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는 왕양명과 같이 주자의 영향으로 이단으로 인식되었다. 순자가 이단으로 된 단초는 양웅과 한유에서 비롯된다. 그들 이전에 순자는 오히려 직하의 좨주로서 장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공자의 제자를 대표했다. 맹자가 양주와 묵적에 비판을 가하였지만 그것은 동문 유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순자의 비판은 다른 학파만이 아니라 유가 자신에 대한 것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자사와 맹자의 죄’(思孟之罪)라는 표현이다. 양웅은 순자를 ‘같은 집이지만 방이 다르다’(同門而異戶)고 보았고, 한유는 맹자가 공자의 도를 재인식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후 한유는 양웅이 일찍이 맹자를 존숭한 것을 알아차리고는 양웅조차 추존한다. 주자는 한유가 양웅을 존경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동중서의 독존유술의 길을 따르지만,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지는 길이 적자라는 점은 완전히 받아들였다. 만일 한유의 진면목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전당서』를 따르고 『후당서』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후당서』는 송유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주자학은 한국에서 ‘성리학’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크게 보면 ‘심학’인데, 심학은 ‘심이 곧 리’(心卽理)인 양명학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은 주자의 예악(『朱子家禮』: 金麟厚, 『家禮考誤』(1550年代末); 李滉, 『家禮講錄』/『家禮註解』(1570年左右); 宋翼弼, 『家禮註說』(1590年左右); 金長生, 『家禮輯覽』 등등)을 발전시켰다. 예학은 주자 이상의 현실화였다. 따라서 주자학은 또한 ‘예학’으로 정의될 수 있다. 알다시피 순자학이 곧 예학이다. 모종삼과 같은 현대중국학자는 주자의 심에는 선하지 않은 부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주자가 맹자가 아닌 순자를 따르고 있다고 본다. 한국의 유학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조선유학이 예학 쪽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떠올린다면 연결고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순자의 권학은 기승전결 네 단계로 나뉜다. 첫째(起), 사람이 왜 배우는가? 군자가 되기 위해 배우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둘째(承), 무엇을 배우는가? 예를 익힌다. 셋째(轉), 책이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한가? 사람이 경전보다 더욱 중요하다. 넷째(結), 무엇이 배움의 결과인가? ‘지조 있는 덕’(德操)과 ‘고귀한 생명완성’(貴全)이다. 순자의 권학론은 공자와 매우 비슷하다. 뽐내지 않기(不傲), 숨지 않기(不隱), 소경 되지 않기(不瞽)가 그것인데, 이것은 ‘뽐냄’(傲)이 ‘바쁨’(躁)으로 되어있을 뿐, 『논어』가 말하는 군자의 세 허물(三愆)과 같다. 그는 유학의 종지에서 벗어나지 않을뿐더러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군자를 이루자고 주장한다. 순자는 동문 유가를 ‘거지 유가’(陋儒: 고루한 유가)나 ‘엉터리 유가’(散儒: 허튼 유가), 그리고 ‘속된 유가’(俗儒)나 ‘천한 유가’(賤儒)로 비난하는 바람에 공자학에 반하는 태도로 오해되었을 뿐이다. 청말 장태염은 맹자를 비판하고 순자를 유학의 종주로 부흥시키고자 했다. 강유위는 공자의 사상을 제도개혁론으로 여기는데, 이점은 순자와 상통한다. 많은 학자들이 순자와 맹자 두 사람은 마치 성악의 칸트나 성선의 루소와 같이 서있는 곳은 다르지만 끝은 같다고 말한다. 순자의 주요관심은 예의 왕국의 건설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본성보다 사물의 이치가 더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