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paper aims to consider the problem of the good life in relation to cosmology in Plato's later dialogues. Plato has shown that all sorts of fine things was created in comos, when the unlimited and what has limit were mixed together(Philebus, 26b). And he said that the mixed life of pleasure and intelligence was a part of the third kind, namely the combination of peras and apeiron. Then how is the mixed life a part of the third kind? J.M. Cooper says that "if pleasure and knowledge in the good life are good things, then each of these two must be a combination of peras and apeiron, and the life that is made up of them will itself be a combination partly in virtue of that fact"(1977, 718). But his interpretation seems to be the fallacy of composition. I think that the mixed life is a part of the third kind in that the mixed life has due measure and proportion. Because these two concepts is connected with the combination of apeiron(opposites) and peras(Philebus, 25d11-e2, 26a6-8, 26d9). Plato's mixing procedure of pleasure and intelligence can be reconstructed into three steps. (1) The mixture of only most true knowledges and pleasures. This is not real, but ideal. If anyone wishes to live with only these true components. he will be a laughingstock. (2) The additional mixture of necessary knowledges and pleasures. This is what reflects an real condition of human being, accordingly it is not ideal, but real. These two steps of mixture establish the mixed life that is real and ideal. This life is not just a life but the good life, and that the good life not for god but for human. This is the good life that has due measure and proportion as cause of its goodness. (3) The additional mixture of the most strongest and most intensive pleasures. This is neither ideal, nor real. Those pleasures destroy "itelligence, memory, right belief"(Philebus, 64a), and at last themselves. So Plato excluds th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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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서는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하는 문제를 플라톤이 그의 우주론적인 논의와 연관해서 어떻게 밝히고 있는지를 분석해 볼 것이다. 필레보스에 의하면, 우주 자연에서 온갖 좋은 것은 한정되지 않은 것들과 한정자들이 혼합될 때 창출된다(26b). 이 말은 ‘대립적인 것들’(한정되지 않은 것들)에 일정 비율들(한정자들)이 개입되어 ‘적도’와 ‘균형’이 이루어질 때 온갖 좋을 것이 창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한정되지 않은 것과 한정자의 혼합은 대립적인 것들의 ‘적도나 균형을 이룬 혼합’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우주 자연에서 좋은 것들이 창출되는 방식이다. 다른 한편 플라톤은 인간의 좋은 삶을 위해서는 즐거움과 지식이 다 필요하다고 보고 이 둘이 혼합된 삶이 좋은 삶임을 밝힌다. 그러고는 이 혼합된 삶이 우주론적 논의에서 언급된 ‘한정자’와 ‘한정되지 않은 것’이 ‘혼합된 부류’의 일부로 간주한다(27d). 그런데 어떻게 혼합된 삶이 혼합된 부류의 일부라 할 수 있는지는 아주 불분명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혼합 요소들 각각이 한정자와 한정되지 않은 것의 결합체이므로, 혼합 자체도 그런 결합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결합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혼합요소들보다는 요소들의 관계를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특히 요소들간의 ‘불화가 없는 혼합’, ‘적도와 균형을 지닌 혼합’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우주에서 좋음이 실현되는 방식에 따라 적도와 균형을 이룬 ‘혼합된 삶’은 어떤 삶인지를 살펴보았다. 이 삶의 구성과정은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1) 오직 가장 참된 지식들과 가장 참된 즐거움들만의 혼합. 이것은 현실적이지 않고 이상적인 혼합이다. 이런 혼합을 추구한다면 현실을 모르는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2) 불가피한 지식들과 불가피한 즐거움들의 추가적 혼합. 이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조건을 반영한 것이며, 따라서 현실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의 좋은 삶보다는 그저 인간의 삶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1)-(2) 단계의 혼합이 이루어지면 이상과 현실이 어우러진 혼합된 삶이 창출되는 것이다. 이 삶은 그저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이며, 그것도 신의 좋은 삶이 아니라 인간의 좋은 삶이다. 그리고 이 삶을 좋은 삶이 되게 한 원인은 이 삶 속에 있는 적도와 균형이다. (3) 가장 크고 가장 강렬한 즐거움을 지성을 비롯한 인지적 요소들과 섞은 혼합. 이것은 이상적인 것도 현실적인 것도 못된다. 이런 혼합은 적도와 균형을 갖지 못한 것으로서, 존속할 수 없고 그것의 요소들까지 파괴시키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즐거움들은 삶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목차
Abstract 1. 머리말 2. 우주에서 좋음이 실현되는 방식 3. 우주적 질서와 인간의 좋은 삶의 연관성 4. 우주 자연에 따른 좋은 삶 가. 즐거움과 지식의 혼합으로서의 좋은 삶 나. 재산, 몸, 혼과 관련한 적도나 균형과 불균형 5. 맺음말 참고문헌 요약문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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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국내외적인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한국의 철학계가 이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해 나아가야만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들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되돌아 보건대 지난 수십년간 우리 철학인들의 노력으로 많은 발전이 이어져 오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한국의 철학계는 일제가 남기고 간 뿌리 깊은 구조적 왜곡의 도식적 틀로 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래에 진행되고 있는 철학 활동들의 상당한 부분이 외국 철학계의 축소판적 모방 내지는 반복에 그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현실성에 대하여 역행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들이 심각한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철학은 분명 시대와 사회의 현실적 토양에 뿌리를 둔 자생적이고 종합적인 지적 노력들의 결집장인 것입니다. 이제 한국의 철학계는 지난 날의 왜곡된 도식적 틀과, 주체성을 상실한 타성적 모방을 면밀한 비판적 반성과 함께 철저히 극복하여야 하며 새로운 시야와 태도를 가지고 우리들 현실의 심층부에 놓여 있는 문제들에 가까이 다가가야만 합니다. 진정 우리의 철학계는 근본적인 질적 전환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철학사를 되돌아볼 때, 철학은 어렵고 복잡한 시대적 전환기의 상황에 놓여질수록 더욱더 그 진가를 발휘하여 그 사회의 내면에 은폐되어 있는 총체적 구조 연관의 모습들을 드러내어 밝혀 주고 새로 운 이념과 비젼을 제시함으로써 더 진일보한 인간 실현의 공동체 형성에 기여해 왔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의 현실 상황은 어려운 문제들이 구조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난해한 장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예고하는 풍부한 다양성의 토양인 것입니다.
이 새로운 철학적 종합은, 현재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성의 토양이 아직 성숙한 문화적 종합을 이루지 못한 채 그저 혼재된 상태에 놓여져 있음으로 인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대학과 사회는 외양상으로는 풍부함에 넘치고 있고, 또 전반적인 사회 발전의 수준이 이미 산업사회의 단계를 넘어 첨단 과학 기술 정보사회에 진입하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지만, 그 내면의 문화 적이고 사회적인 과정들은 어느 틈엔가 자각하기 힘들 정도로 기술적 효율성과 자본의 논리라는 획일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일차원적인 단순성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과 문화는 이러한 일차원적인 경향에 밀려 비인간화의 황폐한 지대로 내몰리고 있는 것입니 다. 대학에서조차 철학은 잊혀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심각한 상황 때문에 철학은 자기 인식의 눈을 다시 떠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이 사회에서 어떠한 획일적 논리가 막후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 그 논리는 각 분야에서 어떠한 지식의 형태로 또 어떠한 문화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공개된 담론의 무대에 올려 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망각되고 왜곡된 우리들 존재의 본질을 다시 일깨우는 일이며, 또한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 공동체의 문 화 형성에로 나아가는 길의 시작일 것입니다.
미래의 우리의 철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현실 상황의 내면적 구조 연관의 변화하는 역동적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어 밝혀 주고 우리들 삶의 본질을 지켜 줌으로써 인간 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교육적 문화 적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철학의 과정은 우리의 철학인들 모두가 현실의 문제 의식에 공감하 고 서로의 학식과 구상들을 대화하며 뜻을 함께 모으는 가운데 서서히 결실을 맺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대화와 논의의 과정이 본래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오늘날 모든 국가들의 사회 생활이 국제적인 상호 교류와 영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한국 사회는 동서양의 문화적 교차 지점에서 매우 복잡한 다양성의 현실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을 위시한 세계 여러 나라의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철학은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 이론 들이 함께 참여하여 토론하는 집단적인 노력을 통하여 탄생할 것이며, 본 大同哲學會는 그것을 위한 대화의 중심 무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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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철학 [Journal of the Daedong(Graet Unity) Philosophical Assoc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