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 in die alte und die neue Zeit, funktioniert die Klassik als das Schatzhaus der Weisheit und den Grund der sozialistischen Norm. Aber das ist so, insofern wie sie wirt interpretieren immer wieder. Es ist die gebrauchliche Bedeutung der Interpretation, zu verstehen den Sinn der Ding auf eigenes logischen Standpunkt stehend. Daher ist das Interpretieren die Klassik das Verstehen den in der Klassik liegenden Sinn. Was ist der Sinn? Er ist der eine Rede oder eine Schrift zeigenden Inhalt: Vorstellung, Bedeutsamkeit, Absicht usw.. Weil der Sinn sehr kompliziert ist, tragen die Mißverstandnissen oft sich zu. Wir mussen die Kunst des Verstehens fordern, wenn wir etwas mißverstehen. Es ist die gebrauchliche Bedeutung des Verstehens, zu erfassen den Sinn einer Rede und einer Schrift. Wenn der Ziel des Verstehens die Vermeidung des Mißverstandnis ist, mussen wir nicht Sinn an sich verstehen, sondern die in der Rede liegende Absicht des Sprecher. Aber es ist nicht so wichtig, daß wir die in der Klassik liegende Absicht ihreres Autor erfassen. Denn die Absicht selbst des Autor kann nicht als meine Weisheit und den Grund der gegenwartigen sozialistischen Norm funktionieren, wenn auch immer er damals der einsichtigeste Philosoph war. Darum wir mussen den anderen Weg um uberzugehen zur Welt der Klassik suchen. Ich denke daß dieser neue Weg nichts anderes als die Interpretation ist. Das Interpretieren einen Text ist das Verstehen den Sinn des Textes auf eigenes logischen Standpunkt stehend. Hier ist Problematik die Parenthese ”auf eigenes logischen Standpunkt stehend“. Wir gebrauchen das Wort ”logisch“, wenn ein Denken in notwendiger Zusammenhang mit dem anderen Denken steht. Aber ein Denken kann sehr vielen Denken hervorbringen. Daher mussen wir eins von dieses vielen Denken auswahlen. Dieser Auswahl ist die Interpretation. Interpretation als Auswahl ist auch das Produzieren einen neuen Text. Wenn wir einen Text produzieren wollen, mussen wir die Reden kontextmaßig koharieren. Darum bin ich als Interpret nicht das Subjekt der Interpretation. Ich muß mich dem der Text sich interpretierenden Werdegang uberlassen. Also es ist nicht wichtig, was will ich in der Intrepretation tun, sondern wer will ich werden zu. Dies ist die philosophische Bedeutsamkeit der Interpre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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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시대를 막론하고 지혜의 보고요 사회적 규범의 근거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고전은 그것이 항상 새롭게 해석되는 한에서 지혜의 보고요 사회적 규범의 근거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해석이 중요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해석(解釋)’이란 “사물의 뜻을 자신의 논리에 따라 풀어서 이해함”을 말한다. 따라서 ‘고전 해석’은 “고전에 담겨있는 뜻을 자신의 논리에 따라 풀어서 이해함”으로 된다. 여기서는 우선적으로 ‘뜻’이라는 용어가 문제된다. ‘뜻’ 혹은 ‘의미(意味)’란 “어떤 말이나 글이 나타내고 있는 내용”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지시체(指示體), 의의(意義), 의지(意志) 혹은 의도(意圖) 등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때문에 종종 의미의 혼란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혼란은 결국 ‘오해’를 야기시킨다. 오해의 상황은 이해의 기술을 요구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의 의미는 “어떤 말이나 글의 의미를 깨쳐 앎”이다. 그러나 이해의 목표가 오해를 피하는 데 있다면, 이해란 말이나 글 자체의 의미를 깨쳐 아는 것이 아니라 말한 사람이나 글쓴 사람이 염두에 두고있는 의미를 깨쳐 아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고전의 저자들이 고전을 쓸 당시에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의미들을 잘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고전의 저자들이 아무리 훌륭한 지혜의 소유자였다 하더라도, 또 그 지혜들이 그 당시에 아무리 완벽한 사회적 규범들로서 기능했다 하더라도 바로 그 것 자체가 오늘날 나의 삶의 지혜요 우리 시대의 사회적 규범으로서 기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전에서 나의 삶의 지혜와 오늘날 요구되는 새로운 사회적 규범의 근거를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고전에 대한 우리의 접근방식을 전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것을 ‘이해’가 아닌 ‘해석’에서 찾고자 한다. ‘해석’이란 “사물의 뜻(의미)을 자신의 논리에 따라 풀어서 이해함”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 해야 할 것은 “자신의 논리에 따라”라는 삽입구이다. 논리의 형식적인 타당성은 하나의 생각과 연결 되어 나타나는 다른 하나의 생각이 필연적인 관계를 갖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런데 하나의 생각에 뒤이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생각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해석은 하나의 생각에 뒤이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다른 생각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텍스트를 소재로 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텍스트를 생산하는 일은 말이나 글을 앞뒤의 콘텍스트(context, 맥락)에 따라 정합적으로 짜 나가는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텍스트의 생산으로서의 해석은 해석자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여러가지의 의미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 선택은 자신의 개성에 따라 자의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질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해석의 주체이면서도 동시에 주체가 아니다. 나는 해석되어지는대로 나 자신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즉 텍스트 의 해석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해석의 철학적 중요성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국내외적인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한국의 철학계가 이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해 나아가야만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들이 더욱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되돌아 보건대 지난 수십년간 우리 철학인들의 노력으로 많은 발전이 이어져 오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한국의 철학계는 일제가 남기고 간 뿌리 깊은 구조적 왜곡의 도식적 틀로 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래에 진행되고 있는 철학 활동들의 상당한 부분이 외국 철학계의 축소판적 모방 내지는 반복에 그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현실성에 대하여 역행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들이 심각한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철학은 분명 시대와 사회의 현실적 토양에 뿌리를 둔 자생적이고 종합적인 지적 노력들의 결집장인 것입니다. 이제 한국의 철학계는 지난 날의 왜곡된 도식적 틀과, 주체성을 상실한 타성적 모방을 면밀한 비판적 반성과 함께 철저히 극복하여야 하며 새로운 시야와 태도를 가지고 우리들 현실의 심층부에 놓여 있는 문제들에 가까이 다가가야만 합니다. 진정 우리의 철학계는 근본적인 질적 전환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철학사를 되돌아볼 때, 철학은 어렵고 복잡한 시대적 전환기의 상황에 놓여질수록 더욱더 그 진가를 발휘하여 그 사회의 내면에 은폐되어 있는 총체적 구조 연관의 모습들을 드러내어 밝혀 주고 새로 운 이념과 비젼을 제시함으로써 더 진일보한 인간 실현의 공동체 형성에 기여해 왔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의 현실 상황은 어려운 문제들이 구조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난해한 장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예고하는 풍부한 다양성의 토양인 것입니다.
이 새로운 철학적 종합은, 현재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성의 토양이 아직 성숙한 문화적 종합을 이루지 못한 채 그저 혼재된 상태에 놓여져 있음으로 인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대학과 사회는 외양상으로는 풍부함에 넘치고 있고, 또 전반적인 사회 발전의 수준이 이미 산업사회의 단계를 넘어 첨단 과학 기술 정보사회에 진입하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지만, 그 내면의 문화 적이고 사회적인 과정들은 어느 틈엔가 자각하기 힘들 정도로 기술적 효율성과 자본의 논리라는 획일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일차원적인 단순성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과 문화는 이러한 일차원적인 경향에 밀려 비인간화의 황폐한 지대로 내몰리고 있는 것입니 다. 대학에서조차 철학은 잊혀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심각한 상황 때문에 철학은 자기 인식의 눈을 다시 떠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이 사회에서 어떠한 획일적 논리가 막후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 그 논리는 각 분야에서 어떠한 지식의 형태로 또 어떠한 문화의 방식으로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공개된 담론의 무대에 올려 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망각되고 왜곡된 우리들 존재의 본질을 다시 일깨우는 일이며, 또한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 공동체의 문 화 형성에로 나아가는 길의 시작일 것입니다.
미래의 우리의 철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현실 상황의 내면적 구조 연관의 변화하는 역동적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어 밝혀 주고 우리들 삶의 본질을 지켜 줌으로써 인간 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교육적 문화 적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철학의 과정은 우리의 철학인들 모두가 현실의 문제 의식에 공감하 고 서로의 학식과 구상들을 대화하며 뜻을 함께 모으는 가운데 서서히 결실을 맺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대화와 논의의 과정이 본래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오늘날 모든 국가들의 사회 생활이 국제적인 상호 교류와 영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한국 사회는 동서양의 문화적 교차 지점에서 매우 복잡한 다양성의 현실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을 위시한 세계 여러 나라의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새로운 철학은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 이론 들이 함께 참여하여 토론하는 집단적인 노력을 통하여 탄생할 것이며, 본 大同哲學會는 그것을 위한 대화의 중심 무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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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철학 [Journal of the Daedong(Graet Unity) Philosophical Assoc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