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 아즈사(小野梓, 1852-1886)는 오늘의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 창립 과정과 초창기의 학교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870년(明治3) 18살 때 중국 上海에 들어가 열강들의 半식민지로 전락한 중국과 비참한 민중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구미에서 일본을 선진화시켜 일본의 독립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871년(明治4)에 미국에서 헌법과 행정법을 배웠고, 1873년(明治6)부터는 大藏省 관비 유학생으로 1874년(明治7) 초까지 영국에서 은행제도, 理財, 회계를 그리고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과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사상을 배우고 5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같은 해 9월에는 법률, 교육, 理財商業, 위생교육을 통해 국민을 계몽할 목적으로 ‘共存同衆’이 란 단체를 만들어 그 중심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이처럼 오노는 1876년(明治10) 8월에서 1881년(明治14) 10월까지 약 5년 동안 관료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계몽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중심으로 한 藩閥 세력과의 갈등으로 1881년 10월 ‘메이지 14년 정변’이 일어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1838-1922)가 정계에서 추방되자 오노는 오쿠마를 따라 관직을 사직하였다. 오노는 1881년(明治14) 봄 도쿄대학(東京大學)의 학생이던 다카다 사나에(高田早苗, 1860-1938), 아마노 다메유키(天野爲之, 1860-1938), 이치지마 겐키치(市島謙吉, 1860-1944)를 모아 정치연구 단체인 ‘오토카이(鷗渡會)’를 조직하였고, 이들 멤버를 오노가 오쿠마에게 소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오쿠마는 정치, 경제, 법률을 교육하는 一大 私學을 창립하는 구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창립된 것이 도쿄전문학교(東京專門學校)이다. 이처럼 오노는 1882년(明治15) 4월 16일에 立憲改進黨의 결당, 10월 21일에는 도쿄전문학교의 개교 등, 오쿠마와 함께 정당정치와 고등교육의 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개교식 축사에서 건학 정신으로서 ‘학문의 독립’이란 개념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 의미에는 ‘외국어에 의한 교육으로부터의 독립’과 ‘정치로부터의 독립’이 있었지만 그는 이 연설에서 ‘학문의 독립’이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선언하였다.
한국일본교육학회 [The Korea Society of Japanology, Japan Education Division Seoul, Korea]
설립연도
1985
분야
인문학>일본어와문학
소개
한국일본교육학회는 1985년 2월 27일, 한국과 일본의 교육학 연구의 정립과 발전을 목적으로 그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은 이래 지금까지 양국 교육학의 이해에 많이 기여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학 전공학자는 수천 명에 이르고 있으며, 전공의 다양성은 물론, '지역연구'의 영역 또한 매우 광범위하게 펼쳐 있다. 우리나라 교육학의 외연을 살찌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되도록 수많은 지역과 나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교육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지역교육연구의 현실은 그 지역의 다양성과 교육학적 이해에 있어서 매우 척박한 실정이다. 이런 부진한 지역연구의 현실 속에서 본 학회는 아시아 지역,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교육' 연구에 초점을 두고,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교육학계에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