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dissertation is focused on the contents of the history of China. China's Yeombulson succeeded and developed from four perspectives. The first emphasizes only yeombul. Being biased against yeombul, only yeombul is the son, and yeombul is a form of sonyeom(禪念) union that is connected with damran(曇鸞) and dojak(道綽), sundo(善導), seungwon(承遠) and bubjo(法照), which are the forms of bargaining between yeombul and son. The second is the form of fusion. Yeosan-Hyewon and Jamin-Samjang, and sonyeom of Musang(無相) and Eynsoo(延壽), who have not yet clearly presented the actual method of practice, and insist that there is no contradiction between son and yeombul, and encourage son and yeombul to be double-numbered. In the form of sonyeom fusion(禪念融合), it is a combination of magnetic and other forces. In particular, for Jeong joong mu sang's Inseongyeombul and Yeombulson, the public missionaries by linking musangogeongjun and oheiyeombul as the content to be carried out along with the convergence of the three Gey-Jeong-Hye(戒定慧) Samhak to the Inseongyeombul and fulfilling them as the passion of ignorance(無念). From early evening to dawn in which the water consciousness and the process of practice are carried out together, the son-like thought of ogeongjun(五更傳) was added, and the process of acquiring the songs of the general public at that time by linking them to Inseongyeombul(引聲念佛) was reviewed. The third is the form of chamguyeombul(參究念佛). In other words, ‘Who is the yeombul?’ is a method of practicing by combining yeombul with the son in the same way as the buzzword. This is, in fact, like hwadoo chamgoo(話頭參究),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yeombul's faith in the form of yeombul chamgoo, which is biased toward son excluding yeombul. Fourth is a complete fusion form in which yeombul and son coincide. This is a cheguyeombul(體究念佛) in the form of a complete sonYam match, saying that it is safe to practice yeombul and to take care of the son from the viewpoint of ‘yeombul is the son and son is yeombul’. This is the Yambulson pursued by Musang, Geumta, and Cheonghwoa Cheonghwa.
한국어
본 논문은 중국의 전적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중국의 염불선은 네 가지 관점에서 계승하고 발전하였다. 첫째는 오직 염불만을 강조한다. 염불에 편향하여 오직 염불이야말로 바로 선이고 염불이라고 둘을 닦는 염불과 선의 교섭형태인 담란과 도작, 선도, 승원과 법조로 이어진 선염교섭(禪念交涉)의 형태다. 둘째는 융합하는 형태다. 아직 뚜렷하게 실제의 수행방법을 제시하지는 않고 뭉뚱그려서 선과 염불에 모순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여 선과 염불을 쌍수(雙修)하도록 독려하는 여산혜원과 자민삼장, 무상과 연수의 선염겸수(禪念兼修)의 선염융합(禪念融合)의 형태로 자력과 타력이 조합한 것이다. 특히 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염불선에 대해서는 계정혜(戒定慧) 삼학이 인성염불로 수렴되어 무념(無念)의 정념(正念)으로 관철됨과 함께 수행할 내용으로 무상오경전과 오회염불을 관련지어 대중포교인 수계의식과 수행 과정을 함께 진행되는 초저녁에서 새벽까지 오경전의 선적인 사상을 가미해서 당시 일반 대중의 속요인 노랫가락을 인성염불에 결부시켜 체득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셋째는 참구염불(參究念佛)의 형태다. 즉,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참구함은 화두참구와 같은 방식으로써 염불을 선에 결합시켜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사실 염불을 배제한 선에 치우친 염불화두의 형태로 염불의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화두 참구와 같은 것이다. 넷째는 염불과 선이 일치하는 완전한 융합형태다. 이는 ‘염불이 바로 선이고 선이 바로 염불’이라는 관점에서 염불을 수행해도 무방하고 선을 참구해도 무방하다는 완전한 선염일치(禪念一致) 형태의 체구염불(體究念佛)이다. 이것이 바로 무상과 금타, 청화가 추구한 염불선이다.
목차
한글요약 Ⅰ. 시작하는 말 Ⅱ. 중국불교 전적에 나타난 염불선의 계승발전 1. 교가(敎家)의 선염교섭(禪念交涉) 2. 선가(禪家)의 선염융합(禪念融合) 3. 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염불선 4. 염불선의 계승발전 Ⅲ. 끝맺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고타마 싯다르타가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은 현세에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와 고통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의 인식이 그의 깨달음이었으며, 그 깨달음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그의 가르침이요 실천행이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불교인에게 있어서의 궁극 목표인 열반은 탈(脫)사회의 경지가 아니며, 자주(自主), 자율(自律), 자유(自由)의 인격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개인적 완성인 열반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부처님의 실천행이었고, 그 결실이 승가 사회였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은 이미 역사상 정토(淨土)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 행태에 있어서 기복적 신앙으로 치우침으로써 그 본의가 침체된 면이 없지 않다. 이에 우리는 자주, 자율, 자유라는 인류의 이상적 인격을 완성해 가듯이 자유, 평등의 사회를 구현해 가는 것이 정토를 이루는 길임을 재인식하고,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연구와 능동적 실천을 위해 "한국정토학회"를 결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개개인의 불교적 인격완성이 저절로 정토를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안이함을 경계하며, 부처님의 이타적 노력을 교훈 삼아, 사회의 제반 문제를 불교적 입지에서 해결하는데 일익을 도모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윤리, 예술, 사회 등의 제반 분야도 당연히 우리의 관심 영역이 된다.
결국 우리의 취지는 불교 교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정토 실현의 현실적 실천방도를 모색하자는 것이며, 당시대에 요구되는 불교의 실천성을 회복함으로써 불교가 정신적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할 대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학문의 활동을 정토에로 승화시켜서 인류 이상(理想)의 구현에 이바지 하고자 함이니, 이것이 우리의 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