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ethnic group)’이라는 개념은 유럽으로부터 동아시아에 이입되었다. 청나라가 건립되었을 당시에는 민족에 대한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19세기 말에 들어서야 중국에서 ‘민족’이라는 어구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당시 만주지방은 기민제(旗民制)-기인(旗人)과 민인(民人)으로 백성들을 나누어 지배하는 통치제도에 의해 통치되었고 이 시대에 두 집단의 민족적 차이는 부차적인 문제였을 뿐이었다. 20세기 초반에 접어들어 기민제가 붕괴된 후에서야 민족적 차이는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20세기에는 서로 다른 민족 집단들을 통합할만한 이데올로기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민족적 차이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비록 만주 정부가 서로 다른 민족들의 화합을 강조하고 이에 따른 정책들을 수립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정책들은 실제적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목차
1. 들어가며 2. 만주에 있어서 민족의 형성 3. 중화민국에 있어서 민족문제 4. 만주국의 민족정책 5. 마치며 국문초록
만주는 우리들에게 전설의 땅입니다. 19세기말까지 조선의 식자들에게 외면되었던 이곳은 신채호선생에 의해 민족의 발상지로, 한민족 역사의 중심무대로 나타났던 곳이고, 해방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벌인 곳입니다. 또한 남북한 지도자들을 잉태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중요한 곳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주의 의미는 한국과의 관계를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만주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공자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학문의 변방입니다. 기실 이 곳은 지난 수백년간 동아시아 변동의 핵이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여러 융합을 시험했습니다. 유목문화와 유교문화, 혹은 티벳불교와 회교, 유교, 혹은 여러 민족의 접합을 시도, 이것을 토대로 세계최대의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말 이 곳은 흥기하는 러시아와 기타 서양열강, 그리고 일본 세력이 마주친 접점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이 곳을 손에 넣으면서 1930년대의 기록적인 번영을 구가했고, 나아가 대동아공영과 서양과의 최종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일본이 이 곳에 투자한 세계적 수준의 중화학단지는 전후 중국의 중공업단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만주는 중국 국공내전 최후의 쟁패가 결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만주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중국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이곳은 한족, 만주족, 러시아인, 조선인, 일본인, 몽골인들이 같이 거주한 가히 인종전시장이었습니다. 그야말로의 국제도시 하얼빈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유태인, 프랑스인, 독일인, 폴랜드인, 우크라이나인, 타타르인들도 섞어 살았습니다. 편협한 민족경계를 넘는 담론이 구사된 곳이었습니다. 제한적인 수준이며,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오늘날 세계화의 개념 비슷한 것이 제시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만주는 간단하지 않은 곳입니다. 근년에 만주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주학회를 결성했습니다. 전공배경도 중국사, 일본사, 역사사회학 등에 두루 걸쳐지지만, 만주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평생 만주연구에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