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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표는 16세기 대표적 성리학자 중 한 사람인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관련된 기존 연구 중에서, 우계의 사상이 성리학(性理學)뿐 아니라 실학(實學) 정신도 포함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면서,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관점과 방법을 보탬으로써, 개혁가요 실학 정신이 충만한 사상가로서 우계를 조명하는 데 있다. 우계와 실학을 연계한 연구가 소수의 논문에 불과한 것은 우계에게, 율곡(栗谷)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만언봉사(萬言封事)』와 같은, 개혁론과 경세론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저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조에게 올린 「시무편의(時務便宜) 15條」 등 장소(章疏)에 보이는 시무론⋅개혁론을 유의미하게 분석한 연구가 적거나, 연구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 이 논문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연구를 정리하는 한편, 우계의 성리학 사상에서 현실성, 현장성, 주체성 등의 특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The goal of this thesis is to agree with the argument that Woogye's thoughts include not only Neo-Confucianism but also the spirit of Silhak among the existing studies related to Woogye Seong-hon, one of the representative Neo-Confucian scholars in the 16th century, by adding another perspective and method in this regard, It is to illuminate Woogye as a reformer and a thinker full of the spirit of Silhak. The reason why there are only a handful of studies linking Woogye and Silhak is probably because there are no writings by Yugye that actively express the theory of reform and governance, such as Yulgok's Donghomundap or Maneonbongsa. However, one of the factors is that there are few studies that have significantly analyzed the theory of reform and the theory of reform that can be seen in places such as 「15 posts of Simu convenience(時務便宜)」 posted by him to King Seonjo, or that researchers are not paying attention. . In order to overcome these problems, this thesis aims to discuss the characteristics of reality, realism, subjectivity, etc. in Woogye's Neo-Confucian thought, while arranging existing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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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成渾)은 家學을 계승하며 道學 정신을 지향한 학자이며 교육자다. 그 는 책과 말로 하는 가르침보다는 모범적인 삶을 통해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또한 우계서실(牛溪書室)을 세워 제자들의 개인 차이를 파악하고 부족한 부분 을 보강해 주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성혼은 우계서실의 학생들에게 詩書와 禮樂을 익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부방에서 벗어나 자연을 보게 하였는데 서실에서 가까운 시냇가에서 한가로이 거닐게 하였다. 이런 우계서실의 분위 기는 당시 정치적 흐름이나 사건과 맞물려 성혼 들이 다양한 분야에 관 심을 갖게 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성혼은 사람에게 의 차이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질의 편벽성을 바 로잡아야 하는 교육의 출발점이 된다. 그는 교육과 학문을 통한 수양으로 기 질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혼탁한 을 제거하여 원래 존재하 는 이 드러나고, 의 을 회복한 구성원이 만드는 사회의 실현을 교 육을 통해 시도하려고 한 것이다. 성혼은 마땅히 읽어야 할 책으로 儒家經典, 性理書, 중국의 史書 등 총 23책을 말하였다. 그는 특히 『대학』 공부를 중시했는데 이는 敬 위주의 수양론 과 李滉에 대한 존숭의 마음으로 연결된다. 敬은 禮의 근본정신일 뿐만 아니라 誠意‧正心 이라는 修己의 영역과 治國‧平天下 라는 治人의 영역에서도 바탕 이 되기 때문이다. 성혼은 스승과 벗이 단박에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거나 聖人이 되게 하 지는 못한다. 아무리 스승과 벗이 훌륭해도 나와 다른 존재임이기 때문이다. 성혼의 이런 생각이 우계학파를 교조적으로 만들지 않는데 한 몫을 하였다고 본다. 그의 문인들은 정치적 상황이나 각자의 성향에 따라 자신의 길을 갔다. 그런 예 중 하나가 와 의 주장이다. 임진왜란 때 성혼은 柳成龍과 함 께 강화의 입장에 섰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정묘호란 당시 그의 문인 는 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으나 다른 문인 과 은 청나라와 강화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연구자들은 그 밖에 성혼과 제자(학파‧학 맥)의 경향에 대해 성혼의 개혁적 정책 추진을 조선후기 실학파와 연결 짓기 도 하고, 성혼 학맥의 인물들이 새로운 학문 분야에 주저 않고 나아가는 경향 성이 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성혼은 가족에게 다정하고 아랫사람의 어려움을 살폈다. 이는 그가 공감하 고 소통할 줄 아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현대사회 문제들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지만 그 중 하나를 꼽는다면 공감과 소통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혼이 걸어온 길이 현대 교육에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Seong-hon (成渾) is the scholar and educator of Dohak (Confucian ethics 道學) spirit, succeeding the family scholarship (家學). He guided his disciples through exemplary life rather than teaching by books and words. In addition, he established WoogyeSeoshil (牛溪書室) and conducted education to identify the disciples' individual differences and to reinforce the gap. Seong-hon not only taught WoogyeSeoshil's students poetery, books, decorum, and music, but also give them to see nature by escaping from the study room. He let them take a leisurely walk in the stream near Seoshil. This atmosphere of WoogyeSeoshil, coupled with the political currents and events of the time, may be one of the reasons for Seong-hon literati's interest in various fields. Seong-hon said that there is a difference in temperament (氣質)in man, which is the starting point of education to correct the deviation of temperament. He saw that education and learning can overcome differences in temperament. By removing the cloudy dignity ( ), the ethical doctrine (性善) that originally existed was revealed, and education was attempted to realize the society made by the member who restored the Seong (性) of the inherent nature (本然). Seong-hon said a total of 23 books, including Confucianism scriptures (儒家經典), scriptures of Sung Confucianism (性理書), and the Four Books of China (史書). He especially focused on studying ““Daehak””, which leads to Gyeong (reverence)-oriented self-cultivation theory and the respect and worship of Lee Hwang (李滉). Gyeong (reverence 敬) is based on not only the fundamental spirit of Ye (etiquette 禮), but also the domain of the discipline Seongui (誠意) – Jeongshim (正心) and statecraft (治國) - tranquility of the world (平天下) in terms of the domain of statemanship (治人). According to Seong-hon, teachers and friends do not make me into another person or become a sage (聖人). No matter how good a teacher or friend is, me is a different one from them. I think this idea of Seong-hon's played a part in not making the Woogye sect dogmatic. His literati went their way according to their political situation or their own inclinations. One such example is the claim of Cheokhwa (hostile settlement ) and Ganghwa (amicable settlement ). During the Japan Invasion in Year Imjin (1592), Seong-hon joined the position of amicable settlement with Yu Seong-ryong (柳成龍), which then bought King Seonjo's anger. At the time of the First Manchu Invasion in Year Jeongmyo (1627), his literati Lee Gui (李貴), along with Choi Myeong-gil (崔鳴吉), insisted on an amicable settlement, but the other literati, Yun Heun (尹) and Yun Hwang (尹煌) strongly opposed Ching for amicable settlement. The researchers also would link Seong-hon's reform policy drive with the late Joseon’s Sirhak-sect on Seong-hon and disciples (sect-school connection) trends, and would claim that some figures in the Seong-hon school connection had a tendency to move on to new fields of study without hesitation. Seong-hon was kind to his family and looked after the difficulties of his subordinates. This means that he is a sympathetic and communicative person. The causes of modern society's problems are not simple, but one of them might be empathy and communication. In this sense, the way Seong-hon has walked is expected to provide clues that can be used practically in modern education.
五洲 李圭景의 對外觀과 대응 KCI 등재후보
우계문화재단 우계학보 제42호 2022.06 pp.127-150
...실학자다. 그는 향촌에 살면서 땅콩을 키우기도 하고 구황작물이나, 금・은・ 동 등 광물의 유용함에 관심을 보였다. 이는 이규경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 에서 유리되지 않고, 백성의 항산( )에 늘 관심을 두었던 실학자였음을 알 게 한다. 동시에 ‘오주 , 다섯 대륙 ’라는 호는 그의 정신이 외부를 향해 열려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규경은 두 가지 측면에서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의 배가 조선 해안에 표 류하고 정박한 일들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하나는 알파벳을 소개하면서 구만 리( )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가 글자도 다르면서 교류하는 것이 아름 답다고 한 면이다. 다른 측면은 외국 선박의 출현이 심상치 않으니 정말 주의 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였다는 점이다. 이규경은 외세를 경계하고 조정( ) 의 강력한 대응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평화로운 통상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 한 듯하다. 배에 대한 관심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로 나가서 무역을 하여 재화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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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 이규경은 총 60여권에 달하는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남긴 조선후기 실학자다. 그는 향촌에 살면서 땅콩을 키우기도 하고 구황작물이나, 금・은・ 동 등 광물의 유용함에 관심을 보였다. 이는 이규경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 에서 유리되지 않고, 백성의 항산( )에 늘 관심을 두었던 실학자였음을 알 게 한다. 동시에 ‘오주 , 다섯 대륙 ’라는 호는 그의 정신이 외부를 향해 열려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규경은 두 가지 측면에서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의 배가 조선 해안에 표 류하고 정박한 일들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하나는 알파벳을 소개하면서 구만 리( )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가 글자도 다르면서 교류하는 것이 아름 답다고 한 면이다. 다른 측면은 외국 선박의 출현이 심상치 않으니 정말 주의 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였다는 점이다. 이규경은 외세를 경계하고 조정( ) 의 강력한 대응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평화로운 통상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 한 듯하다. 배에 대한 관심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로 나가서 무역을 하여 재화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Oju Yi Gyu-gyeong is a Silhak scholar from the late Joseon period who published the 60-volume Oju Yunmun Jangjeon Sango. Living in the country, he grew peanuts and expressed interest in the usefulness of hardy crops and minerals like gold, silver, and, bronze. This reveals how Yi Gyu-gyeong, as a Silhak scholar with continuing interest in the fixed livelihood of the people, was never isolated within the space where he resided. At the same time, his pen name of ‘Oju(five continents)’ signified how his spirit was open to the outside world. In two different ways, Yi Gyu-gyeong described in detail how the ships of the Netherlands, England, and France went adrift or came to an anchor on the Joseon coastline. The first was when he described the beauty of exchanging cultures with far-away countries that use different letters while introducing the alphabet. Another way he described these incidents was as a warning, saying the appearance of foreign ships was unusual and that precautions must be taken. Yi Gyu-gyeong was wary of foreign influence and desired a powerful response from the royal court. At the same time, he believed it was possible to engage in peaceful commerce. His interest in ships would have originated from his hope of obtaining wealth by going out into the world through the oceans and engaging in trade. However, he seemed to have been somewhat relaxed with regard to the possibility of foreign powers putting pressure on Koreans by coming to Korea through those very same oceans.
17세기 호서학파의 성리학적 특징으로 본 충청의 로컬리티
[NRF 연계] 한국동서철학회 동서철학연구 Vol.78 2015.12 pp.301-330
...정신의 존숭, 예치를 통한 세계 질서 국축의 염원, 실심을 중심으로 한 실천중시의 성향 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호서학파의 정치적․학문 활동은 그들의 성리학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먼저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율곡 직계 계열은 대체로 천리를 따르고 인욕을 제거하여 도심으로 인심을 절제하려는 학문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리설에 바탕하여 절사나 주자주의의 강화, 북벌론이나 예송논쟁의 근거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들과는 달리 독자적 노선을 보이는 박지계 계열의 권시는 부친 권득기와 마찬가지로 리일원론적 이기심성론으로 일관하고 있어, 북벌의 춘추의리에 동의하기는 하나 예론이나 기타 영역에서는 무편무당의 일관된 원칙에 따라 활동하였다. 끝으로 우계학파 계열의 윤증은 이이의 성리학을 수용하기는 하나 주기적 관점이 아닌 영남유학도 수용하여 리 편재적 이기심성론을 주장하며, 절의정신의 실천을 더욱 강조하고 개방적 학문성향을 통해 양명학이나 실학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17세기 호서학파의 성리학적 특징으로 볼 때 이들은 모두 절의정신과 도의사상, 예치를 통한 이상사회 실현의 의지가 여타 지역이나 학파보다 강했고, 이러한 절의 중심의 선비정신이야말로 충청만이 갖는 로컬리티의 본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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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7세기 호서지역에서 활동한 호서학파를 중심으로 이들의 정치적 활동과 학문성향을 살펴보고, 이들의 이기심성론을 통해 충청의 로컬리티를 밝히고자 하였다. 17세기는 김장생을 조종으로 하여 김집, 송준길, 송시열, 권시, 윤증 등을 중심으로 호서학파가 성립되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춘추의리중심의 화이론을 바탕으로 예송과 북벌론을 통해 남인들과 갈등을 빚는다. 또한 이들의 학문은 절의정신의 존숭, 예치를 통한 세계 질서 국축의 염원, 실심을 중심으로 한 실천중시의 성향 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호서학파의 정치적․학문 활동은 그들의 성리학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먼저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율곡 직계 계열은 대체로 천리를 따르고 인욕을 제거하여 도심으로 인심을 절제하려는 학문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리설에 바탕하여 절사나 주자주의의 강화, 북벌론이나 예송논쟁의 근거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들과는 달리 독자적 노선을 보이는 박지계 계열의 권시는 부친 권득기와 마찬가지로 리일원론적 이기심성론으로 일관하고 있어, 북벌의 춘추의리에 동의하기는 하나 예론이나 기타 영역에서는 무편무당의 일관된 원칙에 따라 활동하였다. 끝으로 우계학파 계열의 윤증은 이이의 성리학을 수용하기는 하나 주기적 관점이 아닌 영남유학도 수용하여 리 편재적 이기심성론을 주장하며, 절의정신의 실천을 더욱 강조하고 개방적 학문성향을 통해 양명학이나 실학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17세기 호서학파의 성리학적 특징으로 볼 때 이들은 모두 절의정신과 도의사상, 예치를 통한 이상사회 실현의 의지가 여타 지역이나 학파보다 강했고, 이러한 절의 중심의 선비정신이야말로 충청만이 갖는 로컬리티의 본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study looks at the political activities and academic orientation of Hoseo hakpa (school of Hoseo) around the 17th century Hoseo region, and determines the locality of the Chungcheong region through Igiseongshimron. Hoseo hakpa was established by Kim Jang-saeng, Kim Jip, Song Jungil, Song Siyeol, Gwonsi, and Yun Jeung in the 17th century. These had political conflicts with Yesong based on Hwayiron (barbarism) of Chunchuerijungshim, and with Namin over Bukbeolron (conquering of the North). In addition, their studies emphasize the tendency of practicality, such as the respect and worship of integrity, wishing for world order through Yechi (courteous governing), and practical mindedness and practical science. The academic and intellectual activities of Hoseo hakpa was grounded in their Confucianism. First, the Noron of Kim Jang-saeng, Song Siyeol, was strongly against the Confucianism of Lee Ee, and had a strong desire to protect Doshim, so they claimed bukbeolron or Yesong debate to strengthen the reverence of Jeoleuijeongshin and jujaism. Unlike these, the Confucianism of Gwonshi is consistent with their own different path, keeping the principle Igishimseongron. While they agree with the Chunchueuri of bukbeol, they were consistent with the principle of Mupyeonmudang (no school or political party) on Yeron or other fields of studies. Lastly, Yun Jeung of Soron accepts the Confucianism of Lee Ee but claims ubiquitous Iggiseongshimron rather than a periodic point of view, and also accommodates Yeongnamyuhak, where puts more emphasis on the practice in Jeoleui (integrity) spirit and provides clues of Yangmyeonghak and practical science through the open academic nature. The Confucian characteristics of the 17th century of the Hoseo school had stronger beliefs about Jeoleui, Doeui and the realization of an ideal society through Yechi (courteous governing) than any other schools in other regions, and this kind of spirit was the core nature of locality in the Chungcheong region.
[NRF 연계] 한국공자학회 孔子學 Vol.21 2011.11 pp.33-63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망암은 학문이나 도는 현실에서 발현되어야 하고 현실에서 그 가치가 나타나야 한다는 실천성을 중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의(義)로서 결단하고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정신을 행하였다. 임진왜란 때 절의적 충의정신을 통해 모든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특히 행주대첩에서 그 발명한 화차(火車)와 총통(銃筒)의 활용은 난국의 전세(戰勢)를를 만회하고 역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향헌(鄕憲) 10여 조를 만들어 봄가을로 강습하여 풍속이 크게 교화되도록 노력도 하였다. 본 글은 56세 때 망암이 지은 「심득(心得)」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것은 그의 학문적 성향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료를 중심으로 학문과 그 구국운동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이 두 가지가 일치되어 나타난 실천적 특징은 무엇인가를 다루었다. 망암 선생의 학문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위난의 현실에 대비하고자 하는 경세의식과 지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도(道)의 실현이, 그 학문과 실천에 있어서 하나의 일관성을 이루면서,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조선의 성리학과 실학의 가교로서 그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이 ‘학문과 그 실천성’에 대한 특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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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망암(望菴) 변이중(邉以中) 선생의 학문과 실천성을 살펴본 것이다. 망암은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망암은 학문이나 도는 현실에서 발현되어야 하고 현실에서 그 가치가 나타나야 한다는 실천성을 중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의(義)로서 결단하고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정신을 행하였다. 임진왜란 때 절의적 충의정신을 통해 모든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특히 행주대첩에서 그 발명한 화차(火車)와 총통(銃筒)의 활용은 난국의 전세(戰勢)를를 만회하고 역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향헌(鄕憲) 10여 조를 만들어 봄가을로 강습하여 풍속이 크게 교화되도록 노력도 하였다. 본 글은 56세 때 망암이 지은 「심득(心得)」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것은 그의 학문적 성향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료를 중심으로 학문과 그 구국운동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이 두 가지가 일치되어 나타난 실천적 특징은 무엇인가를 다루었다. 망암 선생의 학문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위난의 현실에 대비하고자 하는 경세의식과 지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도(道)의 실현이, 그 학문과 실천에 있어서 하나의 일관성을 이루면서,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조선의 성리학과 실학의 가교로서 그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이 ‘학문과 그 실천성’에 대한 특징이라 하겠다.
[NRF 연계] 한국공자학회 孔子學 Vol.21 2011.11 pp.133-149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문을 계승하면서도 인간을 선(善)을 실현하는 주체로써 자각하고 학문과 실천의 일치를 항상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벼슬에 임하여서는 낮은 벼슬이라도 그 사무에 올바르게 처리하였으며, 부모의 상(喪)에 임하여서는 성경(誠敬)의 예(禮)를 다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의정신을 다하였으며 그 난국을 타개하고자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큰 공헌을 세웠다. 그가 화차(火車)와 총통(銃筒) 등을 발명하여 전세(戰勢)를 역전시키고 국가가 재건되도록 한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그는 향리에서 향약(鄕約)을 보급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니, 그것은 실덕을 권면하는 행사가 아니면 나태하고 게으른 습관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망암 변이중의 업적과 공헌에 의한 위상을 간략히 가늠한다면, 그는 실심(實心)에 의한 학문이야말로 참다운 의의가 있다고 하면서 매사 성경(誠敬)에 의한 지선(止善)을 이루고자 하였고, 또한 그 직분을 다하면서 항상 위난(危難)에 대한 대비하고자 하는 경세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위상은 조선 실학의 연원과 성리학의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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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망암(望菴) 변이중(邉以中)의 업적과 공헌에 의한 위상을 정립하고자 하는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그것은 학계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그의 역사적 위상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변이중은 17세기 초까지 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그 역할에 다하였다. 그는 일찍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문을 계승하면서도 인간을 선(善)을 실현하는 주체로써 자각하고 학문과 실천의 일치를 항상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벼슬에 임하여서는 낮은 벼슬이라도 그 사무에 올바르게 처리하였으며, 부모의 상(喪)에 임하여서는 성경(誠敬)의 예(禮)를 다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의정신을 다하였으며 그 난국을 타개하고자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큰 공헌을 세웠다. 그가 화차(火車)와 총통(銃筒) 등을 발명하여 전세(戰勢)를 역전시키고 국가가 재건되도록 한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그는 향리에서 향약(鄕約)을 보급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니, 그것은 실덕을 권면하는 행사가 아니면 나태하고 게으른 습관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망암 변이중의 업적과 공헌에 의한 위상을 간략히 가늠한다면, 그는 실심(實心)에 의한 학문이야말로 참다운 의의가 있다고 하면서 매사 성경(誠敬)에 의한 지선(止善)을 이루고자 하였고, 또한 그 직분을 다하면서 항상 위난(危難)에 대한 대비하고자 하는 경세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위상은 조선 실학의 연원과 성리학의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aims to define the value of Mangam’s status in terms of his contributions and achievements. This work is necessary to be done since Mangam’s status has never been evaluated accurately and rightfully till now due to the lack of its research on him in the academic circle. Byeon Ee-joong, called Mangam, had exerted himself for his missions and roles until he passed away. He learned and inherited from the academic thoughts and traditions of both Seong hon and Lee Yi in his youth so that he could awaken himself as the subject to fulfill the goodness as well as pursue the reconciliation of theory with practice. During the Imjin war, he not only carried out the spirit of Loyalty and Righteousness, but also contributed to overcome the difficulties in the battle with all his capabilities. He invented fire wagons(called Hwacha in Korean) and cannon(called Chongtong) that drastically caused to invert the war situation. In addition, he helped to provide each native village with hyang-yak(that is to say, a sort of voluntary regulations based on community spirit). The reason why he took part in actual practice would be derived from his ideal that people could have the tendency of being lazy without fulfilling the actual practice. After examining the status of Mangam in terms of his contributions and achievements, this paper shows that he regarded the true learning as the one that should make it actual in the real situations, giving us the meaning of his efforts to perform the ultimate good throughout all his life and his administrating spirit to prepare the dangerous situations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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