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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森有禮(모리 아리노리)の国家主義教育に関する考察
삼유례(모리 아리노리の국가주의교육に관する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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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한국일본교육학회 바로가기
  • 간행물
    한국일본교육학연구 KCI 등재후보 바로가기
  • 통권
    제12권 제2호 (2008.02)바로가기
  • 페이지
    pp.19-36
  • 저자
    이이야마 다케시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74285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원문정보

초록

한국어
모리 아리노리(森有禮:1847-1889)는 戰前의 일본 교육체제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는 1885년(明治18) 이
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내각을 구성하여 총리대신으로 취임했을 때, 초대 문부대신을 지낸 인물로서 국가주의 교육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소년시절에 고향인 사쓰마 번(薩摩藩)과 영국 사이에 소위 「薩英戦争」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사쓰마 번(薩摩藩)으로 하여금 그 때까지의 藩論인 攘夷로부터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開國하고 富國을 만들자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森有禮 역시, 英學을 배우게 되었고, 번이 영국 유학생 파견을 결정하자 그도 그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영국, 러시아, 미국을 거쳐 귀국한 후, 公使로 임명되어 미국에 갔다. 그의 사명은 岩倉使節団의 일원으로 온 유학생들의 감독‧지도와 미국 교육에 대한 조사와 연구였다. 森有礼는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교육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가졌다. 귀국 후, 福沢諭吉들과 明六社를 설립하여 계몽활동을 하였다. 1879(明治12)에 영국에 공사로 파견되어 머물렀을 때도 교육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가 서구의 헌법제도를 공부하러 온 伊藤博文를 파리로 찾아가 헌법 제정후의 교육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이 일이 森有禮가 ‘외교관’에서 ‘교육가’로 변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85년(明治18) 伊藤博文 내각이 성립되자, 森有礼는 초대 문부 대신으로 일본교육을 총괄하게 되었다. 그의 교육정책의 최대 관심사는 교육을 통한 부국강병과 번영이었으며, 그의 교육사상은 교육의 목적을 국가에 둔 「國家主義」를 중심으로 한 교육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국대학령」을 시작으로, 「사범교육령」, 「소학교령」, 「중학교령」 등을 차례로 발표함으로써 국가주의적 교육체제를 확립하고 인재양성을 통한 국력향상과 국가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는 森有禮가 이들 교육령의 시행이야말로 국민의 지력과 체력을 향상시키고 부국강병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국가발전과 번영, 그리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889년(明治22) 2월 11일, 大日本帝國憲法이 반포되는 날, 그의 사상을 의심한 젊은 국수주의자에 의해 42세의 나이로 피살되었다. 그리고 森有禮가 사망한 후, 일본은 1890년(明治23) 「敎育勅語」의 반포에 의해 국민교육에서의 천황의 통솔권 강화와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로, 森有禮가 원하던 외세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한 국가발전과 민족 번영이 아닌 강한 제국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띤 天皇制國家主義로 변질되었다. 결국은 일본은 침략성을 가진 제국주의국가가 되어 망국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일본어
森有禮(1847-1889)は戦前の日本敎育體制を構築した明治時代の代表的教育家だ。彼は1885年(明治18)、伊藤博文が內閣を構成し総理大臣に就任したとき、初代文部大臣を歴任した人物「国家主義教育者」として知られている。彼が少年のときに薩摩藩と英国のあいだに、いわゆる「薩英戦争」が起こった。この戦争は薩摩藩にそれまでの藩論であった攘夷から“強国建設のためには開國して先進文明を学び富國を造ろう”という方向へ転換させるきっかけになった。そのような雰囲気の中で森有禮もやはり藩の英学を学ぶことになった。藩が英国に留学生を派遣することを決定すると彼もその一員に選ばれた。彼は英国、ロシア、米国を経て帰国した後、公使に任命され米国に行くことになった。彼の使命は岩倉使節団の一員として来た留學生たちの監督‧指導と米国の敎育に関する調査と硏究だった。滞在中、森有礼は彼に与えられた任務を遂行する中で教育こそが国家発展の重要な要素であるという確信を持った。帰国後、外交官という身分でありながら、福沢諭吉のような民間人との交流も多く、彼らと共に明六社を設立し国民啓蒙のために努力した。1879(明治12)に英國に公事として派遣され滞在したときも、森は教育に対する熱情を失わなかった。ちょうどその時、彼が西歐の憲法制度を勉強しに来ていた伊藤博文をパリに訪ね、憲法制定後の敎育政策について話したことがあった。このことが森有禮が ‘外交官’から‘敎育家’に變身する決定的なきっかけとなった。それは伊藤博文は森との対話をとおし、森こそが伊藤の構想する国家建設に必要な人物だと判断したからだった。そして1885年(明治18)に伊藤博文內閣が成立すると、森有礼は伊藤により初代文部大臣に任命され日本敎育を總括するようになった。森の敎育政策の最大の目標は敎育を通した富國强兵と繁榮で、その敎育思想は敎育の目的を國家に置く「國家主義」を中心とした敎育だったということだ。彼は「帝國大學令」をはじめ、「師範敎育令」、「小學校令」、「中學校
令」などを相次いで発布することによって國家主義的敎育體制を確立し、人材の育成を通じた國力
向上と國家發展を成し遂げようとした。これは森有禮がこれらの敎育令の施行こそが、國民の知力
と體力を向上させ富國强兵を窮極的な目標とする國家發展と繁榮、さらに國際社會での地位向上
を可能にする道だと考えたからだ。しかし、彼は1889年(明治22)2月11日、大日本帝國憲法が頒
布される当日、森の思想に不審を抱く若き國粹主義者によって42歲の短い生涯を終えた。
 森有禮が死亡した後、日本は1890年(明治23)の保守反動勢力が主導によってつくられた「敎育
勅語」の頒布で、國民敎育における天皇の統率權强化と軍部の政治的影響力が增大し森有禮が
願った欧米列強からの獨立を守るための國家發展と民族の繁榮ではなく強い帝國主義的性向を強
く帯びた天皇制國家主義に変質した。そして結局、日本は侵略主義的帝國主義國家になり破局
への道を進んだ。

저자

  • 이이야마 다케시 [ 일어일문학과 조교수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한국일본교육학회 [The Korea Society of Japanology, Japan Education Division Seoul, Korea]
  • 설립연도
    1985
  • 분야
    인문학>일본어와문학
  • 소개
    한국일본교육학회는 1985년 2월 27일, 한국과 일본의 교육학 연구의 정립과 발전을 목적으로 그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은 이래 지금까지 양국 교육학의 이해에 많이 기여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학 전공학자는 수천 명에 이르고 있으며, 전공의 다양성은 물론, '지역연구'의 영역 또한 매우 광범위하게 펼쳐 있다. 우리나라 교육학의 외연을 살찌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되도록 수많은 지역과 나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교육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지역교육연구의 현실은 그 지역의 다양성과 교육학적 이해에 있어서 매우 척박한 실정이다. 이런 부진한 지역연구의 현실 속에서 본 학회는 아시아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교육' 연구에 초점을 두고,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교육학계에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간행물

  • 간행물명
    한국일본교육학연구 [韓國日本敎育學硏究]
  • 간기
    반년간
  • pISSN
    1229-8581
  • 수록기간
    1996~2020
  • 등재여부
    KCI 등재
  • 십진분류
    KDC 370 DDC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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