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지역은 중국공산당 무장혁명의 전략기지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전반에 있어 중국 국내의 첨예하고도 복잡한 전쟁과 정치적 충돌이 극에 달했던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동북지역을 혁명전쟁과 국가건설을 완성할 수 있는 본부로 간주했기 때문에, 전쟁상태에 있는 적군과 그 동맹군인 미군이 이를 뒤흔드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중국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을 도와 미군에 대항한 것은, 중세(中世) 이래 중국대륙의 정권이 순망치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남 방향의 해상 위협에 공동 대응해 온 전통적인 정략(政略) 및 전략에 비교해 볼 때 완전히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중국의 참전문제에 있어서의 지나친 ‘피동론’이나 ‘냉전중심주의’는, 자칫하면 국가의 전략적 이익이라는 요소를 경시하는 경향을 초래할 수 있다. 20세기 1950년대 초, 한반도의 남북내전이 압록강변까지 번짐에 따라, 마침내 갓 정권을 잡은 중국의 지도자로 하여금 참전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이래, 이 전쟁에 관한 연구는 심도 있게 진행되었으나, 중국이 참전을 결정하게 된 과정, 특히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지역전략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탐구를 할 것이다.
목차
1. 기존의 연구 성과와 문제점 개술(槪述) 2. 중공 무장투쟁과 그 전략중심의 전이(轉移) 개황 3. 20세기 중국전쟁사와 동북지방의 전략적 지위 분석 4. 중국과 한반도 국가전략 관계의 역사적 고찰 5. ‘압록강’으로부터 ‘평양~원산선’까지의 전쟁 지도(指導) 국문초록
키워드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한 이유중국동북지역전략항미원조전쟁이웃나라를 돕고 우호적으로 대하는 전통적 정책
만주는 우리들에게 전설의 땅입니다. 19세기말까지 조선의 식자들에게 외면되었던 이곳은 신채호선생에 의해 민족의 발상지로, 한민족 역사의 중심무대로 나타났던 곳이고, 해방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곳입니다. 또한 남북한 지도자들을 잉태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중요한 곳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의 의미는 한국과의 관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만주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공자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학문의 변방입니다. 기실 이 곳은 지난 수백년간 동아시아 변동의 핵이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여러 융합을 시험했습니다. 유목문화와 유교문화, 혹은 티벳불교와 회교, 유교, 혹은 여러 민족의 접합을 시도, 이것을 토대로 세계최대의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말 이 곳은 흥기하는 러시아와 기타 서양열강, 그리고 일본 세력이 마주친 접점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이 곳을 손에 넣으면서 1930년대의 기록적인 번영을 구가했고, 나아가 대동아공영과 서양과의 최종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이 곳에 투자한 세계적 수준의 중화학단지는 전후 중국의 중공업단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만주는 중국 국공내전 최후의 쟁패가 결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이곳은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조선인, 일본인, 몽골인들이 같이 거주한 가히 인종전시장이었습니다. 그야말로의 국제도시 하얼빈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유태인, 프랑스인, 독일인, 폴랜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들도 섞어 살았습니다. 편협한 민족경계를 넘는 담론이 구사된 곳이었습니다. 제한적인 수준이며,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세계화의 개념 비슷한 것이 제시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만주는 간단하지 않은 곳입니다. 근년에 만주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주학회를 결성했습니다. 전공배경도 중국사, 일본사, 역사사회학 등에 두루 걸쳐지지만, 만주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평생 만주연구에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