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erable Manam Jongheon(1876-1957) was born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and lived through the Korean Empire, Japanese occupation, and the devastation of the Korean War. He could have stayed in the mountains and lived as nobly as a crane, but he didn't. He traveled back and forth between the world and the sacred, and lived a long life full of hard work for the sake of combat and sangha harmony. Venerable Manam appears in the form of a multi-faceted Buddha. He was a governor who fought to preserve national cultur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and he was the founder of a large temple in a decade on a site that had fallen into ruins. He was an educator who founded a modern school, Gwangsunguisook, and promoted the Buddhist Preparatory School to the Central Buddhist College; a president who practiced meditation and farmed alongside the masses; an inheritor of traditional Buddhism who led the 'GoBulChongrim(古佛叢林)' movement to clean up the remnants of Japan and establish a comprehensive system of Zen and doctrine; and an outstanding sangha leader who maintained a thoroughly public attitude for the development of the sect and the unification of the Sangha. As such, Manam's life and thought can be used as a rudder to set the coordinates of Korean Buddhism. However, there are some details in books and articles about Manam that can lead to errors and confusion. The date of his death is one of them. We examined the current situation and reasons for the discrepancies in the date of the monk's death in encyclopedias, books, and articles, and suggested that the date of Manam's death should be written as "January 16, 1957" instead of "December 16, 1956" to reduce confusion in the long run. Regarding Manam's surname, several researchers have examined why it should be spelled 曼庵 rather than 蔓庵, even though it is often transcribed as 蔓庵. They concluded that while it is clear that the surname Man-am originated from Chu-sa's writing, the anecdote of Chu-sa's giving the surname to Monk Baekpa is most likely not true, and that Manam began using the surname when he returned to Baekyangsa Temple in 1909. In addition, Manam's practice of ‘bansenbannong(伴禪半農)’ began with the reconstruction of Baekyangsa Temple in the late 1910s and may have preceded that of Yong-sung, the monk whose academic name is known as the originator of ‘bansen-bannong’, which systematizes the parallelism of practice and work. Regarding Manam's teacher monk, Regarding Manam's teacher, Dojin, a brief life trajectory was presented through inscrip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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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암종헌(曼庵宗憲, 1876~1957) 스님은 조선왕조가 막바지로 치닫던 시 대에 태어나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강산 을 온전히 끌어안고 살았다. 산중에 편안히 머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아 도 되었겠지만 끝내 그러지 않았다. 세간과 출세간을 오가는 일을 마다하 지 않았고, 전법과 승가화합을 위해 노고로 가득한 긴 생애를 묵묵히 걸어 갔다. 만암 스님은 다면불(多面佛)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제 침략기에 맞서 민족문화를 지켜내려 애쓰던 지사였고, 폐허나 다름없이 퇴락한 터에 10년 만에 대가람의 위업을 이룬 중창주였다. 근대적 학교인 광성의숙을 설립하 고 불교전수학교를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시킨 교육자였으며, 대중들과 농사를 짓고 ‘이뭣고’ 화두에 매진한 반선반농(半禪半農)의 대선사였다. 고 불총림 결사를 진행해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선과 교를 함께 닦는 종합도 량으로 일신한 전통불교의 계승자였으며, 종단 발전과 승가화합을 위해 철 저히 공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뛰어난 승단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만암 스님의 삶과 사상은 한국불교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에 있어 방향키 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암 스님과 관련한 책과 논문들에 오류나 혼란을 초래할 수 있 는 부분들이 있다. 스님의 입적 날짜도 그중 하나다. 스님의 입적 날짜가 백과사전과 저술, 논문 등에서 불일치하고 있는 현재 상황과 원인을 살펴 보고, 만암 스님의 입적 날짜를 ‘1956년 12월 16일’이 아니라 ‘1957년 1월 16일’로 통일해 표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혼란을 줄이는 방법으로 제안 했다. 만암 스님의 법호와 관련해서는 여러 연구자가 蔓庵으로 표기하고 있으 나 蔓庵이 아니라 曼庵으로 표기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또 만암이 라는 법호는 추사의 글씨에서 유래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추사가 백파 스 님에게 건넨 법호라는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며, 만암 스님이 법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9년 해인사에서 백양사로 돌아오면서부터 일 것으로 추정했다. 또 만암 스님의 반선반농 실천은 1910년대 후반 백양사 중창불사와 함께 시작됐으며, 반선반농(선농불교)의 효시로 알려진 학명 스님, 용성 스님 보다 이른 시기일 것으로 보았다. 만암 스님의 은사 취운도진 스님과 관련 해 비문 내용과 진영을 통해 구체적인 행장을 처음 소개했다.
목차
한글요약 Ⅰ. 들어가는 말 Ⅱ. 만암 스님 입적, 1956년인가 1957년인가? Ⅲ. 법호 曼庵을 둘러싼 문제들 1. 曼庵인가 蔓庵인가? 2. ‘만암’ 법호는 정말 백파와 관련이 있나? 3. ‘만암’법호를 사용한 시기는 언제인가? Ⅳ. 만암 스님은 근대 반선반농의 효시가 될 수 없나? Ⅴ. 은사 취운도진 선사는 누구인가? Ⅵ. 나가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고타마 싯다르타가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은 현세에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와 고통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의 인식이 그의 깨달음이었으며, 그 깨달음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그의 가르침이요 실천행이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불교인에게 있어서의 궁극 목표인 열반은 탈(脫)사회의 경지가 아니며, 자주(自主), 자율(自律), 자유(自由)의 인격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개인적 완성인 열반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부처님의 실천행이었고, 그 결실이 승가 사회였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은 이미 역사상 정토(淨土)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 행태에 있어서 기복적 신앙으로 치우침으로써 그 본의가 침체된 면이 없지 않다. 이에 우리는 자주, 자율, 자유라는 인류의 이상적 인격을 완성해 가듯이 자유, 평등의 사회를 구현해 가는 것이 정토를 이루는 길임을 재인식하고,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연구와 능동적 실천을 위해 "한국정토학회"를 결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개개인의 불교적 인격완성이 저절로 정토를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안이함을 경계하며, 부처님의 이타적 노력을 교훈 삼아, 사회의 제반 문제를 불교적 입지에서 해결하는데 일익을 도모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윤리, 예술, 사회 등의 제반 분야도 당연히 우리의 관심 영역이 된다.
결국 우리의 취지는 불교 교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정토 실현의 현실적 실천방도를 모색하자는 것이며, 당시대에 요구되는 불교의 실천성을 회복함으로써 불교가 정신적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할 대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학문의 활동을 정토에로 승화시켜서 인류 이상(理想)의 구현에 이바지 하고자 함이니, 이것이 우리의 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