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방(敎坊)’은 궁중 속악(俗樂)의 교습을 담당하던 악무 기구로, 당나라 초기에 황실의 부속 기구로 처음 설립되어 청나라 때까지 궁중의 연향악무(宴饗樂舞)와 성쇠 를 함께 하였다. 당나라의 교방은 동아시아 속악 기구의 성립과 운영에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성립과 변천을 면밀하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당나라 교방의 설립과 변천에 대해서는 정사(正史)의 기록에서 그 대략을 알 수 있으나 기록이 소략하고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1960년대 초에 일본과 중국에서 현 대적 연구가 시작된 이래로 여러 가지 이설이 나왔는데, 그 쟁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방’은 악무 교습 기구를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처럼 사용되었지만 본래 는 각종 ‘교습소’, ‘양성소’를 가리키던 일반적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 교방은 당나라 고조(高祖) 때에 처음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수나라 양제 (煬帝) 때에 ‘설방교악(設坊敎樂)’한 일이 사실상 교방의 효시가 된다. 셋째, ‘내교방(內敎坊)’은 그 의미가 시대에 따라 ‘내교지방(內敎之坊)’과 ‘내지교 방(內之敎坊)’을 뜻하는 것으로 서로 다르게 사용되었다. 넷째, 현종(玄宗) 때의 내교방은 고조(高祖) 때의 내교방을 이전한 것인지 아니 면 신설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악(雅樂)의 교습에서 속악의 교습으로 그 직능 이 바뀌었고 또한 편제(編制)가 확대되어, 신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섯째, 현종이 외교방(外敎坊)을 별도로 설립한 것은 속악에 대한 사회적 수요 의 급증에 따른 대응이자 악무 관리의 전문화를 위한 조처였으나 이는 태상시(太常寺) 가 아악을 전담하고 교방은 속악을 전담하는 이원적 체계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여섯째, 장내교방(仗內敎坊)의 실체에 대해서는 내교방의 후신으로 보는 입장과 고취서(鼓吹署)에 소속된 별도의 기구라는 주장이 맞서고, 여기에 당나라 후기에 외교 방과 통합되었다는 합서설(合署說)도 제기되었다. 1960년대 이래로 제기된 이런 논란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데에는 관련 기록의 미비가 그 일차적 원인이지만 문화대혁명에 따른 중국학자들의 연구 단절도 한 요인이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