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의 12차 통신사행은 조선시대 마지막 통신사로서 역지되고 축소된 와해와 변질의 통신사로, 혹은 믿음의 교류로, 반대로 비교린적 폐쇄적 교류로 다양하게 이해되었다. 필담집 「대례여조」는 사상적 변화 속에 새롭게 등장한 일본의 관정 주자학자들과 개국 이래 400년간 주자학의 적통임을 자부하던 조선의 사행원들 간의 필담 창화한 내용의 일본 측 기록이다. 「대례여조」에서 이들 간의 주자학 담론을 살핌으로 조일의 다른 함의의 주자학의 실상과 양국이 얻고자 한 바를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것은 12차 통신사행의 특징을 읽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19세기초 마지막 통신사행의 주자학 담론에는 일본 측의 주자학으로의 변화를 천명함과 조선 측의 환영하는 태도로 우호적인 분위기와 공경과 신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주자학 담론에서 양측은 서로 다른 관심과 함의를 가지고 대화하고 있었다. 일본은 행동의 실제에 적용하는 문제에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고 조선은 개인적 수기(修己)의 문제로 해명하고자 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즉, 조선은 주자학의 형이상학을 더 깊이 추구한 도덕론의 강조로 나아가고 일본은 주자학의 형이하학에 치중하여 사회적 윤리를 세우기 위한 치세론으로 나아간 주자학 담론의 장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다른 주자학의 담론 가운데서 양측의 기대도 각자 다른 것이었다. 서로 다른 함의의 주자학 담론을 알아차린 조선 측에서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조선의 주자학적 영향이 계속되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일본 측에서는 빈주읍양의 예로 접대하는데 주자학 담론을 활용함으로써 일본의 높아진 국체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