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즉위년 소론의 사도세자 신원소 제기와 정조의 대응 -『친국일기(親鞫日記)』의 심문기록을 중심으로 -
Proposal of Shinwonso (伸冤疏) for Prince Sado (思悼世子) by Soron (少論) and Response of King Jeong-Jo in the Accession Year of the King : Based on the Interrogation of 『Chin-Guk-Il-Gi(親鞫日記)』
Upon his accession in March 1776, King Jeong-Jo focused on getting rid of his political opponents including Hong In-Han and Jeong Hu-Gyeom and punish those who promoted Imohwabyeon such as Kim Sang-Ro. This was surely based on Daeuiri of King Young-Jo. Soron, which had been marginalized in the politics, regarded such his actions as a preparatory step to carry forward shinwon (伸冤) and worship of Prince Sado. Accordingly, Lee Deok-Sa, Lee Il-Hwa, Yu Han-Shin, etc. punished rebels who encouraged Imohwabyeon on Apr. 1, and made appeals for shinwon and worship of Prince Sado. Considering that demurring to the shinwon and worship of Prince Sado would be seen to be trying to change King Young-Jo’s Daeuiri and jeopardize his political position, King Jeong-Jo punished only those who were directly related and tried to stabilize the political situation. Four months later, in August, a Confucian scholar Lee Do-Hyun from Andong and his son Lee Eung-Won put forward a shinwonso for Prince Sado and got executed; this also shows King Jeong-Jo’s such intention. Since two cases of shinwonso for Prince Sado, re-argument on Prince Sado and Im-Oh-Eui-Ri had been prohibited until Yeongnam Maninso proposed in 1792 (King Jeong-Jo Year 16) when revision on Im-Oh-Eui-Ri was discussed.
한국어
정조는 1776년 3월 즉위 직후 홍인한(洪麟漢)과 정후겸 등 척신 세력을 척결하고, 김상로(金尙魯) 등 임오화변을 조장한 세력을 단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물론 이는 영조의 대의리를 기반에 둔 조처였다. 그간 정계에서 소외된 소론세력은 정조의 이러한 행보를 사도세자의 신원(伸冤) 및 추숭을 추진하기 위한 전단계로서 이해하였고, 이에 4월 1일 이덕사(李德師)ㆍ이일화(李一和)ㆍ유한신(柳翰申) 등이 임오화변을 조장한 역적을 처벌하고, 사도세자 신원 및 추숭에 대해 상소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 신원과 추숭에 대한 이의 제기는 자칫하다 영조의 대의리를 번복한다는 혐의를 살 수 있고,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판단하여, 직접적인 관련자에 한정하여 처벌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4개월 뒤인 8월에 안동 유생 이도현(李道顯)과 아들 이응원(李應元)이 함께 사도세자 신원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된 것도 정조의 이러한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두 차례 사도세자 신원소 사건 이후로 사도세자와 임오의리에 대한 재론은 엄금되었으며, 1792년(정조16) 영남만인소가 제기되면서 임오의리에 대한 수정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영조 말 정국 동향과 세손의 정치적 입지 Ⅲ. 정조 즉위년 사도세자의 신원소와 정조의 대응 1. 사도세자 신원소 제기 2. 상소 의도와 정조의 대응 Ⅳ. 맺음말 <국문초록> <참고 문헌>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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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학회는 "역사학의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이바지한다"는 목표하에 도내의 역사학자들을 주축으로 1976년에 창립된 이래 30년 이상의 연륜을 이어온 정통 역사학회이다. 수차례의 학술대회를 개최하였을 뿐 아니라, 학술지 '전북사학'을 30호까지 발간하면서 지역 사학 발전의 토대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 학회는 현재 약 24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으며, 격월로 임원회의와 월례발표회를 개최하고 있다. 매 발표회에 실제로 참여하는 인원이 항상 30명이 넘는다. 대부분의 역사관련 학회가 주로 대학교수나 강사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전북사학회는 대학교수, 강사는 물론 학예사, 연구원, 중등학교 역사담당교사 등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대학에서 연구한 역사학에 관한 이론을 중등학교 교육 현장에 올바로 적용하여 이론과 실제를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 향후 전북사학회의 지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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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사학 [JEONBUK SAHAK ; The Jeonbuk Historical 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