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아리노리(森有禮:1847-1889)는 戰前의 일본 교육체제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는 1885년(明治18) 이 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내각을 구성하여 총리대신으로 취임했을 때, 초대 문부대신을 지낸 인물로서 국가주의 교육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소년시절에 고향인 사쓰마 번(薩摩藩)과 영국 사이에 소위 「薩英戦争」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사쓰마 번(薩摩藩)으로 하여금 그 때까지의 藩論인 攘夷로부터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開國하고 富國을 만들자는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森有禮 역시, 英學을 배우게 되었고, 번이 영국 유학생 파견을 결정하자 그도 그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영국, 러시아, 미국을 거쳐 귀국한 후, 公使로 임명되어 미국에 갔다. 그의 사명은 岩倉使節団의 일원으로 온 유학생들의 감독‧지도와 미국 교육에 대한 조사와 연구였다. 森有礼는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면서 교육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가졌다. 귀국 후, 福沢諭吉들과 明六社를 설립하여 계몽활동을 하였다. 1879(明治12)에 영국에 공사로 파견되어 머물렀을 때도 교육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가 서구의 헌법제도를 공부하러 온 伊藤博文를 파리로 찾아가 헌법 제정후의 교육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이 일이 森有禮가 ‘외교관’에서 ‘교육가’로 변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85년(明治18) 伊藤博文 내각이 성립되자, 森有礼는 초대 문부 대신으로 일본교육을 총괄하게 되었다. 그의 교육정책의 최대 관심사는 교육을 통한 부국강병과 번영이었으며, 그의 교육사상은 교육의 목적을 국가에 둔 「國家主義」를 중심으로 한 교육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국대학령」을 시작으로, 「사범교육령」, 「소학교령」, 「중학교령」 등을 차례로 발표함으로써 국가주의적 교육체제를 확립하고 인재양성을 통한 국력향상과 국가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는 森有禮가 이들 교육령의 시행이야말로 국민의 지력과 체력을 향상시키고 부국강병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국가발전과 번영, 그리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889년(明治22) 2월 11일, 大日本帝國憲法이 반포되는 날, 그의 사상을 의심한 젊은 국수주의자에 의해 42세의 나이로 피살되었다. 그리고 森有禮가 사망한 후, 일본은 1890년(明治23) 「敎育勅語」의 반포에 의해 국민교육에서의 천황의 통솔권 강화와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로, 森有禮가 원하던 외세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한 국가발전과 민족 번영이 아닌 강한 제국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띤 天皇制國家主義로 변질되었다. 결국은 일본은 침략성을 가진 제국주의국가가 되어 망국의 길을 가게 되었다.
한국일본교육학회 [The Korea Society of Japanology, Japan Education Division Seoul, Korea]
설립연도
1985
분야
인문학>일본어와문학
소개
한국일본교육학회는 1985년 2월 27일, 한국과 일본의 교육학 연구의 정립과 발전을 목적으로 그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은 이래 지금까지 양국 교육학의 이해에 많이 기여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학 전공학자는 수천 명에 이르고 있으며, 전공의 다양성은 물론, '지역연구'의 영역 또한 매우 광범위하게 펼쳐 있다. 우리나라 교육학의 외연을 살찌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되도록 수많은 지역과 나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교육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지역교육연구의 현실은 그 지역의 다양성과 교육학적 이해에 있어서 매우 척박한 실정이다. 이런 부진한 지역연구의 현실 속에서 본 학회는 아시아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교육' 연구에 초점을 두고,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교육학계에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