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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대학당에서 국립북경대학으로, 1898~1919
From Jingshi Daxuetang to National Peking University: 1898–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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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전북사학회 바로가기
  • 간행물
    전북사학 KCI 등재 바로가기
  • 통권
    제77호 (2026.07)바로가기
  • 페이지
    pp.287-317
  • 저자
    손성욱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489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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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article examines the transformation of Peking University from the founding of Jingshi Daxuetang (京師大學堂) in 1898 to the reforms of Cai Yuanpei (蔡元培) in 1919, tracing its shift from an imperial daxuetang to a national university of the Republic. Amid the crisis consciousness produced by China’s defeat in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Hundred Days’ Reform, Jingshi Daxuetang was conceived as a core institution for imperial reform. Yet the financial difficulties, debates over closure and institutional merger, and conflicts over academic culture that unfolded in the early Republican period revealed that state ownership alone could not secure the substantive meaning of a “national” university. After 1917, Cai Yuanpei advanced the ideal of a research-oriented university and the principle of autonomy for the academic community. This vision resonated with earlier concerns and became the basis for further developing the identity of the national university. In this process, the Red Building (Honglou, 紅樓) became a space where administration, scholarship, and student self-governance converged, as well as a symbol in which the new aspirations of the republican university were condensed. The transition from daxuetang to national university was neither a mere change of name nor a sudden rupture. Rather, it was a long-term process of transformation formed through the overlap of late Qing visions of imperial reform, early Republican institutional crises, and the discourse of university autonomy that emerged after Cai Yuanpei’s reforms.
한국어
이 글은 1898년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의 창설부터 1919년 채원배(蔡元培) 개혁에 이르는 시기, 북경대학이 제국의 대학당에서 공화국의 국립대학으로 변모한 과정을 고찰한다. 청일전쟁의 패배가 불러온 위기의식 속에서 대학당은 제국 개조의 핵심 기구로 구상되었다. 그러나 신해혁명 이후 민국 초기의 재정난, 폐교와 통폐합 논의, 학풍을 둘러싼 갈등은 국가가 관할한다는 사실만으로는 ‘국립’의 실질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냈다. 1917년 이후 채원배는 연구 중심 대학의 이상과 학문 공동체의 자율성 원칙을 제시했으며, 이는 이전 시기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 국립대학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홍루(紅樓)는 행정·학술 활동과 학생 자치가 결합된 공간이자, 공화국 대학의 새로운 지향이 응축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대학당에서 국립대학으로의 이행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었으며, 단절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 말기의 국가 개조 구상, 공화국 초기의 제도적 위기, 그리고 채원배 개혁 이후의 대학 자율 담론이 서로 중첩되며 형성한 장기적 전환 과정이었다.

목차

I. 들어가며
II. 제국의 황혼, ‘대학’의 탄생: 경사대학당(1898∼1911)
III. 민국 초기 ‘국립’ 대학의 위기와 모색(1912∼1916)
IV. 蔡元培의 개혁과 신문화 ‘홍루’(1917∼1919)
V. 나가며
<국문초록>

<참고문헌>

저자

  • 손성욱 [ Son, Sung-Wook | 국립창원대학교 사학과 부교수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전북사학회 [The Jeonbuk Historical Society]
  • 설립연도
    1977
  • 분야
    인문학>역사학
  • 소개
    본 학회는 "역사학의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이바지한다"는 목표하에 도내의 역사학자들을 주축으로 1976년에 창립된 이래 30년 이상의 연륜을 이어온 정통 역사학회이다. 수차례의 학술대회를 개최하였을 뿐 아니라, 학술지 '전북사학'을 30호까지 발간하면서 지역 사학 발전의 토대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 학회는 현재 약 24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으며, 격월로 임원회의와 월례발표회를 개최하고 있다. 매 발표회에 실제로 참여하는 인원이 항상 30명이 넘는다. 대부분의 역사관련 학회가 주로 대학교수나 강사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전북사학회는 대학교수, 강사는 물론 학예사, 연구원, 중등학교 역사담당교사 등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대학에서 연구한 역사학에 관한 이론을 중등학교 교육 현장에 올바로 적용하여 이론과 실제를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 향후 전북사학회의 지향점이다.

간행물

  • 간행물명
    전북사학 [JEONBUK SAHAK ; The Jeonbuk Historical Journal]
  • 간기
    연3회
  • pISSN
    1229-2001
  • 수록기간
    1977~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십진분류
    KDC 911 DDC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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