교육연구 제25집 2011.08 pp.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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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양명학』제28호(2011년 4월)에 실린 이명한 교수의「공공철학과 공공철학 보급에 대한 반성적 고찰」과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론을 계기로 해서 공공철학의 내용과 지향에 대한 열린 대화의 장을 펼쳐보고 싶은 것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공(公)과 사(私)에 대한 공공철학의 견해를 밝히고 그것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시정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공공철학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입장과 관점을 변호ㆍ계몽ㆍ보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적, 민족, 정치적 신조 등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여러 주제에 대해 대화ㆍ토론하면서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열어나가는 철학 활동이고, 그것은 자기와 타자의 진솔하고 활발한 소통ㆍ상통ㆍ통달을 이루고자 하는 철학적 운동이며, 그것을 통해서 한일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대화와 상호이해 및 화해와 공복(共福)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염원을 가진 현재진행형의 철학적 영위이다.
This paper is a preliminary attempt to critically respond to the ungrounded critique of Kyoto Forum-promoting public philosophy in professor Lee Myeong-Han's paper titled "the Reflective Consideration for the Dissemination of Public Philosophy in Korea now" in Yangmyeonghak, No.28 (April 2011) published by Korea Yangmyeonghak Society. I would like to summarize three points of my paper. The first point deals with the main currents of thoughts and ideas underlying Kyoto Forum public philosophy movements. The second point is concerned with clarifying Director Kim Tae-Changs philosophysing activities. Then third point refers to clarifying prof. Lee Myong-Han's misunderstanding and/or distortions of public philosophy promoted through Kyoto Forum for the past twenty years in Japan and ab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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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世紀の日本において、教派神道各派はさまざまな形態の神国思想を 展開したが、天理教の場合は、少なくともその 「原典」からは 「神国」の 用語や、日本を指して神国となす用例は見出しにくい。その代わり 『おふでさき』に頻出する 「にほん」という語が天理教における 「神の国」 をあらわしている。『おふでさき』によれば 「にほん」は 「から」とその根 源を同じくするが、現状においては 「にほん」は微弱で 「から(とふぢん)」 は強勢であり、 「から」は 「にほん」の領域に入り込んで好き勝手にして いる。しかし神はそれを憤り、やがて 「にほん」を助けて 「から」を屈服 させ、 「から」を 「にほん」の領域に入れ、やがてはすべてが 「にほん」と なる。このような 「にほん」と 「から」の関係は大まかに言えば、アウグ スティヌスの 「神の国」と 「地の国」、あるいはイスラム法における 「ダー ル․アルイスラム(イスラムの家)」と 「ダール․アルハルブ(戦争の家)」と 同じ思想類型であるといえる。また 「にほん=神の国」の拡大というモチー フは 『みかぐらうた』ではより直截に、 「世界だすけ」への志向として歌 われている。 また 『おふでさき』にみられる、社会の下層を指す 「谷底」と上流層を 指す 「高山」もまた、それぞれ 「にほん」および 「から」と同じような関係 にあることがわかる。『おふでさき』には 「高山のしんのはしらはとふぢ んや、これが大一(=第一)神のりいふく(=立腹)」という歌まであり、両 者の類似性は明らかである。 このような天理教における 「にほん」と 「から」の構造には、 「から」お よび 「高山」の否定․対立という契機と、「にほん」と現実の日本の同一視 により 「世界だすけ」のためという大義名分のもと日本軍国主義の膨脹政策 に積極的に同調․便乗する契機とが含まれていた。前者の側面は、天理教 教会よりむしろその分派において先鋭的にあらわれたといえる。 ところで明治政府は、キリスト教流入による日本の社会秩序の崩壊に 対する防壁として、全面的な社会改造に国民を従わせるカリスマとし て、明治維新の実権を握った討幕派が権力基盤の脆弱性を補う大義名分 として、あるいはまた西洋諸国のキリスト教にあたる日本国の精神的機 軸として天皇の権威を要請し、それを支える国家神道体制を構築して いった。いわば 「天皇を中心とする神の国」作りを進めていった。それは 天理教教祖の 「神の国」とは明らかに対立するものであった。 教祖自身は教えに無理解な国家権力との対決を恐れず、国法に対する 神の優越性を説破した。しかし教団としては教祖のそうした尖鋭的側面を あえて前面に押し出すわけにはいかず、戦前の天理教教会は天皇制․国 家神道体制に組み込まれながら国家の公認と社会的な認知を受け、そうし ながら宗教的な主体性を追求する辛い綱渡りを余儀なくされた。 一方、 「教祖のひながた」に従うという教えのもと、かつては一般の信 者の多くが教祖に倣って財産を放擲し、地方教会での共同生活を送りな がら布教․おたすけに邁進した。その彼らの心の支えとなったのは、い わば 「から」を 「にほん」の地にする、つまり世界だすけ․の教えを説い て無理解な人々を回心させ、最終的には全人類を陽気ぐらしの世界に導く という意識であった。こうしてみると、一般の天理教信者が教会を支え つつしゃにむに 「神の国」の拡大に邁進する一方、教会本部が天理教の社 会的地位を高めて日本国家の弾圧や社会の反対を抑え、信徒への迫害を最 大限回避する盾としての役割を担ったことが、天理教教団を存続せしめ、 さらには教派神道最大の教団にまで発展させた秘訣であったといえよう。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basso ostinato(執拗低音)"에 대한 一考察
한국일본사상사학회 日本思想 제6호 2004.04 pp.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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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19세기 조선에서 동서의 학술을 종합하여 “기학(氣學)”이라고 하는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진 실학자이다. 최한기는 “심학(心學)을 전공하는 자는 제규제촉(諸竅諸觸; 감각기관)을 비루하게 여기고 성명(性命)의 이치를 탐욕스레 추구한다.” 라거나 “심학의 사람은 안을 지키고서 밖을 잊고…….”라고 하듯이 심학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많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을 자세하게 검토해 보면 그는 오히려 심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왕양명(王陽明)의 사구교(四句敎) 해석을 둘러싼 소위 “천천증도(天泉證道)”는 중국 양명학파가 분열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지만 최한기는 이것에 대해 그 당사자인 왕기(王畿)와 전덕홍(錢德洪) 양자의 설을 조정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는 또 심성의 선악허실(善惡虛實)을 둘러싼 기존의 의논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후의 경험이 무시되고 있는데 경험 이전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의논은 본질적으로 불가지론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이 양지(良知)를 타고난다고 하는 설은 기질의 편벽됨을 살피지 않는 채 자기 기질에 따라 판단한 것을 “양지”라고 착각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점에서 그는 아프리오리인 천부(天賦)의 앎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그것으로 여기는 것은 기실 태어난 후의 견문에 의해 얻어지는 것일 따름이라는 생각을 도입한다면 심학에 계발하는 바가 있게 되고, 후세 사람들의 노고도 줄여서 “심학지후(心學之後)” 즉 “포스트 심학”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한기가 말하는 “기(氣)”의 개념은 동양의 전통적인 그것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지만 기학의 근간인 “기”, “신기(神氣)”의 기원에 대해서는 종래 그다지 많이 연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양명학의 “양지”로부터 천지만물을 일체로 삼는 우주의 본체라는 측면과 몸의 주재로서의 측면을 이어받은 한편으로 사람이 타고난 도덕성의 측면을 제거한 것이었다. 최한기는 감각기관으로부터 받은 자극이 영혼에게 전해지고 지각과 판단, 그리고 호오의 감정이 일어난다고 하는 생각을 한역 스콜라철학의 아니마론에서 배웠다. 한편 본질적으로는 순수하고 맑디맑은 질을 가지고 있으나 감각적 경험에 “습염(習染)”되는 것으로 지각과 판단, 호오의 감정을 일으키는 인식의 기반으로서의 사람의 신기는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한 조선양명학(朝鮮陽明學; 강화학파)의 사람이 타고난 것으로 선에도 악에도, 요순(堯舜)도 범부(凡夫)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간직하는 생지리(生之理)로서의 “순기(純氣)”, “정신진기(精神眞氣)”의 사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崔漢綺(1803~1877)は、19世紀の朝鮮において、東西の学術を綜合して「氣學」という独創的な思想体系を作り上げたことで知られる実学者である。 崔漢綺は「心學を專攻する人は諸竅諸觸を以て卑屑と爲し、性命の理を貪究す」とか「心學の人は内を守りて外を遺し……」などと心学に対し批判的な意見を多く述べている。しかし、彼の著述を仔細に検討してみると、彼はむしろ心学に造詣が深かったことが分かる。たとえば王陽明の四句教の解釈を巡る所謂「天泉証道」は、中国陽明学派が分裂する契機となった事件だが、崔漢綺はこれについて、当事者である王畿と銭徳洪の両者の説を調停する案を提示している。彼はまた、既存の心性の善悪虚実をめぐる議論で人が生まれた後の経験が無視されているため、経験以前の人間本性についての議論は本質的に不可知論であると主張した。また人が生まれながらに良知を有するという説は、気質の偏りを反省しないまま、自己の気質に基づいて判断したことを「良知」と思いなす危険性があると指摘した。 これらの点から彼は、アプリオリな天賦の知は存在せず、人がそれとみなすものは、実は生まれて以後の見聞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ものに過ぎないという考え方を導入するならば、心学に啓発するところがあり、後の人々の労苦をも減らして、「心学之後」すなわち「ポスト心学」が興るだろうと主張した。 崔漢綺のいう「氣」の概念は東洋の伝統的なそれとはかなり異質なものであるが、氣學の根幹をなす「氣」「神氣」の起源については従来あまり研究されてこなかった。 だが実は、それは陽明学における「良知」から、天地万物を一体と為す宇宙の本体という面と、一身の主宰という面を受け継ぐ一方で、人が生まれつき持つ道徳性という面を取り除いたものである。 崔漢綺は、感覚器官からうけた刺激が魂に伝わって、知覚と判断、および好悪の感情を生じるという考え方を漢訳スコラ哲学のアニマ論から学んだ。一方、本質的には純粋で澄み切った質を持っているものの、感覚的刺激に「習染」することで知覚や判断、好悪を生じる、認識の基盤としての人の神氣は、鄭斉斗を始めとする朝鮮陽明学(江華学派)の、人が生まれながらに持っている、善にも悪にも、尭舜にも凡夫にもなる可能性を秘めた生の理としての「純気」「精神真気」の思想から受け継がれたものと考えられる。
[NRF 연계] 영남퇴계학연구원 퇴계학논집 Vol.12 2013.06 pp.24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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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교가 전래됨과 동시에 유교적 성인의 관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인이란 무엇인가”가 사상적 과제가 된 것은 에도(江戶) 시대에 들어간 17세기, 한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이 일본 사회에 정착된 뒤의 일이었다. 대륙 전래의 유학(성리학 · 양명학 등)과는 이질적인 일본 독자의 성인관이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를 비롯한 지식인들에 의해 잇따라 제시되었다. 그 중에서도 오규 소라이가 성인의 중국 고대의 지배자 · 제도 제작자로서의 측면을 특히 강조한 것은 지식인들에게 성인에 대한 회의를 야기하고, 나아가서는 성인의 정당성 · 윤리성까지 의심하게 될 계기를 마련했다. 예컨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성인을 남의 나라를 빼앗는 “악신(惡神)”이라고 규정하고,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에 이르러서는 성인을 도적으로 단죄했다. 쇼에키에 의하면 성인이라는 자는 천하 만민부터 천지(그는 이것을 轉定으로 표기한다)의 도를 빼앗아 임금으로 군림하면서 국민을 평안케 한다는 미명하에 여러 가지 문물제도를 만들어내고 수많은 규범을 확립함으로써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 것과 백성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백성을 타락시킨 자이다. 그래서 쇼에키는 성인의 “오역십실(五逆十失)” 비판을 통해 도쿠가와(德川) 봉건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함과 동시에 만 백성의 “직경(直耕)” 즉 남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고 뭇사람이 스스로 자기네의 논밭을 갈고 자기네 옷을 만들어서 입는 “자연세(自然世)”에의 회귀를 주장했다. 날카로운 현실관찰에 입각한 쇼에키의 사상은 에도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통렬하고도 철저한 이데올로기 비판이자 사회비판이었지만 그것을 리더십론의 시각에서 보면 도덕적 · 지적으로 탁월한 존재가 일반 대중을 통치 · 관리 · 지도하는 식의 리더십, 다시 말하면 기존의 성인론이 암묵적으로 함의했던 엘리트주의적 리더십을 뒤집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직경의 도”을 자각한 개개인이 주체가 되고 참여해서 공동태(共働態)를 경영한다고 하는 새로운 시더십의 유형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NRF 연계]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Vol.19 2009.08 pp.259-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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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19세기 조선에서 동서의 학술을 종합하여 “기학(氣學)”이라고 하는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진 실학자이다. 최한기는 “심학(心學)을 전공하는 자는 제규제촉(諸竅諸觸; 감각기관)을 비루하게 여기고 성명(性命)의 이치를 탐욕스레 추구한다.” 라거나 “심학의 사람은 안을 지키고서 밖을 잊고…….”라고 하듯이 심학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많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저술을 자세하게 검토해 보면 그는 오히려 심학에 조예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왕양명(王陽明)의 사구교(四句敎) 해석을 둘러싼 소위 “천천증도(天泉證道)”는 중국 양명학파가 분열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지만 최한기는 이것에 대해 그 당사자인 왕기(王畿)와 전덕홍(錢德洪) 양자의 설을 조정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는 또 심성의 선악허실(善惡虛實)을 둘러싼 기존의 의논에서는 사람이 태어난 후의 경험이 무시되고 있는데 경험 이전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의논은 본질적으로 불가지론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이 양지(良知)를 타고난다고 하는 설은 기질의 편벽됨을 살피지 않는 채 자기 기질에 따라 판단한 것을 “양지”라고 착각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점에서 그는 아프리오리인 천부(天賦)의 앎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그것으로 여기는 것은 기실 태어난 후의 견문에 의해 얻어지는 것일 따름이라는 생각을 도입한다면 심학에 계발하는 바가 있게 되고, 후세 사람들의 노고도 줄여서 “심학지후(心學之後)” 즉 “포스트 심학”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한기가 말하는 “기(氣)”의 개념은 동양의 전통적인 그것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지만 기학의 근간인 “기”, “신기(神氣)”의 기원에 대해서는 종래 그다지 많이 연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양명학의 “양지”로부터 천지만물을 일체로 삼는 우주의 본체라는 측면과 몸의 주재로서의 측면을 이어받은 한편으로 사람이 타고난 도덕성의 측면을 제거한 것이었다. 최한기는 감각기관으로부터 받은 자극이 영혼에게 전해지고 지각과 판단, 그리고 호오의 감정이 일어난다고 하는 생각을 한역 스콜라철학의 아니마론에서 배웠다. 한편 본질적으로는 순수하고 맑디맑은 질을 가지고 있으나 감각적 경험에 “습염(習染)”되는 것으로 지각과 판단, 호오의 감정을 일으키는 인식의 기반으로서의 사람의 신기는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한 조선양명학(朝鮮陽明學; 강화학파)의 사람이 타고난 것으로 선에도 악에도, 요순(堯舜)도 범부(凡夫)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간직하는 생지리(生之理)로서의 “순기(純氣)”, “정신진기(精神眞氣)”의 사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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