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tudy aims to interpret some works of Andrea Mantegna as political propagandas which show inequality of power or resources in Renaissance patronage. Mantegna, one of the most famous antiquarian painters in the Early Italian Renaissance who set the bridge between the pictorial world of the painters and the intellectual world of Humanism, also was one of the first courtly artists of the Renaissance. More specifically, it was in Mantua that Mantegna served for the marquises of the Gonzaga family. In that regard, this study analyzes three works of Mantegna which were produced while he were staying in the Gonzaga court, ceiling- and wall-paintings of Camera Picta, Trionfi di Cesare and Madonna della vittoria. In particular, by situating these works in a proper historical terrain and interpreting them within a power-structure of the Renaissance court, this study argues that those are the political images displaying the authority of the Gonzaga princes and that Mantegna was a painter-courtier as much as he was a humanist artist.
한국어
이 글은 안드레야 만테냐의 일부 회화 작품을 르네상스기의 후견 관계에 작동하던 권력과 자원의 불균형한 배분을 보여 주는 정치적 선전물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일반적으로 만테냐는 휴머니즘의 지적 세계와 화가들의 시각적 세계 사이에 교량을 놓은 르네상스 초기의 가장 선도적인 호고주의 예술가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글의 논의와 관련해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르네상스기의 궁정에서 활동했던 거의 최초의 미술가라는 점이다. 이 점에 주목하여 이 글은 만테냐가 곤자가 궁정의 카메라 픽타에 제작한 천장화와 벽화, 연작 걸개그림 「카이사르의 개선」, 교회 제단화 「승리의 마돈나」를 적절한 역사적 지평 위에서 분석하고 또 르네상스 궁정의 권력관계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이것들이 곤자가 군주의 권위를 전시하는 정치적 이미지였으며, 만테냐 역시 휴머니스트-예술가인 것만큼이나 화가-궁정인이었다는 점을 해명한다.
목차
1. 프롤로그: 만테냐와 르네상스 미술가의 문제 2. 카메라 픽타: 공적 공간으로서의 르네상스 궁정 3. 「카이사르의 개선」, 「승리의 마돈나」: 르네상스 회화의 극장성 4. 에필로그: 궁정화가 만테냐, 화가-궁정인 만테냐
문화사학회 [The Korean Workshop for the History of Culture]
설립연도
2000
분야
인문학>역사학
소개
한국의 서양사학계는 새로운 학풍을 도입하고 실험하며 우리의 역사학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자임해왔다. 오늘날 서양사학계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는 선배들의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우리가 지금 있는 위치에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그들이 공들여 쌓아놓은 울타리 안에 안주할 수만은 없다는 현실에도 인식을 같이 한다. 그 요구는 여러 면에서 감지되고 있다.
첫 번째는 서양사학 내부에서 솟구치는 추동력이다. 두 번째는 인접 학문 분야와의 교류에서 생겨나는 필요성이다. 역사학 내부에서도 한국사나 동양사와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거니와, 관련된 학문 분야에서 이룬 결실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음은 물론, 다른 학문 영역에서 역사학에 침투하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세 번째는 일반 대중이 서양사에 대해 느끼는 갈증에 연유한다. 우리의 서양사학이 많은 업적을 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대중들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학자들만을 위한 학문의 장을 열어왔다는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여러 목표들을 수렴할 수 있는 공통분모로서 우리는 문화사라는 대안을 상정한다. 우리가 말하는 문화사는 역사학의 특정 분야로서 다른 분야를 배제시키는 개념의 문화사가 아니다. 그것은 침전된 과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여과 장치이며 역사에 스며든 사람들의 생각을 되살리도록 만들어주는 재생 장치이다. 그것은 역사를 보는 방식이지 역사의 분야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상정하는 문화사는 다양한 역사가들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연성을 갖는다.
우리의 시도는 한 마디로 학문적 연대감을 갖는 학문 공동체를 만들려는 도전이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서양사라는 자기모순적인 명제를 넘어서려는 도전이다. 그것은 우리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넓히려는 자기극복의 도전이다. 이런 논지가 암시하는 바, 우리 역시 언제 누군가에 의해 극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으며 우리는 여기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