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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ㆍ粤紛爭’시기의 중앙과 지방
The Central Government and a Local Government in the Period of ‘Ning-Yue Conflict’
‘녕ㆍ월분쟁’시기의 중앙과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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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바로가기
  • 간행물
    한중관계연구 바로가기
  • 통권
    제2권 제2호 (2016.08)바로가기
  • 페이지
    pp.103-124
  • 저자
    金泳信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282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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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초록

영어
The conflict between Nanjing and Canton, or the central government and a local government triggered by the confinement of Hu Han-min eventually caused two central committees and two Nationalist (Kuomindang) governments to struggle over the legitimacy. The two parties’ conflict escalated even to military conflicts resulted in the waste of time and effort required for nation building. This naturally became an obstacle that hindered an effective implementation of ‘Resisting Foreign Aggression after Stabilizing the Country’ policy by Chiang Kai-shek controlling the political situation with the intention of reorganizing the relationship with Japan after devoting all his energies to suppressing communists. Of course, it may not be an absolute cause. However, it is noteworthy that the conflict and disunity between the central government and a local government, what is called ‘Ning-Yue Conflict’, was a contributory cause of the 9.18 Incident, which was an unprecedented foreign aggression. At that time, all Chinese people shared the perception that ‘Internal conflict’ should first be resolved to protect the nation and people from ‘Foreign aggression.’ Both Ning and Yue that could not disregard public opinion tried to have a meeting to reflect on their own mistakes, to forgive the other party and to jointly seek a measure to overcome national difficulties. However, that process was not smooth, because Guangdong side insisted on preconditions for reconciliation such as the security for its moving northward, the resignation of Chiang Kai-shek and the release of Hu Hanmin. Practical and immediate steps were taken toward the security for Guangdong representatives’ moving northward, which represents that Chiang Kai-shek and Najing side tried very actively to have a meeting. Even if Guangdong side did not express a full acceptance, Chiang Kai-shek’s expression of a better intention for the resignation laid stepping stones to resolve conflict and disunity between both parties. Furthermore, ‘Release’ of Hu Hanmin, which Guangdong side had suggested as the minimum precondition, was realized. That is to say, the two most critical issues did not work any longer as obstacles to having a meeting. These results came from the common perception that both parties should ‘Join hands to overcome national difficulties.’ However, it is with deep regret that the process of ‘Joining hands’ had ups and downs, and that another reorganization of power structure occurred inside the Kuomindang Party, as can be found in the subsequent ongoing political situation.
한국어
건국의 단계를 軍政-訓政-憲政의 3단계로 설정한 손문은, 아직 民權의 성장이 여의치 않 은 관계로 ‘훈정시기’는 인민대중을 대신하여 중국국민당이 政權을 행사하도록 설계하였다. 따라서 손문의 유훈대로라면 훈정시기는 政權과 民權 혹은 軍權의 위에 당권이 위치하는, ‘당권제일’, ‘당권지상’의 시기여야 하였다. 그러나 손문이 그린 건국의 청사진과는 달리 국민혁명군의 북벌 성공 이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비대해진 군권이 당권과 정권까지 좌우함으로써, 훈정시기에 접어든 뒤 초기 수년간은 ‘軍權獨大’의 현상이 심화되는 기형적 형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군권독대의 상황은 여전히 군벌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군사실력자의 중앙에 대한 무력 반항, 권력핵심에서 소외된 국민당 내 각 파벌의 반중앙활동, 재야 지식인들의 불만을 자아내어 북벌의 완성이 형식적 통일에 그치고 실제적으로는 분열적 국면이 지속되 었다. 권력투쟁 양상으로 비춰지기까지 했던 국민당 내부의 분열상은 당 내부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국민당 정권 내부의 군사적․정치적 갈등과 분열이 국가의 원기까지 상하 게 할 정도로 당시 중국의 정치와 사회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호한민 유폐로 인해 촉발된 중앙과 지방, 곧 남경과 광동 간 분규는 결국 두 개의 당 중앙과 두 개의 국민정부가 서로 정통을 다투는 형국을 가져왔다. 심지어 무력충돌로까지 확대된 쌍방 간 갈등으로 국가건설에 매진해야 할 시간과 노력이 헛되이 소모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자연 공산당 토벌에 전력을 기울인 뒤 일본과의 관계 재설정을 염두에 두고 정국을 이끌어나가던 장개석의 ‘安內攘外’정책이 효과적으로 집행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로 작용하였다. 물론 그것이 절대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른바 ‘寧粤紛糾’라 불리는 중앙과 지방 간 갈등과 분열이 9․18사변이라는 공전의 외환을 초래한 여러 요인 가운 데 하나라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당시 모든 국민들은 ‘外患’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內紛’을 종식 시켜야한다는 공통된 인식은 갖고 있었다.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영․월 쌍방은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고 상대방을 용서하며 함께 국난극복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자 하였으나 화의진행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광동방면이 북상 시 안전보장, 장개석 하야, 호한민 석방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건 탓에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광동방면 대표들의 북상 시 안전보장에 대해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장개석과 남경방면이 화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비록 광동방면이 완전히 접수하지는 않았지만, 하야문제에 대한 장개석의 진일보 된 의사표시는 쌍방 간 분열과 갈등이 봉합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마련한 셈이었다. 여기에 광동방면이 최소한도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였던 호한민의 ‘석방’이 실현됨으로 써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쟁점이 더 이상 화담진행의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쌍방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한 결과였지만, 이 후 정국의 전개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힘을 합치는’ 과정 또한 우여곡절을 겪으면 서 국민당 내부에서는 또 한 차례 권력구조의 재편이라는 현상이 출현하게 됨은 심히 아쉬 운 현상이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분쟁의 발단과 정치적 해결을 위한 노력
 Ⅲ. 두 가지 쟁점과 타협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키워드

남경정부 비정기회의 후한민 장계석 황동파 Nanjing Government The Extraordinary Conference Hu Han-min Chiang Kai-shek Canton Click 南京政府 非常會議 胡漢民 蔣介石 廣東派

저자

  • 金泳信 [ 김영신 |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학술연구교수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 설립연도
    2013
  • 분야
    사회과학>정치외교학
  • 소개
    원광대학교는 ‘중국문제특성화’ 대학을 지향하면서 2013년 3월 한중관계연구원(원장 정세현)을 설립하였다. 한중관계연구원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처하고, 바람직한 한중관계와 양국의 공동발전을 위한 실질적 방안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한중관계연구원 산하에 한중법률, 한중역사문화, 한중정치외교, 한중통상산업 분야의 전문연구소를 두고 있다. 이로써 한중관계연구원은 각 분야의 전문 연구소를 통해 한중간 현안들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며 중국과의 교류를 선도하며 중국 지역전문가를 양성하는 명실상부한 중국문제 특성화 전문 연구기관이다.

간행물

  • 간행물명
    한중관계연구 [Korean Chinese Relations Review]
  • 간기
    연3회
  • pISSN
    2384-1214
  • eISSN
    2671-8928
  • 수록기간
    2015~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십진분류
    KDC 349 DDC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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