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umsansa Temple is a 1,400-year-old famous temple. Through this long history, Geumsansa has played many roles throughout Korean Buddhism, and has produced many monks who have deep relationships with the temple. In particular, Jin Pyo was a monk who was later revered as the founder of the Geumsansa Temple by carrying out a massive Buddhist ritual from 762 to 766. Jin Pyo is a monk who lived in the period when the development of Silla school Buddhism reached its peak. But he did not leave a single writing. Nevertheless, the research on Jin Pyo has already reached a considerable amount, and his Jumchal method has been receiving much attention until recently as an axis of the investigation of Jumchal juristic society. This paper was written with the purpose of examining Jin Pyo’s implementation of the Geumsansa Jumchal Buddhist ceremony and its succession. First of all, in Chapter II, the paper tried to summarize the contents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Geumsansa Temple, and the related matters. Geumsansa aims to see that since the seventh century, before Jin Pyo annotated, he was already shooting as a ‘broad minded scholar‘. In chapter Ⅲ, the contents related to the enlightenment process and the Jumchal law of the truth were examined. The core of “Jin Pyo Buddhism” lies in popular edification, which he used as a means for popular edification. Jin Pyo first opened the Jumchal Buddhist Ceremony in Geumsansa, and later went on to spread this law around the country. Lastly, in Chapter IV, the paper tried to examine the succession issue of the Real Examination and Buddhist Ceremony. Jin Pyo’s Jumchal law can be seen to be inherited steadily even after the Goryeo Dynasty, but it was not handed down actively in Geumsansa. The paper sought to find the cause of this phenomenon in the change of shooting in Geumsansa, and the details are mentioned in the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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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는 개산 1,400년을 지난 고찰이자 명찰이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금산사는 한국불교사 전반에 걸쳐 많은 역할을 해왔으며, 금산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고승도 다수 배출하였다. 특히 진표는 762년부터 76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진행함으로써 훗날 금산사 대중에게 실질적 창건주로 추앙받던 고승이었다. 진표는 신라 교학불교의 발전이 정점에 달해 있던 시기를 살다간 고승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단 한 편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표 관련 연구는 이미 상당한 양에 이르고 있으며, 특히 그가 펼친 점찰교법은 점찰법회 연구의 한 축을 이루며 최근까지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 논문은 진표의 금산사 점찰법회 설행과 그 계승 문제를 살펴보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먼저 Ⅱ장에서는 금산사의 창건과 義寂, 順濟 등에 관계된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하였다. 금산사는 진표가 주석하기 이전인 7세기 무렵부터 이미 ‘유식도량’으로서의 사격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이다. Ⅲ장에서는 진표의 교화행과 점찰법회에 관계된 내용을 살펴보았다. ‘진표불교’의 핵심은 대중교화에 있는데, 그가 행한 점찰교법은 대중교화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진표는 금산사에서 점찰법회를 처음 개설하였으며, 이후 전국 각지를 돌며 이 교법을 펼쳐 나갔다. 마지막 Ⅳ장에서는 진표 점찰법회의 계승 문제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진표의 점찰법회는 고려시대 이후에도 꾸준하게 계승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지만, 정작 금산사에서는 활발하게 전승되지 못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금산사의 사격 변화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본문에서 이와 관계된 내용을 상세하게 언급하였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은 현세에 살아가는 인간의 고뇌와 고통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의 인식이 그의 깨달음이었으며, 그 깨달음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그의 가르침이요 실천행이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불교인에게 있어서의 궁극 목표인 열반은 탈(脫)사회의 경지가 아니며, 자주(自主), 자율(自律), 자유(自由)의 인격을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개인적 완성인 열반을 사회화하려는 노력이 부처님의 실천행이었고, 그 결실이 승가 사회였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은 이미 역사상 정토(淨土)사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 행태에 있어서 기복적 신앙으로 치우침으로써 그 본의가 침체된 면이 없지 않다. 이에 우리는 자주, 자율, 자유라는 인류의 이상적 인격을 완성해 가듯이 자유, 평등의 사회를 구현해 가는 것이 정토를 이루는 길임을 재인식하고,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연구와 능동적 실천을 위해 "한국정토학회"를 결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개개인의 불교적 인격완성이 저절로 정토를 이루게 할 것이라는 안이함을 경계하며, 부처님의 이타적 노력을 교훈 삼아, 사회의 제반 문제를 불교적 입지에서 해결하는데 일익을 도모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윤리, 예술, 사회 등의 제반 분야도 당연히 우리의 관심 영역이 된다.
결국 우리의 취지는 불교 교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정토 실현의 현실적 실천방도를 모색하자는 것이며, 당시대에 요구되는 불교의 실천성을 회복함으로써 불교가 정신적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할 대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학문의 활동을 정토에로 승화시켜서 인류 이상(理想)의 구현에 이바지 하고자 함이니, 이것이 우리의 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