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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 성혼 연구는 1970년대 말 시작되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연구 성과가 제출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 연구 성과 제출이 대폭 증가하였으며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 꾸준히 연구가 이어져 2019년 현재 총 287건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연구 성과들은 절반 이상이 성리학(본체론⋅심성론) 분야이고, 나머지가 생애와 학문 소개, 학파⋅문인, 교육 분야이며, 10명 내외의 주요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가 주도되었다. 우계 연구가 단기간에 이루어짐으로 인해 우계 연구의 양적 성과에 비하여 질적 성과가 미흡하였다. 연구 분야가 치중되어있고 체계적이지 않으며 우계의 학문을 대표하거나 규정할만한 개념이나 색깔이 모호하다. 따라서 다음 세 가지가 향후 연구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우계의 학문에서 ‘보편성’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연구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우계 학문을 ‘퇴계·율곡의 절충론’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고, 성리학, 도학이 가진 보편성의 측면에서 우계를 연구해야 한다. 둘째, 우계 삶의 특수성, 우계가 처한 당대 현실의 특수성의 전제 위에 우계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즉, 우계로 우계를 이해해야 한다. 성리학은 ‘실천’을 위한 학문이고 따라서 본체론⋅심성론도 중요하나 수양론·경세론이 더 실질적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우계의 학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계가 어떤 이론이나 학설을 제시했는가보다는 그가 어떻게 수양하고 실천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셋째, 단편적·산발적 연구가 아닌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본체론·심성론을 구심점으로 잡고 수양·경세론 및 교육·문학·역사 분야를 균형 있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분야 간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계 연구의 방향성이나 기조를 세워 우계 학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Research on Ugyae Seong-Hon began in the late 1970s, and concrete results have flown from the late 1980s. In the 1990s, research results increased significantly. As of 2019, there are a total of 287 research results. Among the research, more than half of the studies are about Ugyae's Confucianism, and the rest introduce his life, academic acheivement, school, and education. Only about ten researchers did most of the research. Since the research on Ugyae has a short history, the quality of research is insufficient compared to quantity. The subjects of research are limited, and the research process is not systematic yet. Moreover, the main topic or symbol that represents or defines the meaning of Ugyae studies is still ambiguous. For these reasons, researchers should consider the following three points in future studies. First, it is necessary to change the research perspective to make a universal standard on Ugyae. Especially one should carefully examine whether Ugyae can be defined as 'the eclectic between Toegye and Yulgok's theory.' Also, One should study Ugyae under the aspects of Confucianism. Second, researchers should consider Ugyae's life and the specificities of his time. Neo-Confucianism puts stress on practice; thus, the theories of self-cultivation or statecraft are essential. To fully understand Ugyae's academic works, one should study how Ugyae cultivates and practices rather than which theory he presents. Third, researchers should do study intensively and systematically rather than fragmentarily and sporadically. The Benti'lun(本體論, ontology) and Xin'xinglun(心性論, the theory of mind) are fundamental, but one also should focus on the subjects as follows: self-cultivation, statecraft, education, literature, and history. It is not merely a quantitative balance between issues; it is necessary to establish the direction or basis of Ugyae research to clarify the identity of Ugyae.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의 회강(會講)⋅강학(講學) 활동 KCI 등재후보
우계문화재단 우계학보 제45호 2023.12 pp.117-157
...학문 연구와 저술⋅강학 활동에 주력한 전형적인 산림형의 재야 유학자이기도 하다. 송병순은 은진송문 후손들의 동일시 모델인 우암의 춘추의리사상이 각인된 만동묘훼철령으로 인해 크나큰 충격을 받은 끝에, 새로운 삶의 진로 모색에 나서게 된다. 이에 송병순은 고향인 회덕현과 이웃한 옥천의 오산과 활산 지역으로 순차적인 이거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송병순은 오산에서 약 16년 동안을 체류하는 동안에 독서와 저술⋅회강 활동으로 점철된 나날을 영위하게 되는데, 이는 차후 활산 경영을 통해서 착수한 자정노선에 대해서 예비적 실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송병순은 임오군란이 유발한 이듬해인 1883년(45세)에 “경전을 앉고 옥천의 활산에 접어든” 이후로, 향년 74세의 나이로 “활산정사에서 순의(殉義)”를 감행하기 이전 시기까지 자정노선을 이행하였다. 따라서 약 30년 동안 지속된 자정노선 이행기는 송병순의 생애에서 가장 중핵적인 국면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이 기간에 송병순은 독서⋅저술 활동 외에도, 강론⋅토론을 위한 회강과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학 활동에 주력하였음이 주목된다. 송병순은 회강과 강학 활동을 통해서 위학(爲學)의 효율성 도모와 유학적 자아실현, 그리고 “어둡고 꽉 막힌” 위기적 시국에서 유학적 진리[吾道]의 세계를 위호⋅발전시키기 위한 교육학적⋅도덕철학적⋅호교론적 차원에서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송병순은 오랜 세월 동안에 기울였던 정주학과 우암학의 연찬에서 온축한 지적 소양을 회향해 보이는 교육자적 면모를 선보이기도 했다. 1912년에 일제의 회유와 모욕에 맞서 자청한 순의란, 그간 진척시켜 온 독서와 회강⋅강학⋅저술 활동이 춘추대의론의 이름으로 귀착된 결국(結局)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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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행기를 주요 활동기로 삼았던 심석재 송병순은 우암 송시열의 9세손으로, 가형인 연재 송병선과 함께 연재학파를 창시⋅공유한 거유이자 애국지사다. 과거제를 통한 관직 진출에의 포부를 조기에 접었던 송병순은 평생토록 성현이 되기 위한 학문 연구와 저술⋅강학 활동에 주력한 전형적인 산림형의 재야 유학자이기도 하다. 송병순은 은진송문 후손들의 동일시 모델인 우암의 춘추의리사상이 각인된 만동묘훼철령으로 인해 크나큰 충격을 받은 끝에, 새로운 삶의 진로 모색에 나서게 된다. 이에 송병순은 고향인 회덕현과 이웃한 옥천의 오산과 활산 지역으로 순차적인 이거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송병순은 오산에서 약 16년 동안을 체류하는 동안에 독서와 저술⋅회강 활동으로 점철된 나날을 영위하게 되는데, 이는 차후 활산 경영을 통해서 착수한 자정노선에 대해서 예비적 실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송병순은 임오군란이 유발한 이듬해인 1883년(45세)에 “경전을 앉고 옥천의 활산에 접어든” 이후로, 향년 74세의 나이로 “활산정사에서 순의(殉義)”를 감행하기 이전 시기까지 자정노선을 이행하였다. 따라서 약 30년 동안 지속된 자정노선 이행기는 송병순의 생애에서 가장 중핵적인 국면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이 기간에 송병순은 독서⋅저술 활동 외에도, 강론⋅토론을 위한 회강과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학 활동에 주력하였음이 주목된다. 송병순은 회강과 강학 활동을 통해서 위학(爲學)의 효율성 도모와 유학적 자아실현, 그리고 “어둡고 꽉 막힌” 위기적 시국에서 유학적 진리[吾道]의 세계를 위호⋅발전시키기 위한 교육학적⋅도덕철학적⋅호교론적 차원에서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송병순은 오랜 세월 동안에 기울였던 정주학과 우암학의 연찬에서 온축한 지적 소양을 회향해 보이는 교육자적 면모를 선보이기도 했다. 1912년에 일제의 회유와 모욕에 맞서 자청한 순의란, 그간 진척시켜 온 독서와 회강⋅강학⋅저술 활동이 춘추대의론의 이름으로 귀착된 결국(結局)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Shimseokjae Song Byeong-soon who acted from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was the 9th generation descendant of Song Si-yeol(宋時烈) and was a Great Confucian scholar who established and shared Yeonjae School with his brother Yeonjae(淵齋) Song Byeong-seon(宋秉璿). He was also a typical non-government Confucian scholar who gave up the state examination(科擧) early and devoted himself to scholastic research, writing and educational activities to become a sage in his whole life. Being shocked by the order to close Mandongmyo Shrine(萬東廟) that the Confucian moral philosophy of Song Si-yeol he wanted to identify, Song Byeong-seon started to find a new path of life. Staying in Osan(梧山) for about 16 years, Song Byeong-soon enjoyed a life in seclusion represented by reading, writing and educational activities, which takes on a nature of preliminary experiment of self-comfortism(自靖路線) he initiated through the management at Hwalsan(活山) later. After “settling down in Hwalsan, Okcheon(沃川) with scriptures in 1883 (age of 45), Song Byeong-soon executed self-comfortism until the time he performed sunui(殉義: Dying in defense of one’s chastity) at Hwalsanjeongsa (活山精舍) when he was 74. Song Byeong-soon wanted to promote efficiency of learning(爲學) and confucian self-realization, and realize his wish at educational⋅philosophical⋅apologetic level to protect and develop the world of confucian truth[吾道] especially through lecturing(會講) and educational activities in the state of crisis. During the process, he also demonstrated an aspect of an educator who showed intellectual literacy he accumulated through hard research of the studies of ChengZhu and U-am he concentrated many years. Sunui he volunteered against the Japanese Empire in 1912 means a great conclusion(大結局) that reading, lecturing, educational and writing activities he carried forward was concluded in the name of the theory of Confucian moral philosophy.
魯西 尹宣擧의 삶과 학문 - ‘悔過自新’과 ‘喚醒實心’을 중심으로 노서 윤선거의 삶과 학문 - ‘회과자신’과 ‘환성실심’을 중심으로 KCI 등재후보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제18집 2008.12 pp.1-33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조선 후기의 학자 노서 윤선거의 생애를 통해 그의 학문 연원, 학문 경향, 학문과 사상의 특징, 후세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윤선거는 우계 성혼의 외손으로서 성혼 집안의 가학(家學)과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두 학파의 학풍을 한 몸에 수렴하였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탐구가 없었으며, 정주(程朱) 이후에는 오직 실천만 남았을 뿐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학통에서 ‘변통(變通)’을 중심으로 한 경세적 기풍을 이어받았다. 주역에 심취하여 변화의 원리를 탐색한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실심(實心)’ 두 글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당대의 학풍과 사풍(士風)을 비판하였으며,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유자(儒者)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실심사상’은 양명학 계열과 독자적인 경전 주해를 주창했던 계열의 학자들과 인적 관계가 있고 학문적으로도 맥락이 통한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그의 위치가 제대로 매김될 필요가 있다.
This study is aimed to comprehensively analyze the origin, tendency, features, influence to the next generation and etc of Noh-Seo Yoon Seon Geo’s learning and idea through his life, who was a scholar late in Joseon era. He was a grandson of U-Gye Seong Hon in his maternal root, so that he succeeded the learning tradition of Seong Hon’s family and Yul-Gok Lee Yee and then collected such learning tradition into himself from them. He tended to value practice more than theory. He showed the attitude that there had not been a theoretical investigation in Sung Confucianism and only action had remained since Jeong Ju (程朱: a scholar in Song Dynasty, China). On the other hand, he succeeded the governing style learning character focused on ‘ByeonTong (變通: working with adaptability)’ from Yul Gok’s school. It is one of the features of his learning that he searched out the principle of change being infatuated with “the Book of Change”. He put the words ‘SilSim (實心: sincerity)’ in his mind as the base of his idea to criticize the learning tendency and scholars’ styles of his times and show his sharp criticism to the Confucian scholars who were full of falsehood and affectation. His idea of ‘SilSim’ linked to the scholars rooted to Yangming Confucianism and the scholars who advocated independent translation of Confucian classics as well both personally and academically. He should be given his own position as it was in the history of idea late in Joseon era.
[NRF 연계]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논집 Vol.63 2019.11 pp.33-72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계 성혼 연구는 1970년대 말 시작되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연구 성과가 제출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 연구 성과 제출이 대폭 증가하였으며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 꾸준히 연구가 이어져 2019년 현재 총 287건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연구 성과들은 절반 이상이 성리학(본체론⋅심성론) 분야이고, 나머지가 생애와 학문 소개, 학파⋅문인, 교육 분야이며, 10명 내외의 주요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가 주도되었다. 우계 연구가 단기간에 이루어짐으로 인해 우계 연구의 양적 성과에 비하여 질적 성과가 미흡하였다. 연구 분야가 치중되어있고 체계적이지 않으며 우계의 학문을 대표하거나 규정할만한 개념이나 색깔이 모호하다. 따라서 다음 세 가지가 향후 연구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우계의 학문에서 ‘보편성’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연구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우계 학문을 ‘퇴계·율곡의 절충론’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고, 성리학, 도학이 가진 보편성의 측면에서 우계를 연구해야 한다. 둘째, 우계 삶의 특수성, 우계가 처한 당대 현실의 특수성의 전제 위에 우계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즉, 우계로 우계를 이해해야 한다. 성리학은 ‘실천’을 위한 학문이고 따라서 본체론⋅심성론도 중요하나 수양론·경세론이 더 실질적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우계의 학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계가 어떤 이론이나 학설을 제시했는가보다는 그가 어떻게 수양하고 실천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셋째, 단편적·산발적 연구가 아닌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본체론·심성론을 구심점으로 잡고 수양·경세론 및 교육·문학·역사 분야를 균형 있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분야 간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계 연구의 방향성이나 기조를 세워 우계 학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魯西 尹宣擧의 삶과 학문 -‘悔過自新’과 ‘喚醒實心’을 중심으로-
[NRF 연계]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유학연구 Vol.18 2008.12 pp.1-33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조선 후기의 학자 노서 윤선거의 생애를 통해 그의 학문 연원, 학문 경향, 학문과 사상의 특징, 후세에 끼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윤선거는 우계 성혼의 외손으로서 성혼 집안의 가학(家學)과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두 학파의 학풍을 한 몸에 수렴하였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탐구가 없었으며, 정주(程朱) 이후에는 오직 실천만 남았을 뿐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학통에서 ‘변통(變通)’을 중심으로 한 경세적 기풍을 이어받았다. 『주역』에 심취하여 변화의 원리를 탐색한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실심(實心)’ 두 글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당대의 학풍과 사풍(士風)을 비판하였으며,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유자(儒者)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실심사상’은 양명학 계열과 독자적인 경전 주해를 주창했던 계열의 학자들과 인적 관계가 있고 학문적으로도 맥락이 통한다.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그의 위치가 제대로 매김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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