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article aims to re-examine Father Yang-eop Choi's itinerary to Macao and his deathplace. Yang-eop Choi(Thomas) left Seoul for Macao to study to become priest with two other seminarists, Bang-je Choi(Francisco Xavier) and Dae-geon Kim(Andreas), on Dec. 3rd, 1836, and arrived there on June 7th, 1837. This is the journey taken by the first Korean seminarists, who were educated in western way for the first time in Korean history. This is also a part of history of Korean Catholic priest education. Father Choi passed away on June 15th, 1861 and was buried, and years later his body was moved to Baeron. His itinerary to Macao has not been fully investigated yet by scholars, and also the whereabout of his exact deathplace remains speculative. First, it is discovered that Thomas Choi and his two fellow students left on Dec. 3rd, 1836 and reached Bianmen(邊門, so called 柵門) on Dec. 28th, and they met St. Chastan, Joseph Ouan and two guides, Mariano Touan and Joakim Tchen. It is also showed that their journey continued from Bianmen to Shenyang(瀋陽), Majiazi(馬架子), Xiwanzi(西灣子) and Changzhi(長治), with the help of the two guides. However, not enough records have been found yet to figure out the rest of the itinerary to Macao. On Father Choi's deathplace three suggestions have been made so far: a Kong-so(Catholic community) in Jinchun, a pharmacy in Moon-gyoung, and Baeti Kong-so. I try to refute two other claims and argue that one Jinchun Kong-so must have been the place where Father Choi passed away and was buried at first. It is because the record made by Father Gyu-ryang Jeong, who himself listened to people of the exhumation time, is deemed the most reliable. The exact deathplace is not mentioned in the records of Father Pourthié's who was present at Father Choi's death, or of Father Féron's who was told of the story. Still according to Pourthié's note of distances we can include all Kong-sos in Jinchun for the possible deathplace. It is probable that the Kong-so where Father Choi passed away and was buried was a small town, hardly known even to the missionary in charge of the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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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12월 3일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최양업(토마스)과 동료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은 다음해 6월 7일 그곳의 조선대목구 신학교에 도착하였다. 이 유학로는 조선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받기 위해 마카오까지 가야만 했던 신학생들의 첫 여정으로, 첫걸음을 뗀 천주교 사제 양성사의 한 과정을 규명한다는 교회사의 의미도 담고 있다. 조선 신학생들은 1836년 12월 28일 중국 변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선 선교사 샤스탕(J. Chastan) 신부와 그를 인도해 온 왕 요셉, 서만자의 안내자 Touan 마리아노와 Tchen 요아킴을 만나게 된다. 이후 신학생들은 중국인 안내자들을 따라 요녕성의 심양, 내몽고의 마가자, 하북성의 서만자를 거쳐 산서성의 장치에 도착하였다. 그런 다음 왕 요셉 은 장치에 남고, 서만자의 안내자 2명이 마카오까지 조선 신학생들을 인도하였다. 이처럼 최양업 신부와 동료 신학생들의 유학로는 ‘변문-심양-마가자-서만자-장치’로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장치까지의 유학로만 밝힐 수 있었고, 이후의 여정은 육로를 택했다는 것 외에는 추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1861년 6월 15일에 선종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요 가매장지에 대해서 는 진천 공소 선종설, 문경 약국 선종설, 배티 선종설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대한 근거 자료는, 정규량 신부의 전문 내용, 최상종이 기록한 집안의 전승, 유영근 신부의 기록 등인데, 이 중에서 최상종의 기록은 최 신부의 선종지 가매장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 등 몇 가지 중요한 약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유 신부의 기록도 훗날 자신의 의견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발견된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이장될 때 목격했을 최경신의 증언을 직접 듣고 기록한 정규량 신부의 ‘진천 공소 선종설’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 한편 최양업 신부의 선종을 직접 목격한 푸르티에(J.A. Pourthié) 신부의 기록, 그 사실을 전해들었던 페롱(S. Féron) 신부의 기록에는 선종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없다. 다만, 푸르티에 신부는 자신의 거처가 있던 배론에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까지의 거리를 ‘17리외 혹은 17~18리외’로 기록했는데, 이 거리 개념은 <대동여지도> 상에서 약 214~226리가 된다. 그렇다면 배론에서 가장 먼 진천의 배티 공소(교우촌)을 포함하여 모든 진천 공소들은 <대동여지도> 상에서 220리 이내에 분포되어 있으므로 위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기록에 나타나는 박해기의 진천 공소(교우촌)들은 이미 이 지역을 순방한 적이 있던 페롱 신부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 신부의 선종지를 자신이 알지 못한 ‘한 작은 교우촌’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가 진천의 어느 공소에서 선종했다면, 그곳은 담당 선교사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최양업 신학생의 유학로 1. 기존의 추정 경로와 문제 제기 2. 마카오 유학로의 안내자 3. 유학로 규명과 남은 과제 Ⅲ.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1. 진천 ․ 문경 ․ 배티 선종설과 문제 제기 2. 기존 연구와 진천 선종설 검토 3. 선종지 진천 공소와 남은 과제 Ⅳ. 맺음말 [참고문헌]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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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회사연구소 [Suwon Research Institute of Catholic History Ha-nam, Korea]
설립연도
2003
분야
인문학>기독교신학
소개
◎ 설립취지
"수원교회사연구소"는 천주교 수원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이하여 수원교구와 한국교회의 역사를 연구하고, 신앙 선조들의 삶과 순교영성을 발굴하여, 이를 널리 알리고 후대에 전함으로써 한국 가톨릭 교회의 신앙과 문화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2003년 1월 1일 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님이 설립하셨습니다.
◎ 연구소 현황
초대 연구소장은 구산성지 주임신부인 정종득 바오로 신부가 맡게 되었으며,
연구소의 위치는 구산성지 내에 있습니다. 원활한 연구소 운영을 위해 2006년 2월 현재 7명의 연구위원과 6명의 운영위원으로 구성되어 소장의 업무를 보좌하고 있으며, 3명의 연구원이 교회사연구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 향후 연구소의 운영방침
교구 내 순교성지 및 순교자의 생애, 각 성지의 신앙적 유산을 발굴하고 이를 정리하며, 아직 개발되지 않은 교회사적지 및 순교자를 발굴하여 순교영성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신임 연구원들과 동호회원을 대상으로 매월 둘째주 토요일 한국천주교회사 월례 강좌를 실시한 후 신앙적 나눔을 가지고, 년 1~2회 학술심포지엄과 성지순례, 특별강연 등을 실시하여 순교신심을 고취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교구 내 각 본당이나 공소, 성지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연구소에 위탁하여 오는 작업도 수행할 것입니다.
간행물
간행물명
교회사학 [Research Journal of Catholic Church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