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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전문학교 체육교수 최능진의 교육활동과 민족운동 KCI 등재
숭실대학교 역사문물연구소(구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제55집 2025.12 pp.207-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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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체육과 교육을 매개로 민족의 역량을 길러내고자 했던 근대 지식인 최능진의 생애와 사상을 고찰하였다. 기존 연구가 주로 한국전쟁기 국가폭력이 낳은 왜곡의 한 사례로 다뤄진 데 반해 본 연구는 식민지 시기 ‘체육인’ 최능진의 생애 전반기와사상적 기반을 고찰함으로써 그의 해방 후 행보가 식민지 시기부터 축적된 정체성과 실천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최능진은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 중국 난징 금릉대학에서 민족주의 사상을 접하고,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6년 스프링필드 국제청년회대학(International YMCA College)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 흥사단, 청년혈성단 등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실천하였고, 체육을 도덕 수양과 독립의 기초로 인식하였다. 1929년 귀국 후 숭실전문학교 체육교수로 부임한 그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체육전공자로서 축구·농구,·수영 등 근대 스포츠를 교육 현장에 체계화하였다. 특히 숭전 축구팀 코치로서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었으며, 전평양군 코치를 맡아 경평축구전에서 활약하는 등 관서체육회 임원 및 심판으로 활동하며 지역 체육 보급과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동우회 기관지 동광에 꾸준히 기고하며 자신의 체육 사상과 교육관을 대중에게 피력하였다. 그의 민족운동은 미국 유학 시절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시작되었다. 1919년에는 미주 한인 청년들과 함께 무력 투쟁을 포함한 적극적인 독립 대사업을 목표로 하는 청년혈성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서기로서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했다. 귀국 후 1930년에는 안창호의 이념을 계승한 동우회에 가입하여 실력양성운동을지속하였다. 그는 1933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동우회 동지들과 협력하여 사업가로 전향하였는데, 이는 안창호의 노선에 따라 교육 사업보다 경제 사업을 통한 민족 자강과 실천적 독립 기반 확충을 모색한 결과로 보인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겪었으며 일제의 강요 속에서 전향을 표명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최능진의 일생은 체육과 교육, 신앙과 실천을 통해 강건한 개인과 자주적 민족을 구현하고자 한 근대 지식인의 행보였다.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을 주장한 그의 행보는 식민지 시기부터 일관된 ‘민족의 자주’라는 신념의 표현이었으며, 그의 사상과 행적은 식민지기와 해방 이후를 관통하는 연속선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This paper examines the life and thought of Choi Neung-jin, a modernintellectual who sought to build national capacity through physical education andschooling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Moving beyond portrayals that focus ondistortions wrought by Korean War–era state violence, it analyzes Choi’s earlycareer as a “man of sport” to show that his post-liberation course continuedidentities and practices formed in the colonial period. Born in 1899 in Gangseo, Pyongan-namdo, to a Christian landlord family, Choiencountered nationalism at Jinling University in Nanjing, then studied physicaleducation at the International YMCA College (Springfield), graduating in 1926. Through the Heungsadan and Cheongnyeon Hyeolseongdan he linked physicaltraining to moral self-cultivation and independence. Returning in 1929, he becameprofessor of physical education at Soongsil College, systematized modern sports ineducation, coached the Soongsil football team to multiple titles, and helped developregional sport as an officer and referee, while publishing his pedagogical views inDonggwang. His nationalist activism included promoting the Cheongnyeon Hyeolseongdan in1919 and serving as secretary of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s San Franciscochapter. After joining the Donguhoe in 1930, he left academia in 1933 to pursueeconomic enterprise with comrades, aligning with Ahn Chang-ho’s strategy ofself-strengthening; he was arrested in the 1937 Donguhoe Incident and forced to“convert.” Choi’s life aimed at robust individuals and an autonomous nation; hispost-liberation call to purge collaborators reflected a consistent commitment tonational autonomy, warranting reassessment across colonial and post-liberationcontexts.
1920년대 한일 이상주의 문화운동의 딜레마에 대한 일고찰 - ‘수양동우회’와 ‘新しき村’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NRF 연계] 한국일본어교육학회 일본어교육 Vol.65 2013.09 pp.18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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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年代の世界のパラダイムは理想主義であった。日本と植民地朝鮮も例外ではない。代表的な現象が理想主義的文化運動の胎動である。日本では、武者小路実篤によって 「新しき村」が表われ、朝鮮では李光洙によって 「修養同友会」という民族運動団体が表われた。武者小路実篤と李光洙は、同時代を生きた人物ではあるが、人間的交流をもっているわけではない。それにもかかわらず、類似な文化運動を起こしたということは、何らかの共通した装置が働いていたということになる。この装置がトルストイと夏目漱石である。武者小路実篤と李光洙はトルストイの非暴力思想と、夏目漱石の自己本位的思想を受け入れて、自我完成を成し遂げようとした。将来的には民族あるいは人類の発展に繋がると考えていたのである。問題は自我完成の方式がエリート中心的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武者小路実篤と李光洙は、自らが優れたエリートであった。そのため、彼らの言説は優れた理想ではあったが、現実には寄り付けなかった。彼らは自我完成の資格を文化的エリートに限定して、一般民衆を排除した。自らがもっているエリートの特権意識が働いて現実と理想の衝突を調整できなかっ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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