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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촌(後村) 신성(申晟)의 생애와 「금보신증가령」
Shin Seong and Geumbosinjeunggar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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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한국국악학회 바로가기
  • 간행물
    한국음악연구 KCI 등재 바로가기
  • 통권
    제52집 (2012.12)바로가기
  • 페이지
    pp.271-297
  • 저자
    최선아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298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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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초록

영어
In this paper, the results of fundamental study on Shin Seong(申晟) (Shin Seong’s pen name is Hu Chon(後村)), one of official musicians of Jangakwon(掌樂院) in the middle of Joseon dynasty, are presented. Shin Seong was a civil official living in the concatenated regime of Injo(仁祖), Hyojong(孝宗), Hyeonjong(顯宗), and Sukjong(肅宗), who devoted his life to studying Neo-Confucianism under Kim Jip(金集) (Kim Jip’s pen name is Sin Dok Jae(愼獨齋)) retreating into the general public before securing the government position. While Shin Seong vigorously communicated with contemporary celebrities of Neo-Confucianism, he suffered the party strife between his wife's family and pupils representing Noron(老論) and Soron(少論), respectively. Shin Seong lost his mother and sister in law during the second Manchu invasion of Korea when he was 14. Afterward, his father (Shin Ik-ryung(申翊隆)) resigned from the government service, and his brother (Shin Man(申㬅)) set out on a wandering journey in a fit of passion. In the 9th year of Hyojong (1658), Shin Seong cooperated with Song Si-yeol(宋時烈) in planning an expedition to conquer the north rised as a revenge of the Manchu war of 1636, around then Shin Seong started his government service late following the suggestion of his brother. He successively held various posts such as the lord of Cheongsan(靑山), Pyeongsiseo(平市署), and became an official musician of Jangakwon where the newly restored Akhakgwebeom(樂學軌範) was among the greatest concern at that time. Shin Seong was talented in music and was skillful in playing Geomungo(玄琴) at an early age of 20, the origin of which could be explained by his family history such that Shin Young(申瑛), his great-great-grand father, held the position of Akjeong(樂正) (4th rand in civil officials) who studied the theory of music in Seonggyungwan(成均館), and Shin Heum(申欽) (Shin Heum’s pen name is Sang Chon(象村)), his great-grand father, was also a government official of Jangakwon. Therefore, it is natural that Shin Seong was also interested in studying Akhakgwebeom. Shin Seong completed Geumbosinjeunggaryeong(琴譜新證假令) while working as the lord of Hongcheon(洪川), in which the preface, ‘Geumbosinjeunggaryeong(琴譜新證假令)’, was based on Akhakgwebeom. The score, ‘Sinjeunggeumbo(新證琴譜)’, was a collection of ‘Geumbo(琴譜)’ from many other families completed near his end, which passed through his careful revision for purifying the music of the impoverished world contaminated by vulgarity. These became his legacy containing the devoted love for the music and the score, which is rated today as a highly precious bequest showing the evolution of Korean music(鄕樂) after the Manchu war of 1636.
한국어
본고는 조선 중기 장악원의 악관(樂官)이었던 신성(申晟, 1623~1680)에 관한 자료들을 가능한 폭 넓게 수집하여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의 생애와 교유관계를 정리하는 한편, 그가 남긴 금보를 다시 살펴보면서 그의 음악관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신성의 호는 후촌(後村)이며, 인조․효종․현종․숙종 연간을 살았던 문인으로 벼슬에 나아가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일생을 강호(江湖)를 유랑하거나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문하에 있으면서 당대의 빼어난 성리학자들과 교유하며 주자학을 연구한 인물이다. 한편으로 신성은 그의 문인 및 처가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분쟁하며 갈등하는 현장 한복판에 서 있어야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신성은 14세에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어머니와 형수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후 그의 아버지 신익륭(申翊隆)은 벼슬을 버렸으며, 형 신만(申㬅)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분노를 품으며 방랑을 하였다. 신성 역시 아버지와 형을 따라 강호를 방랑하였다. 효종 9년(1658)에 조정에서 북벌론이 대두되자 신만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따라 북벌 계책을 함께 세웠다. 이즈음 신성은 형의 명을 따라서 느지막이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는 청산(靑山)의 현감(縣監)을 비롯하여 삼군(三郡)을 역임하였고, 평시서(平市署)의 영(令)을 지냈고, 장악원(掌樂院)의 악관이 되었다. 당시의 장악원에서는 새로이 복각된 「악학궤범」에 관심이 쏠렸다. 신성의 고조부인 신영(申瑛)은 성균관에서 음악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악정(樂正, 정4품)이었고, 종조부인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 역시 장악원 정(正)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음률을 잘 아는 집안에서 자랐던 신성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하여 스무 살 때는 이미 거문고를 탈 줄 알았다. 따라서 당시의 신성도 자연스럽게 「악학궤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었다. 신성은 홍천의 현감을 지내면서는 「금보신증가령(琴譜新證假令)」을 완성하는데, 서문에 해당하는 ‘금보신증가령’은 장악원 악관 시절에 살펴본 󰡔악학궤범󰡕을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악보인 ‘신증금보(新證琴譜)’는 여러 집안에 소장된 금보를 살펴보고 그 결함을 보완하는 동시에 쇠세(衰世)에 숭상하는 비속한 음악을 정화하고자 죽기 직전까지 다듬고 고쳐서 완성하였다. 결국 신성은 음률을 사랑했던 마음과 악보라는 문화적 유산을 사랑하는 자식과 손자에게 남기고 떠날 수 있었다. 오늘날 그가 남긴 악보는 병자호란 이후 향악곡의 변천을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악보로 평가되고 있다.

목차

<국문요약>
 Ⅰ. 서론
 Ⅱ. 신성의 생애
 Ⅲ. 『금보신증가령』의 내용과 성격
 Ⅳ.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저자

  • 최선아 [ Suna Choi | 서울대학교 강사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한국국악학회 [Korean Musicological Society]
  • 설립연도
    1948
  • 분야
    예술체육>음악학
  • 소개
    한국국악학회는 국악을 연구하여 음악학 및 민족음악의 향상에 기여할 목적으로 1948년 4월 봄에 이혜구, 장사훈, 성경린, 이주환 외 15명의 발기로 발족하여 1963년 12월 14일 사단법인체로 인가취득한 이래 1) 국악의 연구발표 2) 국악 관계자료서 수집 3) 국악에 관한 전시회 및 강연회 개최 4) 국악에 관한 출판사업 5) 국내의 학계간 교류 등의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본 학회는 국악의 연구발표를 4000여회에 가까운 월례발표회를 가졌으며, 20회에 걸친 국악기 및 국악서적 전시회를 열고 3회의 신국악작곡 발표회를 가진 바 있다. 특히 학회에서는 1971년 한국음악연구 제1집을 발간한 이래 현재 제45집 출판에 이르렀으며, 30여종의 고악보 간행, 이혜구 박사 송수기념 음악학 논총, 장사훈 회갑기념 동양음악논총 등 30여권의 단행본을 출판하였다. 또한 1989년 제1회 국악학 전국대회를 열어 한국음악의 쟁점이 되는 주제를 선정하여 전국규모의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1975년 한·일간의 고려악 연구회를 발족시켜 일본의 음악학자들과의 공동연구로 심포지움을 개최하였으며, 1981년에는 국제전통음악학회(ICTM) 서울대회를 치뤄내고, 1994년에는 제1회 아시아 태평양 민족음악학회(APSE)를 서울에서, 1999년에는 제6회 아시아 태평양 민족음악학회(APSE)를 수원에서 성황리에 치뤄내는 등 외국학회와 교류에 힘써왔다.

간행물

  • 간행물명
    한국음악연구 [STUDIES IN KOREAN MUSIC]
  • 간기
    반년간
  • pISSN
    1975-4604
  • 수록기간
    1975~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십진분류
    KDC 679 DDC 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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