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澄(1581-1674 이후) 은 조선 중기 畵壇을 대표하는 畵員으로 산수, 영모 등 모든 畵目에서 고른 기량 을 발휘하였다. 특히 이징의 기량은 시를 화제로 그리는 詩意圖제작에도 발휘되어 조선 중기 시의도의 양상과 특징을 보여준다. 이징의 시의도는 조선중기 文人들의 문집 등을 통해 제작에 관한 기록과 현존하는 작품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문헌 자료를 통해선 이징이 명나라의 朱之蕃(?-1624)이 조선에 전한『千古最盛帖』을 臨 摸했고, 成宗(재위 1469-1494)이 지은〈소상팔경시〉를 화제로 한〈소상팔경도〉를 제작했으며 羅萬甲 (1592-1642)이 소장했던 石敬(16세기 중엽 활동)이 그린『畵帖』을 복원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러한 기 록을 바탕으로 이징이『千古最盛帖』을 통해 詩意圖의 구체적인 형태와 이 화첩의 주요 화풍이던 중국 吳派의 화풍을 익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현존하는 이징의〈소상팔경도〉가 여러 폭 있어 이 화제가 그에게는 익숙한 화제였을 것이다. 따라서 성종의〈소상팔경시〉를 화제로 한〈소상팔경도〉역시 현재 전 하는 다른 작품들과 유사한 형식이었을 것으로 본다. 석경이 그린『畵帖』을 복원했다는 기록을 통해 이 징은 李荇(1478-1534)의 시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한 시를 화제로 시의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이징의 시의도로는 趙光祖(1482-1519)의 題畵詩를 화제로 그린〈蘭竹屛〉과 鄭汝昌(1450-1504) 의 시〈岳陽〉을 화제로 하여 그린〈花開縣舊莊圖〉가 있다〈. 난죽병〉은 후학들이 조광조의 학덕과 곧은 절 개를 기릴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화면에 표현된 난과 대나무는 강약이 절제되어 유연하며, 농묵과 담 묵의 혼용으로 먹색의 변화를 주어 조선 중기의 시대 양식을 보여준다. 〈난죽병〉을 통해 이징은 詩가 갖 는 관념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각적 이미지는 물론 청각, 후각적 이미지도 시각화하며 화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화개현구장도〉는 정여창의 시〈악양〉을 화제로 그의 옛 주거지를 그린 것이다. 특히 實景을 詩句에 의존해 勝景의 관념 산수의 틀로 환치해 그려졌다는 점에서 문학과 회화의 주된 소재였던‘瀟湘 八景’에 대한 이징의 인식과 이와 관련된 도상적 친연성을 찾을 수 있다. 이상에서 논의 한 이징 시의도의 특징은 첫째, 시의도의 화제가 된 시들은 조선 문인들의 시와 제화시 가 주를 이루었다. 둘째, 畵題가 된 시들은 개인적인 상념이나 감상등의 서정적인 표현을 넘어 당시의 사 회상을 보여준다. 셋째, 왕공 사대부의 주문에 의해 그려졌다. 넷째, 시의도의 화면 형태는 시와 그림이 각각의 화면에 분리된 것이 많다. 다섯째, 시의도의 화목은 산수화, 사군자가 주를 이루었다. 戰亂, 朋黨, 士禍등을 겪으며 변화하는 사회, 그 혼란과 폐해를 딛고 새로운 틀을 짜는 시대의 중심에 서 李澄은 그림을 통해 시대를 대변했다. 특히 이징의 시의도는 조선 중기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조선 후기 화단에서 다양한 화제로 활발하게 그려진 시의도의 초기 형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악은 우리 민족 최상의 예술품인 토함산 석굴암이 위치하는 곳이고, 동시에 조선시대 이안눌의 동악시단이 위치한 서울의 남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종교적 예술성과 학문적 창조성을 깨닫게하며, 나아가 우리 민족미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미술사학계의 자양분이 되고자 함에 설립의 목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