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 handelt sich in dieser Abhandlung darum, den Zusammenhang zwischen der pessimistischen Willensmetaphysik und der Trgödietheorie Schopenhauers mit Bezug auf den Begriff des Ehabenen zu erörteren und darüberhinaus die ethische Bedeutung des Trauerspiels zu betrachten. Wohlbekannt hält Schopenhauer das menschliche Leben nicht nur als den immerwährenden existenziellen Kampf, sondern auch als das Streben nach dem unsätlichen Wille. In diesem Zusammenhang besthet nach Schopenhauer die Bestimmung des Trauerspiels darin, hinsichtliche der Negativität der menschlichen Bedingungen den Menschen in die existenzielle Seite des Menschen anuschaunen zu lassen. Mit einem Wort hilft das Trauerspiel bei der Befreiung von der täuschenden Erscheinung als der Schleier der Maja, indem es den Menschen das principium individuations als die Form der Erscheinung durchschauen zu lassen. Die Erfahrungsstruktur des Trauerspiels, die über die Schrecklichkeit des Lebens hinaus ligende wohltätige Wirkung hervorbringen und ein hoher Genuß für den Zuschauer sein soll, ähnelt der Erfahrungsstruktur des Erhabenen. Sowie wir beim Anblick des unermäßlichen Natur das Gefühl des Erhabenen in der Duplizität der Lust und Unlust erfahren(Kant), wenden wir uns bei der tragischen Katastrope vom Willen zum Leben selbst ab. Sowie wir in der Erfahrung der ehabenen Natur das Gefühl haben, als ob wir ins Nichts zerfließen würden, werden wir beim Anblick der Schlicklichkeit des Lebens im Trauerspiels den Willen zum Leben aufheben und das Leben nicht mehr lieben. Die Theorie der Tragödie Schopenhauers, die das Trauerspiels als das 'Quietiv alles Wollens' zu betrachten, liegt der Ansicht Aristoteles nahe. Nach ihm erweckt beim Anblick der Tragödie das Mitleid und die Frucht das Gefühl von Katharsis. Wenn die Grenze der menschliehen Existenz bis zum Ende des Lebens gedrängt wird, wird sich der Zuschauer von der Negativität der menschlichen Existenz befreit fühlen und das Glück erfahren. Die Katharsis als ein Reinigung des Gefühls besteht gerade in den Weisen der Ekstasie. Das heißt, heben wir beim Anblick der Tragödie alles Wollens auf, und erfahren wir die freie Selbstaufhebung, die dem Menschen aus der vollkommensten Erkenntnis seines eigenes Wesen aufgent. Der Grund daür, daß die Tragödie auf dem Gipfel aller Künste liegt, besteht gerade darin, daß sie den ethischen Charakter 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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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의지형이상학과 비극의 관계를 숭고의 개념을 통해 살펴보고 더불어 예술작품으로서의 비극이 가지고 있는 윤리성 측면을 고찰하는데 있다. 주지하듯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생애를 끊임없는 실존적 투쟁으로 간주하였고 인간의 삶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추구로 엮어진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쇼펜하우어는 연극의 사명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조건의 부정성과 맞닥뜨려 삶의 실존적 모습을 직시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본다. 요컨대 비극은 개인으로 하여금 고뇌로 정화되고 승화되어, 마야의 베일인 현상에 기만되지 않고, 개별화의 원리인 현상의 형식을 간파하고, 동시에 이 원리에 근거를 둔 이기심이 사멸해 버리는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삶의 잔혹성을 넘어 ‘보다 고상한 행복’인 체념에 이르도록 해야하는 비극의 체험구조는 숭고의 체험과 유사한 면이 존재한다. 자연의 무한성 앞에서 드러나는 ‘공포’와 ‘희열’의 이중성이 숭고체험의 구조를 이루듯이(칸트), 우리가 비극적 재앙을 관람하는 경우 삶의 의지와 단절하게 된다. 마치 무한한 자연 앞에서 우리 자신이 ‘무’로 돌아감을 느끼듯이, 우리가 비극에서 연기되는 삶의 잔혹한 면을 관람하는 경우 우리는 삶의 의지를 절연하고, 삶을 더 이상 의욕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비극을 의지의 ‘진정제’로 간주하는 쇼펜하우어의 영향미학적 비극관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가깝다. 인간실존의 한계를 극한에 이르도록 몰고가면 관객은 오히려 인간실존의 부정성으로부터 벗어나 해방과 환희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탈아의 방식”에서 이뤄지는 감정의 정화가 이른바 카타르시스이다. 바로 비극에서 의지는 자율적인 자기포기를 표현하는 것으로써 끝맺게 되며, 이 때 관람객은 의지의 고유한 본질을 완전히 인식하여 욕망의 체념에 도달하게 된다. 비극이 모든 예술의 정상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비극의 이러한 윤리적 특성에 기인한다.
목차
요약문 1. 들어가는 말 2. 의지의 형이상학과 비극론 3. 숭고와 쇼펜하우어의 비극론 4. 실러의 비극론과 숭고 5. 구원으로서의 비극과 윤리 6. 나오는 말 참고문헌 Zusammenfassung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국내외적인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한국의 철학계가 이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해 나아가야만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들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되돌아 보건대 지난 수십년간 우리 철학인들의 노력으로 많은 발전이 이어져 오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한국의 철학계는 일제가 남기고 간 뿌리 깊은 구조적 왜곡의 도식적 틀로 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래에 진행되고 있는 철학 활동들의 상당한 부분이 외국 철학계의 축소판적 모방 내지는 반복에 그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현실성에 대하여 역행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들이 심각한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철학은 분명 시대와 사회의 현실적 토양에 뿌리를 둔 자생적이고 종합적인 지적 노력들의 결집장인 것입니다. 이제 한국의 철학계는 지난 날의 왜곡된 도식적 틀과, 주체성을 상실한 타성적 모방을 면밀한 비판적 반성과 함께 철저히 극복하여야 하며 새로운 시야와 태도를 가지고 우리들 현실의 심층부에 놓여 있는 문제들에 가까이 다가가야만 합니다. 진정 우리의 철학계는 근본적인 질적 전환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철학사를 되돌아볼 때, 철학은 어렵고 복잡한 시대적 전환기의 상황에 놓여질수록 더욱더 그 진가를 발휘하여 그 사회의 내면에 은폐되어 있는 총체적 구조 연관의 모습들을 드러내어 밝혀 주고 새로 운 이념과 비젼을 제시함으로써 더 진일보한 인간 실현의 공동체 형성에 기여해 왔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의 현실 상황은 어려운 문제들이 구조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난해한 장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예고하는 풍부한 다양성의 토양인 것입니다.
이 새로운 철학적 종합은, 현재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성의 토양이 아직 성숙한 문화적 종합을 이루지 못한 채 그저 혼재된 상태에 놓여져 있음으로 인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대학과 사회는 외양상으로는 풍부함에 넘치고 있고, 또 전반적인 사회 발전의 수준이 이미 산업사회의 단계를 넘어 첨단 과학 기술 정보사회에 진입하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지만, 그 내면의 문화 적이고 사회적인 과정들은 어느 틈엔가 자각하기 힘들 정도로 기술적 효율성과 자본의 논리라는 획일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일차원적인 단순성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과 문화는 이러한 일차원적인 경향에 밀려 비인간화의 황폐한 지대로 내몰리고 있는 것입니 다. 대학에서조차 철학은 잊혀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심각한 상황 때문에 철학은 자기 인식의 눈을 다시 떠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이 사회에서 어떠한 획일적 논리가 막후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 그 논리는 각 분야에서 어떠한 지식의 형태로 또 어떠한 문화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공개된 담론의 무대에 올려 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망각되고 왜곡된 우리들 존재의 본질을 다시 일깨우는 일이며, 또한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 공동체의 문 화 형성에로 나아가는 길의 시작일 것입니다.
미래의 우리의 철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현실 상황의 내면적 구조 연관의 변화하는 역동적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어 밝혀 주고 우리들 삶의 본질을 지켜 줌으로써 인간 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교육적 문화 적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철학의 과정은 우리의 철학인들 모두가 현실의 문제 의식에 공감하 고 서로의 학식과 구상들을 대화하며 뜻을 함께 모으는 가운데 서서히 결실을 맺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대화와 논의의 과정이 본래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오늘날 모든 국가들의 사회 생활이 국제적인 상호 교류와 영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한국 사회는 동서양의 문화적 교차 지점에서 매우 복잡한 다양성의 현실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을 위시한 세계 여러 나라의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철학은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 이론 들이 함께 참여하여 토론하는 집단적인 노력을 통하여 탄생할 것이며, 본 大同哲學會는 그것을 위한 대화의 중심 무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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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철학 [Journal of the Daedong(Graet Unity) Philosophical Assoc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