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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10회 추사의 금석문 : 백파율사비/상산황씨 묘비/효자 김복규 정려비/효자 김기종 정려비/천축고선생댁/소봉래/몽재(夢齋)/전주유씨지묘/백양사불사리탑명(白羊寺佛舍利塔銘)
전라금석문연구회 탁본전시회 도록 蒼巖과 秋史의 拓本 만남전 2009.09 pp.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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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완주군 소앙먼 죽절리 분토동에 있는 전주최씨 제각인 주덕재 좌측 능선 위에 있다. 연촌공 최덕지의 묘소 앞에 있는 이 신도비는 거북의 앞모습만 겨우 나타날 정도의 소박한 거북좌대에 오석의 비신과 날렵한 조각의 옥개형 개석을 갖추었다.1919년에 건립했으며 비문은 간재 전우가 짓고 글씨는 15세손 최원홍이 썼으며 두전은 김학수가 썼다. 언촌공 덕지는 세종조의 인물로 자는 우수 호는 언촌으로 직제학 최담의 넷째아들이다. 1405년(태종5)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대각을 거쳐 일찍 남원부사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의 영보촌에 정자를 짓고 존양(存養)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문종이 즉위하면서 불러 예문관 직제학에 복직하였으나 이듬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물러났다 그 때에 박팽년이 이르기를 ‘선생이 조정에 있어 그 명성과 작위가 이에 그치지 않거늘 이제 전리(田里)에 물러나 이미 세상으로 더불어 상관치 아니한지라 만인의 감탄과 칭송이 많으니 그 사람의 신음에 느끼고 물망을 지는 바에 있지 않고 이에 있도다.’ 라고 하였다. 또 이문질이 말하기를 ‘부귀영화에 다 족히 동심치 않았으며 고풍여운은 족히 써 탐부로 정렴하고 유약한 자로서 서게 한다 하였으며, 세상에 구함이 없고 천명을 즐기며 한 집안에 천고성현을 벗한다.’ 하였다. 그 때 동료 선비들은 새詩)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그의 뜻을 높이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존양사(存養祠)라 하고 제사를 지냈다.
화산서원비는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예수병원 뒤에 있다. 거북좌대에 용문양의 이수를 갖추고 있는 이 비는 조선 현종 5년(1664)에 건립되었으며 1984년 지방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비신의 재질은 흰 대리석이며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특히 비문을 쓴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兩宋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서예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비 또한 금석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대개 비문글씨의 서체는 해서나 예서로 쓰는게 일반적인데 반하여 동춘당은 행서로 쓴 비문이 많이 보인다. 이 비문 역시 양송체의 유려한 행서로 왕희지의 필의가 가미된 수려한 글씨이다. 건립 년대가 오래되고 석질이 약한 탓으로 마모는 되었으나 해독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화산서원은 조선 인조 2년(1624)에 창건된 뒤 현종3년(1662)에 사액(陽額)되었으며 고종6년(1869)에 철폐되었다. 주벽으로 모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전주부윤으로 백성을 다스리는데 도덕과 예로써 하였으며 송인수는 전라도 관찰사로 정사에 청렴하고 숙정하여 풍속을 크게 현양하였다. 원래 이 자리에는 전주향교가 있었으나 교동으로 이전한 후 이곳에 화산서원을 세웠다. 이 화산서원은 전북지방 最古의 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그 자리에 비를 세워 후세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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