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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연구 - 사적지를 중심으로
The Historical Consideration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Namwon Area and its Future T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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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동학학회 바로가기
  • 간행물
    동학학보 KCI 등재 바로가기
  • 통권
    제33호 (2014.12)바로가기
  • 페이지
    pp.181-224
  • 저자
    채길순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296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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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writing is aimed at considering the historical traces of Donghak PeasantRevolution History in Namwon by dividing them into 4 periods and organizinghistorical remains systematically. (1) In December, 1861 marking the Donghak Espousal period, Choi, Je-woostayed at Seo, Hyeong-cheol's house in the vicinity of Namwon GwanghalluOjakgyo. Then, he retired to Eunjeogam of Gyoryongsanseong Fortress to writebooks on Donghak doctrines. There still remain Donghak ruins at Gwanghalluand Gyoryongsanseong Fortress. (2) In 1885 after 22 years' elapse, with the 2nd religious sect leader ofDonghak, Choi, Si-hyeong's beginning of propagation activity in Imsil andCheongwung, Donghak came to be in prosperity. At this time, emerging wereDonghak leaders including Choi, Bong-seong, Kim, Hong-ki, Kim, Young-ki,Kim, Gae-nam and Ryu, Taeheung, etc. (3) In 1894, when Donghak Peasant army captured Jeongjuseong Castle andinstalled Jipgangso(a kind of autonomical reform organ), Kim, Gae-nam whoheld the position of Daejeopju(large-scale organization leader of Donghak)made it to Namwon in June to rule the left region of Jeollado. In July of thesame year, tens of thousands of believers in Donghak gathered to wield theirspirit and stayed at Namwon for 49 days. (4) With the chaotic state of affairs in the country, such as the Japanese army'spillage of Gyeongbokgung Palace and Donghak religious body's declarationof the 2nd uprising, Kim, Gae-nam dominated Muju and Hoedeok withcrushing force and went on to advance on Cheongju as he left Namwon in November to move northward. At this moment, Donghak peasant army mainforceunits led by Jeon, Bong-joon and Son, Byeong-hi got defeated at Gongju. In the meantime, as Kim, Gae-nam left Namwon castle, Minbogun(a kind ofmilitia) led by Woonbong Park, Bong-yang beat Donghak peasant army at theBangachi battle, and occupied Namwon castle. Kim, Gae-nam's troops cameto be scattered after being defeated by the Japanese army's new weapons atCheongju castle. (5) With the start of punitive expedition on Donghak peasant army, manyDonghak peasant army soldiers got captured to be executed. At this time,countless numbers of Donghak peasant army leaders including Kim, Hong-ki,etc. were killed. Ryu, Tae-hong took refuge in Suncheon area leading NamwonDonghan peasant army, but he lost almost all his troops through the loss ofbattle, and narrowly survived. In the midst of such a historical course, there still remain a lot of Donghakruins, on which in-depth research has been done mostly through witnesses'evidence and data. In addition, historic sites were systematically organized. Now, it's the time for citizens to share the historical meaning in diverse waysand to be devoted to creating the future value.
한국어
이글은 남원의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 사적을 네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고,역사 유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총체적 의미를 정립하는데 목적이 있다. 동학 창도기인 1861년 11월, 최제우는 남원 광한루 오작교 부근 서형칠의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교룡산성 은적암에 머물면서 동학의 교리 저서들을집필했다. 광한루와 교룡산성에 동학 유적이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1880년대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임실 청웅 지역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면서 남원에 동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교조신원 운동과 보은취회를 거치면서 최봉성 김홍기 김영기 김개남 류태홍 등 많은 남원지역 동학지도자들이 부각된다. 1894년 봄, 무장에서 기포하여 백산에 진을 친 동학농민군이 황토재 전투에서 지방군을 물리치고,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중앙 관군을 연이어 물리친다. 남원 동학농민군은 백산기포에 합류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함락하고 집강소를 설치할 때, 김개남은 6월 남원에 입성하여 집강소를 설치하여 금산 무주 진안 용담 장수 등 전라좌도를 장악했다. 김개남은 7월 중순에 수 만명의 동학교도가 모인 남원대회를 개최하여 동학농민군의 기세를 떨쳤고, 약49일간 남원에 머물며 집강소를 운영하고 기포를 준비했다. 일본군이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군사를 국경 밖으로 몰아낸 뒤, 경복궁을침탈하는 등 본격적인 조선 침략에 들어갔다. 동학교단에서 2차 봉기를 선언하자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 북상하면서 무주 진잠 회덕을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청주성으로 진격한다. 이때 전봉준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연합군 주력 부대는 공주 우금치에서 패하게 된다. 한편, 김개남이 남원 성을 떠나자 운봉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이 방아치및 관음치 원촌 싸움에서 남원 동학농민군을 잇따라 물리치고 남원성을 점령한다. 김개남은 청주성에서 일본군의 신무기에 패해 흩어지게 된다. 민보군과 관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군 토벌전이 전개되어 수많은 남원 동학농민군이 희생되었다. 류태홍은 5백 여 명의 남원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순천 지역으로 피신했으나 다시 패해 모든 군사를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이런 역사적 도정에서 남원 및 주변 지역에는 많은 동학유적이 남아 있고,대부분 증언이나 자료를 통해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런 과정에서사적도 체계적으로 정리 되었다. 이제 시민들이 역사적 의미를 다양한 방법으로 공유하고, 미래적 가치를 창출하는데 주력해야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최제우의 남원 행적
 3. 동학 포교 시기와 신원운동 시기의 활동, 그리고 동학지도자들
 4. 1차 봉기와 집강소 설치시기, 그리고 남원대회
 5. 2차 봉기와 남원성 공방전
  1) 김개남의 출정과 행적
  2) 10월 24일 민보군 남원성 점령
  3) 10월 27일 남원성 전투
  4) 방아치 및 관음치 전투
  5) 원촌 전투
  6) 동학연합군과 김개남군의 연이은 패배
 6. 동학농민군 토벌 시기의 남원
 7.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키워드

남원동학 최제우 은적암 교룡산성 김개남 남원 대도소 남원대회 방아치 전투 남원성 싸움 Donghak Donghak Peasant Revolution Namwon Choi Je-woo Choi Si-hyeong Kim Gae-nam Donghak peasant army Bangachi battle

저자

  • 채길순 [ Gil-Soon Chae | 명지전문대 교수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동학학회 [The Donghak Society]
  • 설립연도
    1998
  • 분야
    인문학>역사학
  • 소개
    1998년 설립된 동학학회는 동학사상에 대한 철학적, 사상적 연구를 통해 한국사상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기여하고, 나아가 세계 속의 한국사회 건설과 21세기 인류 문명의 대안적 세계관을 탐구하는데 이바지함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등재학술지 [동학학보]를 연4회 발간하고 있습니다. [학회 설립 목적] 동학에 대한 학제 간 학술연구 및 학술발표와 회원간의 학문적 교류를 목적으로 한다. 동학사상에 대한 철학적, 사상적 연구를 통하여 한국사상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학문적 기여를 한다. 아울러 동학사상의 현실화, 구체화 과정인 동학혁명에 대한 역사적, 사회과학적 연구를 통하여 자주적 민의 형성, 사회형성, 국가형성의 정신을 연구하여 세계속의 한국사회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한다. 본 학회는 동학연구를 통해 민족통일 이념의 정립에 기여하고, 나아가 2000년대 인류 문명의 대안적 세계관을 탐구, 제시하고 회원 사이의 이해 증진을 도모한다.

간행물

  • 간행물명
    동학학보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 간기
    계간
  • pISSN
    1598-7566
  • eISSN
    2713-3605
  • 수록기간
    2000~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십진분류
    KDC 151 DDC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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