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1797년에서 1799년까지 진행된 정사박해의 원인과 순교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정사박해는 1795년 이후에 지속된 주문모 신부에 대한 추적, 급증하고 있던 충청도 지역의 교세, 1790년대의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기근의 원인을 신자에게 전가하는 분위기 등이 맞물려 일어났다. 둘째, 박해의 결과 100여 명이 희생되었지만, 현재 알려진 순교자는 여덟 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정산, 덕산, 홍주, 청주, 해미에서 순교했는데, 대부분 매를 맞고 사망하였다. 셋째, 순교자들은 ‘정송과 대시’ 규정에 따라 심문을 받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시기의 신자들이 신유박해 때처럼 십악(十惡)과 같은 중죄를 범한 죄인으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넷째, 정사박해 순교자들은 전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나눔을 실천했으며, 풍부한 교리지식을 토대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순교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다섯째, 정사박해는 ‘교화주의 입장’에서 전개된 박해 사건이었다. 정조는 형벌보다는 교화를 통해 천주교를 막고자 했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책을 없애고 교육을 강화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정사박해 순교자들이 대부분 장사(杖死)한 것은 이러한 정조의 ‘교화주의 정책’ 때문에, 관장들이 배교를 강요하면서 고문을 강화한 결과라고 하겠다. 여섯째,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1801년 초에 신유박해가 발생했다. 신유박해는 지속적으로 표출되던 강경한 천주교 탄압론이 온건론을 이긴 결과였다. 즉 정조의 사망으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교화주의 정책’이 유지되지 못했고, 그 결과 정사박해와는 달리 ‘인기인 화기서(人其人 火其書)’의 방침이 ‘형기인 화기서(刑其人 火其書)’의 방침으로 변화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전국화·강경화 되었던 것이다.
수원교회사연구소 [Suwon Research Institute of Catholic History Ha-nam, Korea]
설립연도
2003
분야
인문학>기독교신학
소개
◎ 설립취지
"수원교회사연구소"는 천주교 수원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이하여 수원교구와 한국교회의 역사를 연구하고, 신앙 선조들의 삶과 순교영성을 발굴하여, 이를 널리 알리고 후대에 전함으로써 한국 가톨릭 교회의 신앙과 문화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2003년 1월 1일 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님이 설립하셨습니다.
◎ 연구소 현황
초대 연구소장은 구산성지 주임신부인 정종득 바오로 신부가 맡게 되었으며,
연구소의 위치는 구산성지 내에 있습니다. 원활한 연구소 운영을 위해 2006년 2월 현재 7명의 연구위원과 6명의 운영위원으로 구성되어 소장의 업무를 보좌하고 있으며, 3명의 연구원이 교회사연구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 향후 연구소의 운영방침
교구 내 순교성지 및 순교자의 생애, 각 성지의 신앙적 유산을 발굴하고 이를 정리하며, 아직 개발되지 않은 교회사적지 및 순교자를 발굴하여 순교영성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신임 연구원들과 동호회원을 대상으로 매월 둘째주 토요일 한국천주교회사 월례 강좌를 실시한 후 신앙적 나눔을 가지고, 년 1~2회 학술심포지엄과 성지순례, 특별강연 등을 실시하여 순교신심을 고취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교구 내 각 본당이나 공소, 성지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연구소에 위탁하여 오는 작업도 수행할 것입니다.
간행물
간행물명
교회사학 [Research Journal of Catholic Church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