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Dynasty put forward the national management principle of worshiping Confucianism and suppressing Buddhism, but the early kings continued the buddhist tradition and culture centered on the temples in Seoul. On Buddha's birthday, the streets of Seoul were filled with lotus lanterns, centered on Heung-cheonsa Temple, Heung-boksa Temple, Ji-cheonsa Temple, and Heung-deoksa Temple. In addition, during national crises such as drought or epidemics, buddhist rites were held at temples to pray for rain, amphibious rites, parading sutras, and to ward off disasters. However, the prevalence of Hanyang Buddhism did not exceed 100 years. Starting with Ji-cheonsa Temple, all temples in Seoul disappeared after the Yeon-sangun Dynasty(1494-1506). Buddhist rites such as prayer for rain, Suryukjae, parading sutras, and lotus lanterns that were performed based on temples all disappeared. The disappearance of temples in Seoul continued for nearly 400 years until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the aspects of Buddhism in Seoul during the reigns of King Yeong-jo(1724-1776) and King Jeong-jo(1776-1800), when these temples disappeared. First of all, I understood what Yeong ⋅Jeongjo's stance was on Buddhist paper manufacturing in this era and various other compulsory labors. Next, Buddhism in the era of King Jeong-jo was examined through the buddhist books of the Kyujanggak and the establishment of Yongju-sa Temple. In addition, various aspects of buddhism in Seoul in the era when there were no temples were examined through various geography and map temples, buddhism observed by foreigners, and donation activities of Seoul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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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신왕조의 운영 기조를 숭유억불로 내세웠으나 초기의 국왕들은 한양의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 전통과 문화를 지속하였다. 도성 안에는 흥 천사와 흥복사, 지천사, 그리고 흥덕사 등을 중심으로 초파일 때면 거리마 다 연등이 넘실댔다. 가뭄이나 전염병 등의 국가적 위기에는 사찰에서 기 우제와 수륙재, 경행, 그리고 재난을 물리치기 위한 소재도량을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양 불교의 성행은 불과 1백 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지 천사를 시작으로 폐사가 시작되어 연산군대(1494~1506) 이후에는 한양의 모든 사찰이 사라졌다. 사찰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던 기우제와 수륙재, 경 행과 연등 등의 불교 행사는 모두 사라졌다. 이와 같은 한양의 무사찰시대 는 19세기말까지 거의 4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본 고는 이러한 무사 찰시대, 영⋅정조시대(1724~1800)의 한양 불교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영⋅정조시대의 불교를 사찰의 지역(紙役)을 통해 영⋅정조의 입장이 어떠했는가를 이해하였다. 이어 정조시대의 불교를 규장각의 불서와 용주 사 창건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각종 지리지와 지도의 한양 사찰, 외 국인들의 본 한양 불교, 그리고 한양민들의 시주활동을 통해 사찰이 없었 던 시대의 한양불교 모습을 고찰하였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조선의 불교는 유물로만 명맥을 유지할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양은 장안사를 비롯한 사찰들의 중요한 시주처였다. 지방에서 승도가 권선문을 들고 한양에 찾아와 시주를 구하면 한양민들은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사찰과 승도가 사라진 현실이 었지만 한양의 불교 전통과 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목차
한글요약 Ⅰ. 머리말 Ⅱ. 영⋅정조시대의 불교 1. 사찰의 지역(紙役) 2. 규장각의 불서 3. 용주사의 창건 Ⅲ. 영⋅정조시대 한양의 불교 1. 지리지와 지도의 한양 사찰 2. 외국인들이 본 한양 불교 3. 한양민들의 시주활동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고타마 싯다르타가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은 현세에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와 고통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의 인식이 그의 깨달음이었으며, 그 깨달음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그의 가르침이요 실천행이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불교인에게 있어서의 궁극 목표인 열반은 탈(脫)사회의 경지가 아니며, 자주(自主), 자율(自律), 자유(自由)의 인격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개인적 완성인 열반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부처님의 실천행이었고, 그 결실이 승가 사회였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은 이미 역사상 정토(淨土)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 행태에 있어서 기복적 신앙으로 치우침으로써 그 본의가 침체된 면이 없지 않다. 이에 우리는 자주, 자율, 자유라는 인류의 이상적 인격을 완성해 가듯이 자유, 평등의 사회를 구현해 가는 것이 정토를 이루는 길임을 재인식하고,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연구와 능동적 실천을 위해 "한국정토학회"를 결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개개인의 불교적 인격완성이 저절로 정토를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안이함을 경계하며, 부처님의 이타적 노력을 교훈 삼아, 사회의 제반 문제를 불교적 입지에서 해결하는데 일익을 도모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윤리, 예술, 사회 등의 제반 분야도 당연히 우리의 관심 영역이 된다.
결국 우리의 취지는 불교 교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정토 실현의 현실적 실천방도를 모색하자는 것이며, 당시대에 요구되는 불교의 실천성을 회복함으로써 불교가 정신적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할 대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학문의 활동을 정토에로 승화시켜서 인류 이상(理想)의 구현에 이바지 하고자 함이니, 이것이 우리의 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