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일체유부는 객관 대상에서 인식의 조건을 찾았다. 경량부는 외경을 추리에 의해 요청하였고 유식학파는 연속하는 마음의 흐름에서 지각의 조건을 구했다. 설일체유부는 외경 실재론으로서 무형상지식론으로 대표되며 경량부와 유식학파는 인식 주관에 관해 논의하는 유형상지식론의 입장에 서있다. 그런데 외적인 대상의 존재성을 부정해서 인식 주관만을 인정하는 인식 실재론의 유식학파의 경우 인식이 어떤 계기로서 생기하는가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그 문제를 해소하는 이론으로서 유식학파는 종자의 공능이라는 개념을 설정한다. 짠드라끼르띠는 공능에 관한 비판에서 인식 발생에 있어서 대상이 있는가 없는가를 논증하지는 않는다. 그는 공능이 성숙하는가 성숙하지 않는가를 바탕으로 논의하고 있다. 짠드라끼르띠는 상대의 논리에 즉해서 논지를 전개한다. 그는 부정의 형식을 통해 인식상의 혼돈만을 배격한다. 혼돈이란, 비유하자면 실재하지 않는 머리카락과 같아서, 배격되어도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설적이지만 혼돈이 언어에서 기인했어도 언어에 의해서 혼돈은 배격될 수 있다. 그것을 배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무자성이다. 이 말은 단지 실체론의 크기에 비례하는 ‘그림자’처럼 실체적인 이해가 사라지면 그 기능도 없어진다. 그래서 무자성은 자립적으로 성립하는 이론이 아니다. 이상의 논의는 설일체유부에서 경량부를 거쳐 유식학파까지 연속하는 인식론의 전개와 발전을 거친 결과물이다. 그리고 유식학파 비판은 바바비베카와 다르마팔라의 공(空)・유(有) 논쟁을 잇는 두 번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논쟁으로서 중관학파의 견해를 최고의 견해로 위치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즉 자성 없는 대상과 인식, 대상과 인식의 상호 의존은 짠드라끼르띠의 인식에 관한 입장이다. 이것은 그의 견해라기보다는 나가르주나의 중관 전통의 회복이라고 부르는 편이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