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un Choi Jae-Woo starting the DongHak didn't spread the DongHakimmediately on April, 1860. In other words, he was confident after toughtraining throughout the year in order to determine the degree earned himselffinally starting to spread around. But soon escape the attention of the jealousyand criticism and subsequent tube of Yu-lim, he left the road. Above all, thereason why he was in the house needs to leave helical far as writing what heclaimed. He knew well that his ideas and pass on to posterity should be leftin the glow also be spread to the public. So he needed a place to stay quietlywithout a trace. Suun Choi Jae-woo come on Eunjeokam of Namwon in winter 1861 wasnamed the DongHak and also he had made to organize in June of that year. Promise Avenue was born into the DongHak of the so-called official name. Eunjeokam is such a place that is very meaningful DongHak completed. Healso completed the main content of the scriptures of the Dongkungdeajern andYongdamyoosa similar to the DongHak here. If you think the proportion ofThought in Korea accounted DongHak can not pass Namwon Eunjeokam alsostressed the importance of the matter. Above all, the major gaebyeok place inthe political history of ideas is complete DongHak also Eunjeokam. He willdance song sung knife that just represents the aspirations of the people whoaspire to acquired Huchungaebyeok. Also, is the origin of the Honam region Namwon DongHak. Unlike quietly lurking intention of sea transport to be hoped Eunjeokam people came to havea large number of Hunan. After all Suun would have been able to completethe DongHak of ideology that contains the aspirations of the people of thatconversation to talk to them again. Moreover, he preached the DongHak oozingthroughout the surrounding areas of Honam. This was the revolution of theoutbreak DongHak Gapohnyeon(갑오년) like wildfire around the Honam firstpodeok is the fruit of the seed is just 120 years ago Honam. DongHak Revolution participants in Namwon area to reach the 70,000 mostof them at about 50,000 DongHak was also a forward to the world Suun isshouted gaebyeok. Thus, Namwon is a two holy day called Kyungjoo localDongHak with today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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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4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곧바로 동학을 전파하지 않았다. 즉 그는 스스로 얻은 도를 확인하기 위하여 1년여에 걸친 수련을 거친 뒤에확신을 하고 비로소 주변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이은 유림들의 비난과 질시와 관의 주목을 피해 그는 길을 떠났다. 무엇보다도 그가 집을 나선이유는 그동안 자신이 주장한 바를 글로서 남길 필요가 있어서였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글로 남겨져야 후대에 전수되고 또한 대중 속으로 확산될 것임을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흔적도 없이 조용히 지낼 곳이 필요했다. 1861년 겨울에 남원의 은적암에 온 수운 최제우는 그 해 6월까지 자신이 만든 도를 정리하여 동학이라고 명명했다. 무극대도가 이른바 동학이라는 정식명칭으로 탄생한 것이다. 은적암은 이처럼 동학이 완성된 매우 의미있는 장소이다. 또한 그는 이곳에서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주요한내용들을 완성했다. 한국 사상사에 있어서 동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남원 은적암의 소중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동학의 정치사상에서 주요한 개벽사상이 완성된 곳도 은적암이다. 그가 춤추며 부르던 칼노래가 바로 후천개벽을 열망하던 민중들의 염원을 대변하고 있는것이다. 또한 남원은 호남지역 동학의 출발지이다. 조용히 숨어 있기를 바랬던 수운의 의도와는 달리 은적암에는 수많은 호남 사람들이 찾아 왔다. 결국 수운은 그들과 대화하고 또 대화하는 가운데 민중들의 염원을 담은 동학사상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호남의 주변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동학을 전파하였다. 이것이 호남 최초의 포덕이고 그 씨앗의 결실이 바로 120년전 호남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진 갑오년의 동학혁명이었다. 호남의 최초 입교자는 남원지역의 서형칠이었다. 그는 수운에게 은적암을 소개해준 인물로 수운이 경주로 돌아간 뒤에도 경주를 오가며 동학을 전수받은 인물이었다. 수운이 죽자 지하로 들어간 동학을 비밀리에 전파한 인물이 해월 최시형이다. 그를 통해 전파된 동학은 특히 1890년대에 들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특히 남원지역 포덕의 중심인물은 김흥기와 류태홍이었다. 이들 모두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 지도자급으로 참여한 인물로 남원성점령과 방아치전투 등에서 고락을 함께했다. 동학혁명 당시 남원지역의 참여자는 대략 5만명에서 7만명에 이르는데 이들 대부분은 수운이 외친 개벽세상을 향해 전진한 동학도들이었다. 이처럼 남원은 오늘 경주와 더불어 동학의 2대 성지라 일컫는 지역이다.
1998년 설립된 동학학회는 동학사상에 대한 철학적, 사상적 연구를 통해 한국사상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기여하고, 나아가 세계 속의 한국사회 건설과 21세기 인류 문명의 대안적 세계관을 탐구하는데 이바지함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등재학술지 [동학학보]를 연4회 발간하고 있습니다.
[학회 설립 목적]
동학에 대한 학제 간 학술연구 및 학술발표와 회원간의 학문적 교류를 목적으로 한다.
동학사상에 대한 철학적, 사상적 연구를 통하여 한국사상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학문적 기여를 한다. 아울러 동학사상의 현실화, 구체화 과정인 동학혁명에 대한 역사적, 사회과학적 연구를 통하여 자주적 민의 형성, 사회형성, 국가형성의 정신을 연구하여 세계속의 한국사회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한다.
본 학회는 동학연구를 통해 민족통일 이념의 정립에 기여하고, 나아가 2000년대 인류 문명의 대안적 세계관을 탐구, 제시하고 회원 사이의 이해 증진을 도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