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8‧10 People’s resistance at Gwangju Grand Housing Complex in 1971 occurred by the government and Seoul city’s shortsighted, unprepared policy for the urban poor in moving them to a new settlement, Gwangju Grand Housing Complex. When the government imposed far expensive sale price for the land than expected, those who bought the partitioned land organized a committee in order to reduce the price by appealing for the government. While Jaeil church and local elites led by Chun Sung-Chun represented the people’s demand in the beginning and created a space for mobilization, the crowd gathered for demonstrating their grievances on August 10 violently expressed their enragement, which proved the biggest people’s resistance since the Korean War. The people’s violent action of the day seemed like hostile outburst with no clear goal or target. As it remained an autonomous peoples’ resistance, it stopped on the day’s afternoon when the crowd heard the news that Seoul Mayor, Yang Tack-sik accepted all the demand the representative committee. Although the incident occurred and ended suddenly and in violent fashion, it left some important lessons both on the government’s city-restructuring policy and urban poor’s social movements thereafter.
한국어
1971년 8‧10 주민항거는 박정희 정권의 돌진적인 자본주의적인 근대화, 대자 본을 축으로 하는 경제성장 전략과 그에 수반된 거대도시화의 모순이 드러난 것 이었다. 구조적으로는 도시 공간 재구조화 과정에서 발생한 재정 위기에서 기인 하였으나, 직접적으로는 이 사건은 정권과 행정당국의 무성의하고 졸속적인 철거 민 정책, 그리고 성급한 분양계획 추진과 높은 분양가격과 과세조치 등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이 사건은 교회라는 조직적인 공간, 주로 전매자 중심의 사전의 조직 적 청원활동과 8‧10 당일의 예상치 못했던 걷잡을 수 없는 소요가 결합된 사건 이라고 볼 수 있다. 도시빈민의 군집성과 빈번한 상호접촉, 이들에 대한 비인간적 인 대우는 동원구조(mobilizing structures)를 형성하여 갈등의 잠재적 기반이 되었 다. 8‧10 당일의 사건은 적대적 폭발(hostile outburst)의 양상을 지녔는데, 초기 대책위 단계 이후 전체 과정을 종합해보면 주민항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 시 봉기의 양상을 띤 이 군중행동을 항쟁이라고까지 부를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의 행동이 권력집단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추상적 지배구조의 변화를 목표로 하면 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정부의 몇몇 정책에 대한 단순 항의와 분노에서 촉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군중들이 일시적인 흥분으로 인해 분노가 폭발하기는 했으나 서울시 측이 요구조건을 수락하자 당일 하루의 시위에서 끝나고 말았으며, 당일 의 군중들의 행동도 이후의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할 정도로 다분히 일규(一揆)적 이고 표출적이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사건의 개요 1) 사건의 전개과정 2) 사건 이후의 변화 3. 집합행동(collective behavior)으로서 ‘광주대단지’ 사건의성격 1) 구조적 조건 2) 사건 참가자의 주체적 조건 3) 사건의 종합적 성격 - 도시소요, 주민항거 4. 맺음말
한국공간환경학회 [The Korean Association Of Space And Environment Research]
설립연도
1995
분야
사회과학>기타사회과학
소개
한국공간환경연구회는 지난 1988년 7월 17일 그당시 한국 사회 전반에 샘솟던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기와 학술연구자 집단의 사회참여 및 진보적 실천 의지를 조직적 틀 속에 담기 위하여 54명의 연구자들이 발기하여 창립하였다. 이때 연구회 창립의 주된 목적은 한국의 공간환경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규범적 실천이론을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이후 지리학, 도시계획학, 지역개발학, 건축학, 도시공학, 조경학, 환경학, 교통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행정학 등 공간환경과 관련된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연구자들이 속속 연구회에 함께 참여하여 진보적이고 사회실천적인 다양한 학술연구 활동을 수행하여 왔다. 공간환경과 관련된 학문분야가 아주 포괄적인 관계로 연구회에서는 이들을 다시 지역경제, 토지주택, 지역정치, 환경, 문화 등의 5개 세부분과로 구분하여 각 분과마다 자율성을 가지고 깊이 있는 학술활동을 수행하여 왔다. 또한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연구회 회원들이 분과 구분 없이 참여한 특별연구팀을 구성하여 보다 구체적인 연구활동을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연구회 전체 차원에서 결집하여 심포지움 등의 활동도 수행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동안 한국공간환경연구회가 수행한 대표적인 활동들로는 분과별 연구학습, 외국이론 소개, 특정사안에 대한 공동연구작업, 월례발표회, 회보발간, 현장분석 및 보고서 작업, 저술 및 번역물 출판사업, 학술 심포지움 등이 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사회정치적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기존의 연구회 차원의 조직 구성으로는 대외적 환경 변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으며, 따라서 조직의 변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연구회 조직을 공식 학회 조직으로 새롭게 탈바꿈 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약 2년여에 걸친 내부 토론과 준비과정을 거쳐 1995년 11월 1일 한국공간환경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국공간환경학회를 출범시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