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숙소의 밤」은 조선의 대표적 프롤레타리아 문학자이자 이론가인 한설야의 초기작품으로 만주일일신문(1927.1.26~27)에 일본어로 발표된 텍스트와 조선지광(1928.1)에 한국어로 발표된 텍스트가 있다. 문학습작기에 자연주의문학을 모방하여 창작된 일본어판 「합숙소의 밤」은 엿보기를하는 남자 주인과의 거친 성욕을 그린 자연주의계열 소실이다. 그에 반해그 1년 후에 같은 제목으로 투쟁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발표한 한국어판「합숙소의 밤」은 ‘만주’ B시 탄광의 조선인 광부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적으로 그리고 있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이다. 본고에서는 이 두 텍스트가발표된 시기의 정세적, 문단적 상황을 배경으로 같은 「합숙소의 밤」이라는 제목을 붙여, 푸순탄광이라는 같은 장소를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두 텍스트가, 그 내용도 표현언어도 완전 다르다는 것을 문제시하였다. 나아가 텍스트에 산재돼 있는 실제의 사건들을 추적하여 작가의 정치적 의도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만주국’ 이전, 조선의 프롤레타리아문학자에게 있어서 ‘만주’라는 공간이 갖았던 의미를 밝혔다. 공간적인 배경은 같은 ‘만주’의 탄광촌으로 하면서도 일본어판에서는 그곳이 ‘만주’라 단정할 수 없을 정도 로 ‘만주’라는 토포스가 갖는 의미는 희박했다. 그에 반해 한국어판에서 ‘만주’의 ‘탄광왕국 B시’는 조선인 탄광노동자가 파두제라는 이중착취의 고용제도하의 일본인 감독 밑에서 일하는 억압/피억압의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또한 ‘만주’는 5.30사건에서 시작되어 중국 전토에 퍼진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운동이 일어난 현장이었고, 그 속에서 조선인(‘나’)가 지도적 위치를 점해서 활동하는 장이었다. 그리고 펑위샹과 장쭤린이 각각 일본과 소련의 힘을등에 업고 대결하는 전장이었고, ‘불령선인’의 무장독립항쟁과 일본제국군의 ‘토벌’이 펼쳐지는 장이었다. 한설야는 이러한 ‘만주’에서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의 연대를 한국어판 「합숙소의 밤」 속에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1927년에 발표된 일본어판에서 ‘만주’는 소박한 문학적 모티프에 지나지 않았지만, 1928년에 발표된 한국어판에서 ‘만주’는, 민족・계급투쟁의 장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주’는 다양한 힘이 모여 길항・영합하면서 교차하고, 다양한 전쟁과 전투가 전개되는 ‘초국가적 공간’이기 때문에야말로 조선에서는 표현・실현할 수 없는 탈국가・탈민족적인 연대, 인터내셔널한 프롤레타리아트(또는 피억압민족의 민중)의 단결과 혁명을 외칠 수 있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다양한 힘이 중층적으로 교차하는 ‘만주’라는 토포스는 한설야에게 ‘만주’를 적극적으로 그리게하는 요인이 되었음과 동시에, 조선을 배경으로는 그릴 수 없는, 정치적으로 제약된 한계를 돌파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만주는 우리들에게 전설의 땅입니다. 19세기말까지 조선의 식자들에게 외면되었던 이곳은 신채호선생에 의해 민족의 발상지로, 한민족 역사의 중심무대로 나타났던 곳이고, 해방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곳입니다. 또한 남북한 지도자들을 잉태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중요한 곳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의 의미는 한국과의 관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만주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공자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학문의 변방입니다. 기실 이 곳은 지난 수백년간 동아시아 변동의 핵이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여러 융합을 시험했습니다. 유목문화와 유교문화, 혹은 티벳불교와 회교, 유교, 혹은 여러 민족의 접합을 시도, 이것을 토대로 세계최대의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말 이 곳은 흥기하는 러시아와 기타 서양열강, 그리고 일본 세력이 마주친 접점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이 곳을 손에 넣으면서 1930년대의 기록적인 번영을 구가했고, 나아가 대동아공영과 서양과의 최종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이 곳에 투자한 세계적 수준의 중화학단지는 전후 중국의 중공업단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만주는 중국 국공내전 최후의 쟁패가 결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이곳은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조선인, 일본인, 몽골인들이 같이 거주한 가히 인종전시장이었습니다. 그야말로의 국제도시 하얼빈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유태인, 프랑스인, 독일인, 폴랜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들도 섞어 살았습니다. 편협한 민족경계를 넘는 담론이 구사된 곳이었습니다. 제한적인 수준이며,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세계화의 개념 비슷한 것이 제시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만주는 간단하지 않은 곳입니다. 근년에 만주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주학회를 결성했습니다. 전공배경도 중국사, 일본사, 역사사회학 등에 두루 걸쳐지지만, 만주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평생 만주연구에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