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 년
1910년 ‘만주 폐렴’과 두만강 유역 이주 한인 사회의 산업 변화
[NRF 연계] 역사실학회 역사와 실학 Vol.74 2021.04 pp.5-45
...한인 사회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많은 독립지사는 이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고,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지사는 많은 역경과 고난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경제적 문제부터 질병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역경과 고난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환경의 변화’가 큰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인 삶이란 유지되기 어려웠고, 많은 독립운동지사가 기대하던 둔전 역시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주 한인은 살아남기 위해 현지 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생계 수단을 모색하였다. 질병 역시 국지적 전염을 넘어 범유행의 양상으로 나타났고, 1910년에는 이른바 중국 동북지역을 넘어 러시아, 조선,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 전염된 ‘만주 폐렴’이 발생하였다. 중국 동북지역의 한인 사회와 이를 기반으로 독립군 기지를 건설 과정 중에 독립운동지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두만강 유역 이주 한인은 지속 가능한 생계 수단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고, 수렵에서 내수산업 그리고 농업으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며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두만강 유역 이주 한인 사회는 일본과 중국의 종속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독립운동기지의 인적 물적 근거지 역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였고, 1919년에는 3.1운동을 비롯해 1920년 이후 독립전쟁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는 두만강 유역의 경제적 상황과 1910년 만주 폐렴의 확산을 중심으로 당시 독립운동지사가 직면하였던 현실적인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중국 동북지역 흔히 간도라고 불리는 지역 중 두만강 유역은 한인 사회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 이후 많은 독립지사는 이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고,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지사는 많은 역경과 고난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경제적 문제부터 질병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역경과 고난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환경의 변화’가 큰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계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인 삶이란 유지되기 어려웠고, 많은 독립운동지사가 기대하던 둔전 역시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주 한인은 살아남기 위해 현지 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생계 수단을 모색하였다. 질병 역시 국지적 전염을 넘어 범유행의 양상으로 나타났고, 1910년에는 이른바 중국 동북지역을 넘어 러시아, 조선,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 전염된 ‘만주 폐렴’이 발생하였다. 중국 동북지역의 한인 사회와 이를 기반으로 독립군 기지를 건설 과정 중에 독립운동지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두만강 유역 이주 한인은 지속 가능한 생계 수단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고, 수렵에서 내수산업 그리고 농업으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며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두만강 유역 이주 한인 사회는 일본과 중국의 종속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독립운동기지의 인적 물적 근거지 역할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하였고, 1919년에는 3.1운동을 비롯해 1920년 이후 독립전쟁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는 두만강 유역의 경제적 상황과 1910년 만주 폐렴의 확산을 중심으로 당시 독립운동지사가 직면하였던 현실적인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In the Tumen river basin in the area often called Jiandao in the Northeast region in China, Korean society was formed earlier on. Centering around this Korean society, since Japan’s annexation of Korea in 1910, many independence movement patriots would construct a base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in this process, independence movement patriots encountered many adversities and hardships. These appeared in various forms, e.g., economic difficulties and endemic diseases. At the center of adversity and hardship, a new environment was the core. In the process of gradual inclusion in the capitalist world order, diseases also appeared as a pandemic beyond an epidemic, which is local infection, and in 1910, they appeared as the form of the so-called ‘Manchurian Plague’ as well as cholera. In this process, the process of construction of a base for the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centering around Korean society was, of course, closely related to public hygiene. This public hygiene discouraged the attempt to build the base for the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Baekseo Nongjang also was one of such attempts and frustration. Koreans who immigrated to the Tumen river basin also made efforts to find a sustainable means of living, which were concretized, changing from hunting through the industry for domestic demand to the agricultural industry. In this process of change, the Korean society immigrated to the Tumen River basin broke away from the situation dependent on Japan and China and grew up to the level of serving as human and material base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eveloped in Longjing, etc. In 1919 and subsequent armed struggles were set in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that had grown up to the level as a background. This study would investigate realistic adversities and hardships the then independence movement patriots faced, focusing on the economic situation in the Tumen River basin and Manchurian Plague in 1910.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that got over these adversities and hardships became an important foundation as a base for the subsequent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process of growth based on the war of independence in 1920.
모빌리티 극대화 전략으로서의 재이주: 파독광산근로자의 캐나다 진출과 한인사회에의 기여
[NRF 연계] 성결대학교 다문화평화연구소 다문화와 평화 Vol.15 No.1 2021.04 pp.29-58
...한인공동체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의 역할과 기여에 관해서 분석하였다. 주요 연구방법으로는 2020년 2월 초중순 경에 캐나다 토론토 현지조사를 통해서 21명의 파독광산근로자 출신 한인들을 대상으로 심층면담을 실시하였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면담자들은 귀국 후의 경제적 불투명, 독일에서의 장기체류의 어려움, 그리고 당시 수용적이었던 캐나다 이민 정책 등의 사유로 캐나다로 건너갔고 재이주와 정착에 있어서 파독인력 간에 형성된 초국적 이주네트워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캐나다 이주 초기에는 주로 직장생활을 통해 창업자본을 축적했고 이를 통해 자영업(특히 편의점)을 시작하였다. 한국에서의 가족 초청과 다양한 한인단체 활동을 통해서 한인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고 많은 기여를 하였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논문에서는 1960-1970년대 한국에서 독일로 1차 이주를 떠났다가 캐나다로 2차 이주를 한 파독광산근로자들의 초국적 이동에 주목하여 이들의 이주 동기, 이주 경로, 사회경제적 정착과정과 재캐나다한인공동체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의 역할과 기여에 관해서 분석하였다. 주요 연구방법으로는 2020년 2월 초중순 경에 캐나다 토론토 현지조사를 통해서 21명의 파독광산근로자 출신 한인들을 대상으로 심층면담을 실시하였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면담자들은 귀국 후의 경제적 불투명, 독일에서의 장기체류의 어려움, 그리고 당시 수용적이었던 캐나다 이민 정책 등의 사유로 캐나다로 건너갔고 재이주와 정착에 있어서 파독인력 간에 형성된 초국적 이주네트워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캐나다 이주 초기에는 주로 직장생활을 통해 창업자본을 축적했고 이를 통해 자영업(특히 편의점)을 시작하였다. 한국에서의 가족 초청과 다양한 한인단체 활동을 통해서 한인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고 많은 기여를 하였다.
This article focuses on South Korean migrants who were initially dispatched to Germany as temporary coal mine workers in the 1960s and 1970s but who relocated to Canada after their contracts had expired. The research analyzes their (re)migration motivations, routes, and socioeconomic adaptation processes and examines their contributions to the creation and development of the Korean Canadian community. In early and mid-February, 2020, interview data were collected from 21 Korean ex-miners residing in Toronto. The findings show that Korean ex-miners re-migrated from Germany to Canada due to the economic uncertainty they would have encountered if they had returned to Korea, the difficulty of extending their residency in Germany, and a receptive Canadian immigration policy at the time. The transnational migration networks forged among mobile Korean miners shaped their migration and resettlement experiences in Canada. After their arrival in Canada, most Korean ex-miners were incorporated into the Canadian labor market as blue-collar workers; however, eventually, most became owners of small businesses, with a disproportionate number becoming owners or managers of convenience stores. Korean ex-miners invited their families from Korea to join them, and they founded or participated in various Korean organizations. Thus, they made critical contributions to the formation and growth of the Korean Canadian community.
[NRF 연계]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연구 Vol.96 2021.03 pp.341-360
...한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른바 간도문제를 야기했으나 실제로 만주 지역의 철도부설권, 광산개발권 등 이권을 침탈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20세기 초 간도 한인 관리 문제를 둘러싼 중ㆍ일간의 논쟁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었던 현지 한인들에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찍이 한청조약의 체결과정에서부터 제기된 ‘邊民(墾民)’의 ‘安業’ 문제가 ‘간도협약’이 체결된 후에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협약의 당사자인 중ㆍ일 양국은 일본이 중국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중국은 일본에 만주5안의 이권을 넘겨주었다. 그 과정에 한인 재판권을 대표로 하는 관리권 문제는 일본이 吉會鐵道 부설권 등 이권을 얻기 위한 협상 카드로 사용되었을 뿐 실제로 한인을 보호하기 위한 논의는 진행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商埠의 개방을 둘러싼 논쟁도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이권을 놓고 벌인 흥정의 일환이었을 뿐 진정으로 “국가 간 敦崇和好하고 각자 인민을 惠顧하기 위해” 진행한 담판은 아니었다. 결국 중ㆍ일간 ‘간도협약’이 체결된 후에도 현지 한인들의 불안한 처지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는바 법적 지위 및 재산권을 포함한 그들의 제반 권리의 실현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차 대전 종전 후에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적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한ㆍ중 관계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장기간의 조공ㆍ책봉 관계 하에서 ‘自主之國’의 위치에 놓여 있던 조선은1899년 청나라와 韓淸通商條約을 체결하면서 서구 열강과 동격인 ‘平行之國’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는 近代 한중 외교가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가 간 외교 관계 중에서 무역 관계 즉 이른바 通商 규칙을 정하기 위한 조약의체결도 중요하지만, 通商의 영역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기 위한 국경선의 획정이나그에 따른 영토 문제도 중요하고, 각자 영토 범위를 벗어나 상대방 영토 내에 거주, 생활하는 僑民(이주민)에 대한 관리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乙巳勒約 체결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국방권을 강탈해간 일본은 韓國統監府를세워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제국주의 침략을 확대해 갔다. 일본은 간도 한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른바 간도문제를 야기했으나 실제로 만주 지역의 철도부설권, 광산개발권 등 이권을 침탈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20세기 초 간도 한인 관리 문제를 둘러싼 중ㆍ일간의 논쟁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었던 현지 한인들에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찍이 한청조약의 체결과정에서부터 제기된 ‘邊民(墾民)’의 ‘安業’ 문제가 ‘간도협약’이 체결된 후에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협약의 당사자인 중ㆍ일 양국은 일본이 중국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중국은 일본에 만주5안의 이권을 넘겨주었다. 그 과정에 한인 재판권을 대표로 하는 관리권 문제는 일본이 吉會鐵道 부설권 등 이권을 얻기 위한 협상 카드로 사용되었을 뿐 실제로 한인을 보호하기 위한 논의는 진행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商埠의 개방을 둘러싼 논쟁도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이권을 놓고 벌인 흥정의 일환이었을 뿐 진정으로 “국가 간 敦崇和好하고 각자 인민을 惠顧하기 위해” 진행한 담판은 아니었다. 결국 중ㆍ일간 ‘간도협약’이 체결된 후에도 현지 한인들의 불안한 처지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는바 법적 지위 및 재산권을 포함한 그들의 제반 권리의 실현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차 대전 종전 후에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NRF 연계]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 경계 Vol.118 2021.03 pp.115-143
...한인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적국 거류 외국인으로 간주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하와이 한인들이 일본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하와이 한인2세 또한 적국 거류 외국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들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시점은 전쟁이 시작한지 16개월 지난 시기부터였다. 하와이 한인2세는 전쟁에 늦게 참여하였지만, 큰 공을 세웠고, 전쟁 중에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박존은 노르망디 전투에 활약했는데, 전쟁 도중 큰 부상을 입어 치료 중 전사하였다. 한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노역에 시달리던 한인2세 군인들을 구제해줄 것을 요청한 것을 보면 강제적으로 입대한 이들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후방 지원 부대에 배치 되어 노역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는 Korean Eagle Party라는 일종의 군사원호회를 조직하였고, 이 조직은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진행하면서 한인사회에서의 무장투쟁 준비를 이어갔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아시아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주 한인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적국 거류 외국인으로 간주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하와이 한인들이 일본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하와이 한인2세 또한 적국 거류 외국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였다. 이들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시점은 전쟁이 시작한지 16개월 지난 시기부터였다. 하와이 한인2세는 전쟁에 늦게 참여하였지만, 큰 공을 세웠고, 전쟁 중에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박존은 노르망디 전투에 활약했는데, 전쟁 도중 큰 부상을 입어 치료 중 전사하였다. 한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노역에 시달리던 한인2세 군인들을 구제해줄 것을 요청한 것을 보면 강제적으로 입대한 이들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후방 지원 부대에 배치 되어 노역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는 Korean Eagle Party라는 일종의 군사원호회를 조직하였고, 이 조직은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진행하면서 한인사회에서의 무장투쟁 준비를 이어갔다.
러시아 이주 한인의 체제 적응양상 연구—『레닌기치』 수록 서사를 중심으로
[NRF 연계] 현대문학이론학회 현대문학이론연구 Vol.84 2021.03 pp.5-31
...한인촌을 이루고 정착해나가는데, 1910년대 중반에는 그 수가 8만5천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국경지방의 한인 이주민을 경계하여 내륙지방 아무르강 중앙지역으로 분산 이주케 하고, 소비에트 정부는 연해주의 이주 한인촌을 집단농장 ‘콜호스’(kolkhoz)로 건설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연해주 지역 이주 한인에게 콜호스(집단농장)는 단순한 공동 노동의 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활, 교육, 문화, 여가 생활의 기반이고 경제 공동체였으며, 정치적으로는 한인 사회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인 공동체인 콜호스는 소련의 동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다른 소수민족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공적인 집단농장 체제를 구축하여 화려한 성과물을 거둘 수 있었다. 게다가 원래 농업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김만삼, 황만금 등의 노력 영웅들을 대거 배출하여 소비에트의 신화를 만들어내며 타민족의 모범 사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콜호스라는 집단농장 체제가 이주 한인(고려인)들이 이루어낸 성과 만큼 내부적으로 고려인들을 결속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충분히 하였는지의 문제는 재고가 필요하다. 콜호스 체제는 고려인들 자신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축된 ‘강제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만, 고려인들이 연해주 시기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이후에도 ‘강제된’ 집단농장 체제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분산 이주와 강제이주의 역사를 잊고 소련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현실 인식, 소수민족 차별이라는 불안감과 조바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글은 1860년대 처음 국경을 넘어 러시아 땅에 발을 디딘 한인들의 연해주 정착과정과 농업집단 체제에 대한 이주 한인들의 적응양상을 살펴보고, 이것이 그들의 이주 역사와 문화에 어떻게 기능하는지 밝혀보고자 한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1월 소수의 조선인이 연해주 남(南)우수리스크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시작, 이후 기근과 봉건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지친 농민들의 이주가 급증한다. 이후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며 곳곳에 한인촌을 이루고 정착해나가는데, 1910년대 중반에는 그 수가 8만5천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국경지방의 한인 이주민을 경계하여 내륙지방 아무르강 중앙지역으로 분산 이주케 하고, 소비에트 정부는 연해주의 이주 한인촌을 집단농장 ‘콜호스’(kolkhoz)로 건설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연해주 지역 이주 한인에게 콜호스(집단농장)는 단순한 공동 노동의 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활, 교육, 문화, 여가 생활의 기반이고 경제 공동체였으며, 정치적으로는 한인 사회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인 공동체인 콜호스는 소련의 동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다른 소수민족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공적인 집단농장 체제를 구축하여 화려한 성과물을 거둘 수 있었다. 게다가 원래 농업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김만삼, 황만금 등의 노력 영웅들을 대거 배출하여 소비에트의 신화를 만들어내며 타민족의 모범 사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콜호스라는 집단농장 체제가 이주 한인(고려인)들이 이루어낸 성과 만큼 내부적으로 고려인들을 결속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충분히 하였는지의 문제는 재고가 필요하다. 콜호스 체제는 고려인들 자신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구축된 ‘강제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만, 고려인들이 연해주 시기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이후에도 ‘강제된’ 집단농장 체제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분산 이주와 강제이주의 역사를 잊고 소련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현실 인식, 소수민족 차별이라는 불안감과 조바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글은 1860년대 처음 국경을 넘어 러시아 땅에 발을 디딘 한인들의 연해주 정착과정과 농업집단 체제에 대한 이주 한인들의 적응양상을 살펴보고, 이것이 그들의 이주 역사와 문화에 어떻게 기능하는지 밝혀보고자 한다.
The migration of Koryoin to Russia began in January 1863 when a small number of Koreans migrated to the southern Ussuriysk region of the coastal region, and the migration of farmers tired of the famine and structural absurdity of the feudal society rapidly increased. They cultivate the wasteland, build farming, and establish Korean villages in various places, and in the mid-1910s, the number reached 85,000. However, the Russian authorities warn of Korean immigrants in the border regions and disperse them to the central region of the Amur River in the inland, and the Soviet government actively promotes a policy of constructing a Korean immigrant village in the coastal region as a collective farm called kolkhoz. For the Koreans, Kolkhoz(collective farm) was not just a place for joint labor. It’s a life. education. culture. It was the basis for leisure life, an economic community, and politically as a symbol of the status of Koreans. The Korean community, Kolhoz, actively embraced the Soviet assimilation policy and built a successful collective farming system that was incomparable with other ethnic groups, and was able to achieve splendid results. In addition, because he had excellent talents in the field of agriculture, he was able to produce a large number of heroes such as Mansam Kim and Mangeum Hwang to create Soviet myths and to be recognized as exemplary examples of other people. However, it is a question to be reconsidered whether the collective farm system played a role as a medium to internally unite the Koreans as much as the brilliant achievements they achieved. Looking at the background of forced migration, the collective farm was not an organization created naturally by the interests and needs of the Koreans themselves, but rather a space that was established with external motives and artificially “forced” by the Soviet power. The reason why the Koreans were able to successfully lead the “forced” collective farm system seems to have been largely driven by anxiety and impatience that the history of forced migration should be forgotten and assimilated into the Soviet Union. Therefore, this article describes how Koreans, who first crossed the border in the 1860s, settled in the Maritime Territory, and how Koreans responded to the agricultural group system implemented by the Soviet Union in their migration history, taking into account the political and social context of the time. It is in tracking whether it has been introduced and adapted.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와 미국 이민법의 네트워크 — 한인 사진신부 사례를 중심으로(1910-1924)
[NRF 연계]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 역사 Vol.129 2021.03 pp.229-261
...한인 사진신부 집단이 어떠한 배경하에 발생하였고 이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미국사회의 어느 지점에 이 여성들이위치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의 인도적 조항으로 일본인 사진신부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이후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진신부들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 하에 한인 사진신부는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의부속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라는 차원과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일본정부가 미국내 자국민을 보호하는 한편 조선의 노동력과 독립자금의 진원지였던 미주 한인사회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한인 사진신부의 여권발급을 허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인 사진신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 집단의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발생한 아시아여성 간 위계화 문제와도 연관성이있다. 이는 1875년에 제정된 페이지 법(Page Act)에서 그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이민금지를 목표로 제정된 페이지 법은 백인사회의 아시아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여 동아시아 출신 여성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시각은 이후 아시아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이민법으로 이어졌다. 페이지 법으로 시작된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시아여성 간 일련의 경합과정은 미국사회에서 이민법으로 재현되는 인종·민족·젠더적 차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 상황 속에 등장한 한인 사진신부는 여타 사진신부들과는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24년까지의 제한된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와 조선과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맥락 하에 등장하였고 무엇보다 이 여성집단은 이중으로 주변화된 이민자들이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연구에서는 20세기 초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사진신부 집단이 어떠한 배경하에 발생하였고 이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미국사회의 어느 지점에 이 여성들이위치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907년에서 1908년 사이 미국과 일본이 맺은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의 인도적 조항으로 일본인 사진신부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이후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사진신부들도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 하에 한인 사진신부는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의부속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일본의 식민지적 통제라는 차원과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일본정부가 미국내 자국민을 보호하는 한편 조선의 노동력과 독립자금의 진원지였던 미주 한인사회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한인 사진신부의 여권발급을 허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인 사진신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인 사진신부 집단의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발생한 아시아여성 간 위계화 문제와도 연관성이있다. 이는 1875년에 제정된 페이지 법(Page Act)에서 그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이민금지를 목표로 제정된 페이지 법은 백인사회의 아시아여성에 대한 편견이 작동하여 동아시아 출신 여성의 이민을 제한하는 법으로 적용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시각은 이후 아시아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이민법으로 이어졌다. 페이지 법으로 시작된 이민법의 변천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시아여성 간 일련의 경합과정은 미국사회에서 이민법으로 재현되는 인종·민족·젠더적 차별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 상황 속에 등장한 한인 사진신부는 여타 사진신부들과는 구별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24년까지의 제한된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외교관계와 조선과 일본의 식민주의라는 맥락 하에 등장하였고 무엇보다 이 여성집단은 이중으로 주변화된 이민자들이었다.
This research analyses the identity of the Korean picture brides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their political and social positioning in the American society. As an exceptional provision to the Gentlemen’s Agreement of 1908 between the U.S. and Japan, and as an extension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n picture brides were allowed to migrate to the U.S. starting in 1910. Under this political context, Korean picture brides tended to be regarded as an accessory to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U.S. and Japan. However, Korean brides’ migration to the U.S. coincided with Japanese colonial control and the increasing policies produc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to control Chos?n and 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Further, the migration of Korean brides is also related to the issue of hierarchy among Asian women during the transition of immigration laws from the mid-19th to the early 20th century. Starting with Page Act of 1875, a series of contestations between Asian women in the process of creating immigration laws offer a glimpse of racial, ethnic, and gender discrimination reproduced in U.S. legislation. Under these circumstances, Korean brides emerged in the contex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U.S. and Japan, and colonialism between Chos?n and Japan. From this perspective, the Korean brides were a doubly marginalized immigrant in both American and Asian societies.
재외 한인문학에 나타난 트랜스내셔널 양상 - 중앙아시아 고려인문학과 재중조선인문학의 시를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한국문학과 예술 Vol.37 2021.03 pp.121-151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한반도에 거주하다가 민족과 국가를 횡단하거나 산포되는 실존적 주체들이 대거 양산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국가 이데올로기나 민족적 프레임으로는 해명하기 어려운 정치, 사회, 문화, 문학, 철학에 대한 새로운 사유 양식이 요구된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과 영토를 횡단하는 실존적 주체들은 삶의 과정에서 장소 밖 타자성과 혼종성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양상으로 트랜스내셔널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에 본 연구는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재중조선인 시문학에 나타난 트랜스내셔널 양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시 작품은 강제 이주 후 소비에트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양과 동일화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주체를 보호하고 형성하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는 오인된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로 인해 혼란을 겪은 주체는 거주국과 고향(원동) 사이의 ‘틈새’의 공간인 ‘제3의 공간’을 탐색한다. 이후 ‘제 3의 공간 탐색’은 시간과 공간,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유동하는 공간탐색으로 이어진다. 거주국에 정착하고자 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여러 집단에 걸쳐 있는 존재인 ‘고려인’으로서의 ‘차이’를 인식하고 이를 ‘유지’하며 트랜스내셔널한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한다. 재중조선인 작가들의 시문학 작품은 중국이라는 국가적 정체성과 조선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의 차이를 횡단하면서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양상을 보인다. 동화와 비동화라는 양가성을 문학적 전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국민’에 귀속하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국가’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즉 거대 국가인 중국의 국민이면서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의 위치 사이에서 길항하면서 ‘공존’과 ‘화합’을 꿈꾸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s globalization has progressed rapidly since the modern era, a large number of existential subjects who liv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traverse or scatter nations and countries are mass produced. Therefore, a new way of thinking about politics, society, culture, literature, and philosophy that is difficult to elucidate with the existing national ideology or ethnic frame is required. Existential subjects traversing the concept of a state or nation and territories form transnational identities in various ways while experiencing heterogeneity and heterogeneity outside the place in the process of life. So,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transnational aspects of Soviet-Korean poetry in Central Asia and Chinese-Korean poetry in China. The poetry work of the Soviet-Koreans in Central Asia seeks to establish an identity in a way that protects and forms the subject in a way that shows the praise and identification of the Soviet ideology after forced migration. However, the subject who has not acquired self-identity realizes that the identity it has built up is a misrecognized illusion. As a result, the subject searches for a “third space” that is a “niche” between the country of residence and hometown (Won-dong) and between the country and the nation. Afterwards, the “third space search” leads to a space search that flows across the boundaries of time, space, and between countries and nations. At the same time, they want to settle in a residential country and recognize the ‘difference’ as a ‘Soviet-Korean’ who they are across groups, "maintain" it, and build a transnational identity. The works of poetry and literature by Chinese Korean writers have an aspect of crossing the difference between the national identity of China and the national identity of the Korean-Chinese, trying to break down boundaries. The literary strategy is the ambivalence of being assimilated and unassimilated. Paradoxically, this can be a way to maintain a distance from the state by not reverting to the ‘national’. In other words, this shows a pattern of finding their identities in a way that dreams of 'coexistence' and 'harmony' while antagonizing between the positions of ethnic minorities such as Korean-Chinese as well as citizens of China, a large country.
영주귀국 과정에서 드러난사할린 한인 1세대의 고국지향성 연구‒<귀향 그리고 또 다른 이별>의 촬영자료를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일본근대학회 일본근대학연구 Vol.71 2021.02 pp.243-260
...한인 1세대를 대상으로 이들의 고국지향성 연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지를 알아보았다. 사할린 한인 1세대 생존 시에 녹화된 촬영자료를 분석한 결과, 고국지향성의 연원은 첫째, 타의에 의한 강제이주, 둘째, 공동체 정체성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증오 감정, 셋째, 유형지로부터의 탈출 인식과 귀소본능의 실현 등으로 파악되었다. 사할린 한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영주귀국을 선택했지만 마지막까지 고통과 비극의 운명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한국을 떠날 때 혼자였듯이 사할린을 떠나올 때도 또 한 번의 가족상실을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국지향은 다시 가족지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 연구는 최근의 사할린 영주귀국자 연구와 달리 영주귀국 당시 1세대들의 인터뷰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고국지향성의 의미를 세밀히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촬영자료를 통해 새로운 연구대상과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향후 다양한 자료를 통한 사할린 한인 연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하겠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강한 고국지향성을 보이는 사할린 한인 1세대를 대상으로 이들의 고국지향성 연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지를 알아보았다. 사할린 한인 1세대 생존 시에 녹화된 촬영자료를 분석한 결과, 고국지향성의 연원은 첫째, 타의에 의한 강제이주, 둘째, 공동체 정체성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증오 감정, 셋째, 유형지로부터의 탈출 인식과 귀소본능의 실현 등으로 파악되었다. 사할린 한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영주귀국을 선택했지만 마지막까지 고통과 비극의 운명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한국을 떠날 때 혼자였듯이 사할린을 떠나올 때도 또 한 번의 가족상실을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국지향은 다시 가족지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 연구는 최근의 사할린 영주귀국자 연구와 달리 영주귀국 당시 1세대들의 인터뷰를 연구대상으로 삼고 고국지향성의 의미를 세밀히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촬영자료를 통해 새로운 연구대상과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향후 다양한 자료를 통한 사할린 한인 연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하겠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reason why Korean homecomers from Sakhalin of Russia desperately returned to their motherland. To solve the research question I analysed interview footage of the documentary, ‘Another Separation’, which contains the story of Koreans in Sakhalin. I found three main reasons of the motherland orientation of Koreans from Sakhalin. First, Their emigration to Sakhalin was not decided by their own will. They were forced to leave Korea and work hard in miserable conditions of Sakhalin by Japanese colonial policy. Second, they had kept common hostile emotion against Japan and shared the emotion with other Koreans in Sakhalin for a long time. Third, they had wanted to ‘escape’ from Sakhalin island because it was a kind of unwanted ‘exile place’. These three reasons made Korean remigrants finally decide to return to Korea even though they became very old people over 70s. This study also shows the homecomers went through another tragedy that they had to separate with their children after they had come back to Korea.
도의적 책임론의 등장과 의미: 사할린 한인문제를 중심으로
[NRF 연계]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한국정치연구 Vol.30 No.1 2021.02 pp.35-64
...한인문제는 일찍부터 한일 청구권협정과 무관하게 그 해결을 위해 일본 정부의 예산이 사용되었다. 90년대에는 사할린 잔류 한국인의 영주귀국문제가사실상 완료되었다. 시기적으로 보나, 일본 정부의 태도의 측면에서 보나, 사할린한인문제는 한일 역사화해에 있어 가장 진보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일본 정부가 사할린 한인문제 해결에 적극적 자세로 임하는 데에 논리적 토대를 제공했던 ‘도의적 책임’, ‘인도적 견지’에 주목하였다.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식민지 관련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논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문제가 되는 이슈에 있어 피해자 구제를 위해 일본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의 접합점이 도의적 책임론이었기 때문이다. 사할린 한인문제는 90년대 본격화되는 이러한 개념, 즉 도의적 책임이 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식민지 관련 문제가 법적으로 해결되었다며, 정부 예산의 사용을 통해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에 소극적이었다. 이는 일본정부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반면, 사할린 한인문제는 일찍부터 한일 청구권협정과 무관하게 그 해결을 위해 일본 정부의 예산이 사용되었다. 90년대에는 사할린 잔류 한국인의 영주귀국문제가사실상 완료되었다. 시기적으로 보나, 일본 정부의 태도의 측면에서 보나, 사할린한인문제는 한일 역사화해에 있어 가장 진보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일본 정부가 사할린 한인문제 해결에 적극적 자세로 임하는 데에 논리적 토대를 제공했던 ‘도의적 책임’, ‘인도적 견지’에 주목하였다.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식민지 관련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논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문제가 되는 이슈에 있어 피해자 구제를 위해 일본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의 접합점이 도의적 책임론이었기 때문이다. 사할린 한인문제는 90년대 본격화되는 이러한 개념, 즉 도의적 책임이 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The Japanese government has been passive in relieving victims through the use of the government’s budget, saying that all colonial-related issues were legally resolved through the Korea-Japan Claims Agreement. But in the Sakhalin Korean issue, the Japanese government’s budget was used to resolve it from early on, regardless of the Japan-Korea Claims Agreement. In the 1990s, the issue of permanent return for Koreans remaining in Sakhalin was virtually completed. In terms of timing and attitudes of the Japanese government, the Sakhalin Korean issue can be seen as the most progressive case for the reconciliation of Korean-Japanese history. This study focused on the “moral responsibility” and “humanitarian perspective” that provided the logical basis for the Japanese government to take an active attitude in solving the Sakhalin Korean issue. This is because the theory of moral responsibility was the conjugation of the logic that all colonial-related issues were resolved with the Claims Agreement and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should make efforts to rescue victims in politically problematic issues nonetheless. The Sakhalin Korean issue became an important opportunity for the emergence of this concept of moral responsibility, which began in earnest in the 1990s.
[NRF 연계]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공존의 인간학 Vol.5 2021.02 pp.223-254
...한인 학살이 그동안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지,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역사수정주의의 대두와 함께 일본의 배타적인 풍조에 의해 어떻게 망각되었는지를 검토하고, 기억을 올바로 계승하려는 연대와 연구 가능성을 전망했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한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치열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그것은 일본 사회에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극단적 차별과 배외주의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과정이었다. 숨겨진 사료의 발굴, 학살의 실태조사와 유골 발굴, 추모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려는 눈물겨운 노력도 이루어졌다.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양심적인 일본인 연구자와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관동대진재 당시의 한인 학살의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일본의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한 ‘망각하려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100년을 기억하는 작업은 “한인이 학살당했다”는 피해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삼스럽게 일본 군대와 경찰, 자경단의 야만성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반일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에 동조하기 위함도 아니다. 한일 양국이 역사적 진실을 공유하고 부조리한 과거를 거울삼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관동대진재 당시의 한인 학살 문제는 근대 이후 제국과 식민지라는 부조리한 한일 양국의 과거사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는 작업이 역사학 본연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관동대진재 당시의 한인 학살이 그동안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지,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역사수정주의의 대두와 함께 일본의 배타적인 풍조에 의해 어떻게 망각되었는지를 검토하고, 기억을 올바로 계승하려는 연대와 연구 가능성을 전망했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한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치열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그것은 일본 사회에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극단적 차별과 배외주의를 뛰어넘어 스스로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과정이었다. 숨겨진 사료의 발굴, 학살의 실태조사와 유골 발굴, 추모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려는 눈물겨운 노력도 이루어졌다.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양심적인 일본인 연구자와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관동대진재 당시의 한인 학살의 진상이 드러나고 있다. 일본의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한 ‘망각하려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100년을 기억하는 작업은 “한인이 학살당했다”는 피해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삼스럽게 일본 군대와 경찰, 자경단의 야만성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반일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에 동조하기 위함도 아니다. 한일 양국이 역사적 진실을 공유하고 부조리한 과거를 거울삼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관동대진재 당시의 한인 학살 문제는 근대 이후 제국과 식민지라는 부조리한 한일 양국의 과거사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는 작업이 역사학 본연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This article examined how the massacre of Koreans at the time of the great Kanto earthquake has been remembered, and how it was forgotten by Japan's exclusive trend since the 1990s with the rise of historical revisionism, and predicted solidarity and possibility of research to properly inherit memories. After liberation, intense researching results to reveal the truth of the massacre of Koreans in Japan have been accumulated. It was a process of restoring one's own history beyond extreme discrimination and exclusionism that had to experience in Japanese society. Including excavation of hidden historical materials, investigation of the actual condition of massacre, excavation of remains, and memorial projects, various activities were carried out, A tearful effort was also made to leave the records on video. Through solidarity with conscientious Japanese researchers and civic groups centering on Koreans living in Japan, the truth of the massacre of Koreans at the time of tthe great Kanto earthquake has been revealed. A device is needed to counter Japan's ‘power to forget’ centered on conservative forces. The work of remembering 100 years is not just to emphasize the damage that “Koreans have been slaughtered.” It is not to criticize the barbarism of the Japanese military, police, and vigilantes. Nor is it to sympathize with nationalism based on anti?Japanese consciousness. This work aimed at establishing a peace regime by sharing historical truths and using the absurd past as a mirror. The issue of the massacre of Koreans during the great Kanto earthquake clearly reveals the contradiction of the absurd past between Korea and Japan, which has been the empire and colony since modern times. This is because the task of properly revealing the historical truth is the original mission of history.
인도네시아 한인 ‘성공’ 진출사: 대안적 국외 이주 역사 기술 제언
[NRF 연계] 한국동남아학회 동남아시아연구 Vol.31 No.1 2021.02 pp.313-325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디지털 저널리즘 시대의 미디어화된 이주자: 재미한인들의 뉴스 소비의 경험과 의미
[NRF 연계]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언론정보연구 Vol.58 No.1 2021.02 pp.100-150
...한인 56명을 대상으로 질적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인터뷰를 분석한 결과, 한인 이주자들은 변화하는 뉴스환경에서 모국 뉴스 소비의 증가를 보였으며 이전보다 한국사회를 가깝게 여기고 있었다. 또한, 디아스포라적 국가주의와 초국가주의의 긴장 사이에서, 역설적으로 미국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한국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확고히 하게 된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아가, 본 연구는 재미한인들의 지속적인 모국 뉴스 소비와 이로 인한 공공적 연결의 기회들과 정치적 참여의 경험들이 이주자 개인의 차원에서 그리고 초국가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연구는 급변하는 디지털시대에 이주자들이 경험하는 뉴스소비 문화를 조명하고, 이로 인한 그들의 초국가적 일상의 재구조화와 이에 대한 함의를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디지털 저널리즘과 미디어화, 그리고 뉴스수용자와 공공 연결성의 이론적 틀에서 재미한인 56명을 대상으로 질적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인터뷰를 분석한 결과, 한인 이주자들은 변화하는 뉴스환경에서 모국 뉴스 소비의 증가를 보였으며 이전보다 한국사회를 가깝게 여기고 있었다. 또한, 디아스포라적 국가주의와 초국가주의의 긴장 사이에서, 역설적으로 미국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한국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을 확고히 하게 된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아가, 본 연구는 재미한인들의 지속적인 모국 뉴스 소비와 이로 인한 공공적 연결의 기회들과 정치적 참여의 경험들이 이주자 개인의 차원에서 그리고 초국가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This study investigates migrants’ news media culture and their implications in the rapidly changing digital journalism era. Through qualitatively interviewing 56 Korean migrants living in the US(both in Austin and in Philadelphia), researchers try to capture the implications of migrants’ homeland news media consumption in terms of their transnational everyday life and public connection. As a result, the study finds that the ambient journalism ecosystem supported by new media technology influenced in high increase of homeland news consumption among the migrant population. The study shows that through this process migrants not only negotiated their identity dynamics between the national and transnational but also oriented themselves to public life. In this regard, the study argues that homeland news is central to migrants’ fulfilling transnational lives and functions to bridge migrants’ private worlds, public worlds, and world beyond.
3・1운동 직후 한인의 상해 망명에 대한 프랑스 조계당국의 인식과 대응
[NRF 연계] 수선사학회 사림 Vol.75 2021.01 pp.169-194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This article analyzes how the French Concession authorities perceived Koreans who came to Shanghai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French concession authorities did not consider Koreans to be immigrants. It recognized the Koreans as political asylum who had escaped Japanese Rule and Suppression. Therefore, the Korean policy of French Concession authorities was applied to based on the principle of non-extradition of political offenders, the anti-Japanese public opinion of the Shanghai Chinese society at that time, and diplomatic judgment. It was also to establish a reciprocal principle between France and Japan for the extradition of political offenses. France demanded that Japan take the same action against Vietnamese revolutionists in Tokyo when Koreans political offenders hand over to Japan authorities. It also restricted the activities of Koreans living in the French concession in Shanghai. A radical independence movement was prohibited, but, the diplomatic independence movement, which appeals to the public opinion of the World Powers for independence, positively conceived as “peaceful activity.”
안중근의거 전후 하얼빈 한인사회의 형성과 그 역사적 의의
[NRF 연계] 한국보훈학회 한국보훈논총 Vol.19 No.4 2020.12 pp.101-122
...한인사회의 형성은 동청철도의 부설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03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하얼빈에 철도노동자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1907년 3월 하얼빈 총영사관의 설립과 더불어 일제는 하얼빈 한인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강봉주를 사주하여 한인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김성백 등의 하얼빈 민족투쟁가들의 저항에 부딪쳐 1909년 5월 해체되었다. 하얼빈 한인의 민족운동은 미주와 블라디보스토크과 연동되어 있었다. 그 결과 1909년 9월 14일 공립협회 하얼빈지방회가 성립되었다. 하얼빈지방회는 함경도 출신의 30대 노동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하얼빈공립협회의 회장은 강봉주이었지만, 김성백 등의 민족투쟁가들이 그 활동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공립협회가 국민회․대한인국민회로 확대 개편됨에 따라 공립협회 하얼빈지방회도 하얼빈국민회․하얼빈대한인국민회지부로 재편되었다. 한편, 하얼빈 민족투쟁가들은 민족운동의 지속과 한인의 단결을 위해 학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었다. 그 결과 김성백 김성옥․김형재․탁공규 등이 중심이 되어 1909년 4월 18일(러시아력) 동흥학교 설립 신청을 하였다. 동흥학교를 유지하고 한인의 단결을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해 김성백 등 70여명의 하얼빈 민족투쟁가들이 1909년 9월 27일 한인회를 조직하였다. 1909년 1월 하얼빈 한인은 260여명이다. 이들은 의사 통역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담배말이 등의 단순노동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들 중 전문적으로 대일투쟁에 종사한 한인은 20여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하얼빈 한인사회의 중심인물로 김성백․김옥성․정대호를 들 수 있다. 유동하와 사돈관계인 김성백은 하얼빈의 여러 단체의 장으로 활약하였으며 동흥학교의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안중근 유족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이처럼 그는 하얼빈의 대표적 민족투쟁가였다. 김성옥은 조도선 등의 한인을 자신의 집에 숙박시키는 등 한인 보호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김성백과 함께 활동하면서 동흥학교를 후원하고 후학의 양성에도 자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가쓰라 처단계획을 세운 혐의로 국내로 압송되기 하였다. 안중근과 진남포에서 가장 친하게 지낸 정대호는 안중근의 가족을 무사히 하얼빈까지 데리고 왔다. 그는 만주리국민회지방총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1912년 김성옥 등과 함께 국내로 피체되었다. 이와 같이 하얼빈 한인들은 미주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과 깊은 연관 속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이 글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안중근과 그의 의거가 하얼빈 한인사회가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얼빈 한인사회의 형성은 동청철도의 부설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03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하얼빈에 철도노동자로 모여들기 시작하여 1907년 3월 하얼빈 총영사관의 설립과 더불어 일제는 하얼빈 한인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강봉주를 사주하여 한인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김성백 등의 하얼빈 민족투쟁가들의 저항에 부딪쳐 1909년 5월 해체되었다. 하얼빈 한인의 민족운동은 미주와 블라디보스토크과 연동되어 있었다. 그 결과 1909년 9월 14일 공립협회 하얼빈지방회가 성립되었다. 하얼빈지방회는 함경도 출신의 30대 노동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하얼빈공립협회의 회장은 강봉주이었지만, 김성백 등의 민족투쟁가들이 그 활동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공립협회가 국민회․대한인국민회로 확대 개편됨에 따라 공립협회 하얼빈지방회도 하얼빈국민회․하얼빈대한인국민회지부로 재편되었다. 한편, 하얼빈 민족투쟁가들은 민족운동의 지속과 한인의 단결을 위해 학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었다. 그 결과 김성백 김성옥․김형재․탁공규 등이 중심이 되어 1909년 4월 18일(러시아력) 동흥학교 설립 신청을 하였다. 동흥학교를 유지하고 한인의 단결을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해 김성백 등 70여명의 하얼빈 민족투쟁가들이 1909년 9월 27일 한인회를 조직하였다. 1909년 1월 하얼빈 한인은 260여명이다. 이들은 의사 통역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담배말이 등의 단순노동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들 중 전문적으로 대일투쟁에 종사한 한인은 20여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하얼빈 한인사회의 중심인물로 김성백․김옥성․정대호를 들 수 있다. 유동하와 사돈관계인 김성백은 하얼빈의 여러 단체의 장으로 활약하였으며 동흥학교의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안중근 유족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이처럼 그는 하얼빈의 대표적 민족투쟁가였다. 김성옥은 조도선 등의 한인을 자신의 집에 숙박시키는 등 한인 보호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김성백과 함께 활동하면서 동흥학교를 후원하고 후학의 양성에도 자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가쓰라 처단계획을 세운 혐의로 국내로 압송되기 하였다. 안중근과 진남포에서 가장 친하게 지낸 정대호는 안중근의 가족을 무사히 하얼빈까지 데리고 왔다. 그는 만주리국민회지방총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1912년 김성옥 등과 함께 국내로 피체되었다. 이와 같이 하얼빈 한인들은 미주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과 깊은 연관 속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이 글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안중근과 그의 의거가 하얼빈 한인사회가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The formation of the Harbin Korean community was a decisive factor of the construction of Dongcheong Railway. Since 1903, Korean community members have begun to flock into Harbin as a railway worker, and in March 1907,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Consulate General of Harbin, Japan established a Korean-American society centered on Kang Bong-ju, a Japanese-American leader for the purpose of controlling Hanbin. However, it was disbanded in May 1909 in response to the protests of national activists such as Kim Sung-baek. Harbin Korean national movement was linked with those of America and Vladivostok. The result was a branch of Harbin Public Association on 14 September 1909. Harbin Public Association was mainly made up of workers in their 30s from Hamgyeong-do. The chairman of the Harbin Public Association was Kang Bong-ju, a single-minded proponent, but it seems that the activities were led by national activists such as Kim Sung-baek. As the public association was expanded and reorganized into the National Congress and the Korean People's Congress, Harbin Public Association was also reorganized into the Harbin National Congress and the Harbin Korean People's Association. Meanwhile, Harbin activists felt the necessity of school for the continuation of national movement and the unity of Koreans. As a result, Kim Sung-bak, Kim Sung-ok, Kim Hyung-jae, and Tak Kong-gyu applied for the establishment of Dongheung School on April 18, 1909. In order to maintain Dongheung School and strengthen Korean solidarity, more than 70 Harbin national activists including Kim Sung-baek organized Korean-American Association on September 27, 1909. In January 1909, there were about 260 Koreans, most of whom were engaged in simple labor such as cigarette rolling, except for a few interpreters and doctors. In particular, it is estimated that there are about 20 Koreans who are professionally engaged in the fight against Japan. The main characters of the Harbin Korean community include Kim Seong-baek, Kim Ok-sung, and Jeong Dae-ho. Dong-ha Kim and Sung-baek Kim were the heads of several Harbin organizations and were the financial supporters of Dongheung School. In particular, he made his family stay in his house. Thus he was a representative national activist in Harbin. Kim Seong-ok was the leading figure in protecting Koreans, including staying with Koreans like Jo Do-sun at his home. He worked with Kim Sung-baek to support Dongheung School and spared no money to foster future students. He was deported to Korea on charges of the Katsura execution plan. Jeong Dae-ho, the closest friend of Ahn and Jinnampo, brought Ahn's family to Harbin. He was active in the national movement, serving as vice-president of the Manchurian National Assembly. In 1912, he was captured in Korea with Kim Sung-ok and others. Thus, it can be seen from this article that Harbin Koreans developed a national movement in deep connection with Koreans in the US and Vladivostok. In addition, it is clear that Ahn Jung-geun and his heroic deed became the spiritual energy for the Harbin Korean society.
중국 현대 한인제재 작품 연구에서 한국적 관점 확립의 필요성 고찰 ― 無名氏와 李範奭의 문학적 관계 연구를 중심으로
[NRF 연계] 중국어문학회 중국어문학지 Vol.73 2020.12 pp.163-183
...한인제재 작품 연구는 한국인의 시선에서 접근하면 새로운 자료와 관점이 보인다. 이러한 시선의 변화를 통해 연구자들은 이 유형 작품의 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범석을 원형으로 한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 출판 당시 저자 표기와 관련된 이범석의 ‘착오’, 장편소설 『황야의 사람』 발굴과 그 의미, 그리고 자서전으로 알려진 『우둥불』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통해 우밍스와 이범석의 문학적 관계 연구에 한국적 관점이 필요함을 제안해보았다. 이범석을 원형으로 한 백화문 창작과 관련된 중국 측 자료 대부분이 우밍스의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측 연구자들이 처음부터 우밍스의 말을 신뢰할 이유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우밍스도 이범석 못지않게 자기 서사에 충실했던 현대인으로 문학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주관적 사실과 현실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객관적 사실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우밍스와 이범석의 문학적 관계 연구는 새로운 출발점이 필요하다. 이범석은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텍스트를 기획·생산하였던 항일독립투사 출신의 정치가로 생전에 저자의 신분으로 자신의 창작 세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은 없다. 이범석의 문학 활동은 중한의 대필 작가를 통해 자기 서사를 진행하며 한중에서 항일독립운동가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자신의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구술·문자 텍스트를 지속적으로 생산하였다는 점, 그 텍스트의 출판과 유통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점, 그리고 독자를 의식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히 작가였다. 무엇보다 그는 주류 중국문학사에 등장하는 한국인 이야기의 발화자이다. 중국 현대 한인제재 작품 연구는 한국인의 시선에서 접근하면 새로운 자료와 관점이 보인다. 이러한 시선의 변화를 통해 연구자들은 이 유형 작품의 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In this paper, the investigator discussed Yi Beom Seok’s “mistake” with the mark of the author in the publication of Korean translations of modern Chinese literary works whose archetype was Yi, the excavation and significance of novel Man in the Wilderness, and the essence of his autobiography Woodungbul, making a new starting point in the study of “literary relations between Wu Ming Shi and Yi Beom Seok.” Yi Beom Seok was a very unique type of anti-Japanese independence fighter-turned politician that planned and produced texts in which he was the main character against the modern world. He had no serious contemplation over his creative world as an author before his death. His literary activities involved developing his own narratives through Chinese-Korean ghostwriters and establishing his image as an anti-Japanese independence activist in the Korean-Chinese format. He was, however, an author with no doubt in that he continued to produce his oral and written texts based on his career, was directly involved in the publication and circulation of his texts, and was aware of his readers. Most of all, he was a speaker in stories of Korean people in the history of mainstream Chinese literature. A new approach to the study of “modern Chinese literary works related to Korea and Korean people” in the viewpoint of Korean people will present new materials and perspectives. Taking advantage of these changes to the viewpoint, researchers of Korea, China, and Japan will be able to approach the real aspects of this type of works.
[NRF 연계] 21세기정치학회 21세기정치학회보 Vol.30 No.4 2020.12 pp.1-34
...한인교포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5.18광주 지원운동에 참여하고 추후 민주화운동으로 조직화되었는지 중점적으로 추적한다. 미국교포사회의 초기대응은 집단행동의 성격을 띠었고 5.18의 마지막 수배자이자 한국 최초의 미국 망명자인 합수 윤한봉의 조직화 노력으로 체계를 갖춘 사회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그 전환의 기제는 합수 개인이 가진 카리스마, 의식화 교육내용이 앙양시킨 민족적 자긍심, 소외되어 있던 교민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조직문화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의 장에서의 체험 등을 들 수가 있다. 1987년 국내에서 민주화가 진전되자 재미동포들의 운동방향 재정비에서 혼선과 갈등이 빚어졌고 중추적 역할을 하던 윤한봉마저 영구귀국함에 따라 조직은 와해, 분열되어 미완의 계승단계에 머물러 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트랜스내셔널의 관점에서 분석한 5.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거의 전무하다. 본 연구는 국가와 시민사이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 기존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재미동포들이 인식, 대응하고 계승한 5.18광주를 분석한다. 당시 미국 속에서 비 정치화된 소수민족이던 한인교포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5.18광주 지원운동에 참여하고 추후 민주화운동으로 조직화되었는지 중점적으로 추적한다. 미국교포사회의 초기대응은 집단행동의 성격을 띠었고 5.18의 마지막 수배자이자 한국 최초의 미국 망명자인 합수 윤한봉의 조직화 노력으로 체계를 갖춘 사회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그 전환의 기제는 합수 개인이 가진 카리스마, 의식화 교육내용이 앙양시킨 민족적 자긍심, 소외되어 있던 교민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조직문화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의 장에서의 체험 등을 들 수가 있다. 1987년 국내에서 민주화가 진전되자 재미동포들의 운동방향 재정비에서 혼선과 갈등이 빚어졌고 중추적 역할을 하던 윤한봉마저 영구귀국함에 따라 조직은 와해, 분열되어 미완의 계승단계에 머물러 있다.
There are very few works on the Gwangju democracy movement analyzed from a transnational perspective. This paper aims to go beyond the usual analytical frame which focuses on the interactions between a nation-state and the people by examining the perceptions and responses of Korean-American community to the May 18 incident. The primary question is 'why and how the members of non-politicized?ethnic community in the U.S. decided to assist the citizens of Gwangju and later to participate in democratization movement of the homeland.‘ This paper shows that the initial response had the characteristics of collective action which later was transformed into social movement. The mechanisms of transformation were Han-bong Yoon's charismatic leadership, heightened ethnic consciousness, inclusive organizational culture and exploration of activism stages. With the spread of nation-wide democratization movement in 1987, the Korean-American community began to experience internal conflict and division over the future directions of their activism. Yoon's permanent return to Korea in 1993 caused a cacophony leading to dissolution of organizations pushing the legacies of May 18 Gwangju into oblivion.
다인종 재미한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 "하프코리안닷컴(HalfKorean.com)” 페이스북 그룹을 중심으로
[NRF 연계] 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디아스포라연구 Vol.14 No.2 2020.12 pp.161-202
...한인에 관한 기존연구에서는 국내 사례만 주로 초점을 두어서 연구가 진행되었고, 다인종 재미한인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였다. 또한 최근 다양한 모빌리티와 정보통신 기기의 결합에 의해 사회공간과 사회관계가 재구성되어 왔다. 디아스포라 연구에 있어서도 디아스포라의 사이버 공간에서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 본 연구에서는 ‘하프코리안닷컴’을 비롯한 북미기반 다인종 한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의 형성과 유지 요인을 파악하고, 이들의 경험에 대한 이해 제고를 하고자 한다. 주요 연구방법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하였고 37명의 다인종 재미한인들이 참여하였다. 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서 연구참여자들은 한국인 부 또는 모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서로 간의 성장 환경과 경험에 대해 반추, 비교, 공감하였다. 또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정보 공유를 통해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 강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미 전역에 산재한 다인종 한인들을 네트워크화 하여 새로운 유형의 온라인 공동체를 창출하였다. 하지만 다인종 한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들과 재미한인사회와의 직접적인 교류나, 모국과의 초국적 연계는 비교적 미약한 편이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지역뿐 아니라 해외 각국의 다인종 한인들, 그리고 코리안 디아스포라 공동체 형성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재외한인 ‘디지털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구가 더욱 활성화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인종(다문화) 배경 한인에 관한 기존연구에서는 국내 사례만 주로 초점을 두어서 연구가 진행되었고, 다인종 재미한인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였다. 또한 최근 다양한 모빌리티와 정보통신 기기의 결합에 의해 사회공간과 사회관계가 재구성되어 왔다. 디아스포라 연구에 있어서도 디아스포라의 사이버 공간에서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 본 연구에서는 ‘하프코리안닷컴’을 비롯한 북미기반 다인종 한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의 형성과 유지 요인을 파악하고, 이들의 경험에 대한 이해 제고를 하고자 한다. 주요 연구방법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하였고 37명의 다인종 재미한인들이 참여하였다. 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서 연구참여자들은 한국인 부 또는 모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서로 간의 성장 환경과 경험에 대해 반추, 비교, 공감하였다. 또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정보 공유를 통해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 강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미 전역에 산재한 다인종 한인들을 네트워크화 하여 새로운 유형의 온라인 공동체를 창출하였다. 하지만 다인종 한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들과 재미한인사회와의 직접적인 교류나, 모국과의 초국적 연계는 비교적 미약한 편이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지역뿐 아니라 해외 각국의 다인종 한인들, 그리고 코리안 디아스포라 공동체 형성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재외한인 ‘디지털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구가 더욱 활성화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The previous literature on multiracial Koreans has focused only on domestic cases, neglecting research on the U.S.-based Koreans of mixed heritages. In addition, social spaces and social relations have recently been reconstructed by various forms of mobilities enhanced by highly developed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Therefore, in diaspora studies, it is worth paying attention to the diaspora’s activities in cyberspace. Against this backdrop, this article attempts to identify the contributing factors that form and maintain the online community of multiracial Koreans based in North America such as HalfKorean.com, and to enhance understanding of their experiences. Methodologically, a total of 37 mixed-race Koreans participated in an online survey. This research found that, through the online community, participants improved their understanding of Korean parents and reflected, compared, and sympathized with each other’s experiences as being mixed. Also, involvements in such online communities brought about strengthening ethnic identities as Korean by sharing information about the Korean language and culture. A new type of online community was created by networking multiracial Koreans scattered across the U.S. However, it was found that multiracial Koreans have not actively formed any direct relationships with members of other Korean-American communities and transnational connections with their ethnic homeland. Based on the results of this study, it is expected that further research on multiracial Koreans can be conducted worldwide, not restricted to those in the U.S., and on the digital diaspora that may function as a basis for the formation of the global Korean diaspora community.
만주국 시기 ‘한인 개척민’ 이주 설계자 윤상필의 생애와 활동 : 제국주의 일본과의 협치와 굴종
[NRF 연계]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동국사학 Vol.69 2020.12 pp.303-337
...한인들을 조사하고 보호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고 그는 1935년 군복을 벗고 만주국 고위 관료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농민들은 그의 손끝으로 만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해방 이후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로 갔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영민하고 비범한 인재였던 윤상필은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던 친일의 오욕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가 외면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점이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윤상필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였다. 탁월한 능력과 체력을 겸비한 그는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육군사관학교 27기로 졸업하였다. 그가 군인이자 행정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의일이다. 중국 패잔병의 공격을 받은 한인들을 조사하고 보호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고 그는 1935년 군복을 벗고 만주국 고위 관료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농민들은 그의 손끝으로 만주로 강제 이주되었다. 해방 이후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로 갔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영민하고 비범한 인재였던 윤상필은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던 친일의 오욕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가 외면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점이다.
Yoon Sang-pil was the last cadet of the Korean Empire Military Academy. With his outstanding ability and physical strength, he moved to Japan in 1909 and graduated as the 27th class of the Japanese Military Academy in 1915. It was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on September 18, 1931 that he distinguished himself as a soldier and administrative official. It was to investigate and protect Koreans who were attacked by Chinese soldiers. In recognition of his contribution, he took off his military uniform in 1935 and led a stable life as a high-ranking official of Manchuria. He was able to walk on the path of active pro-Japanese activities. And the peasants on the Korean Peninsula were forced to move to Manchuria at his fingertips. After liberation, he was arrested by Soviet troops and went to a Siberian camp where he ended his life. Yoon Sang-pil, a brilliant and extraordinary talent, is not easy to escape from the disgrace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who pursued individual spirituality. The most important reason why he is shunned is that he has undermined the identity of the community.
한-소 스포츠 교류에 나타난 소비에트 한인 스포츠인들의 초국가적 정체성 연구 -넬리 김과 유리 채를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슬라브학보 Vol.35 No.4 2020.12 pp.101-130
...한인 스포츠 인들의 초국가적 스포츠 활동과 정체성의 변화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연구방법은 1966년부터 대한체육회에서 발행된 월간 『체육』의 기사를 주 텍스트로 주요 일간지 기사를 부 텍스트로 분석하는 콘텐츠 분석 방법을 사용하였다. 소련 해체 전, 한-소 스포츠 교류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다른 양상을 보이며 태동기(1973~1984), 성장기(1985~1988.8), 결실기(1988.9~1991)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한-소 스포츠 교류는 양국의 국교 재수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1990년 9월 30일 한-소 국교 재수립의 견인차 역할을 한 스포츠 외교의 대표적인 성공사례 중 하나이다.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 한인 스포츠인들 넬리 김과 유리 채는 소련 스포츠 기술의 한국화를 통하여 한국의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였고, 한-소 스포츠 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며 초국가적 정체성의 변화 과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연구는 1973년 대한민국 선수단이 제7회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참가하기 위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처음 방문한 이후 1991년 소련의 해체까지 한국과 소련의 스포츠 교류의 과정과 성과를 알아보고, 그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 한인 스포츠 인들의 초국가적 스포츠 활동과 정체성의 변화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연구방법은 1966년부터 대한체육회에서 발행된 월간 『체육』의 기사를 주 텍스트로 주요 일간지 기사를 부 텍스트로 분석하는 콘텐츠 분석 방법을 사용하였다. 소련 해체 전, 한-소 스포츠 교류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다른 양상을 보이며 태동기(1973~1984), 성장기(1985~1988.8), 결실기(1988.9~1991)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한-소 스포츠 교류는 양국의 국교 재수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1990년 9월 30일 한-소 국교 재수립의 견인차 역할을 한 스포츠 외교의 대표적인 성공사례 중 하나이다.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 한인 스포츠인들 넬리 김과 유리 채는 소련 스포츠 기술의 한국화를 통하여 한국의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였고, 한-소 스포츠 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며 초국가적 정체성의 변화 과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This study investigated the progress and achievements of Korea-USSR sports exchanges until the dissolution of the USSR in 1991 after the Korean sports delegation first visited Moscow to participate in the Universiade in 1973 and found out the meaning in Korean sports history. In addition, it examined the role of Soviet Korean sportsmen and the emergence of transnational identity in this process. As a research method, a content analysis was used to analyze the articles of the monthly Physical Education published by the Korean Sports & Olympic Committee since 1966 as the main text and the daily newspapers’ articles as the subtext. Before the dissolution of the USSR, Korea-USSR sports exchanges showed different aspects before and after the 24th Seoul Olympics and were divided into three periods: Embryonic Period (1973~1984), Growth Period (1985~1988.8.), Mature Period (1988.9.~1991). The Korea-USSR Sports exchange was one of the representative success stories of sports diplomacy that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re-establishment of the Korean-Soviet diplomatic relations on September 30, 1990. In this process, Among the Soviet Korean sportsmen, Nellie Kim and Yuriy Tskhay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sports in Korea through the Koreanization of Soviet sports techniques and were able to experience the emergence of transnational identity by serving as a bridge between Korea-USSR sports exchanges.
해외 한인소설에 나타난 혼종적 정체성의 발현양상 -『영원한 이방인』과 『차이나맨』의 대비를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현대소설학회 현대소설연구 Vol.80 2020.12 pp.341-377
...한인소설에 나타난 혼종적 정체성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재미작가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과 재호작가 돈오 김의 『차이나맨』을 대비하였다.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은 아시아계 유능한 스파이로 백인사회의 직능군에편입된 한인 2세대 이민 헨리의 정체성 탐색을 통해 짧지 않은 유색 타인종 유입의 학습 경험이 축적된 미국에서 외형적·표피적 평등 속의 교묘한 차별을 감내·극복해 나가야 하는 이주민들의 동화과정을 예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헨리의 정체성 형성엔 존 강의 전통적 주체성 및 정치적 적극성과 아버지의 가족사랑과 희생의 정서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이주민과 타자 사이의 다양한 교섭으로매개화되는 헨리의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은 1인칭 시점의 제한적 정보를 중층화하는 초점화자의 변용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돈오 김의 『차이나맨』은 일본계 아시아 유색인종 청년 죠오가 선상에서 겪는 고뇌를 통해, 백인들만의 폐쇄사회에서 다인종 다문화사회로 전환하는 1980년대 호주 사회에서 피부색 감별에서파생되는 노골적 인종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유색 이민들이 두터운 동화의 벽 앞에서 고뇌하는 현실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설 속에 격자화소가 삽입된 것은 3인칭 주인공 죠오의 은밀하고 복잡한 내면을 일기체 회고록의 1인칭 한인 화자의 심경에 덫칠함으로써 백호주의 대륙에서 인종차별을 딛고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본고를 통해 유색인종 이민사의 도정에 따라 교묘함과 노골성으로 변별되는 두 대륙의 인종차별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고에서는 해외 한인소설에 나타난 혼종적 정체성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재미작가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과 재호작가 돈오 김의 『차이나맨』을 대비하였다. 이창래의 『영원한 이방인』은 아시아계 유능한 스파이로 백인사회의 직능군에편입된 한인 2세대 이민 헨리의 정체성 탐색을 통해 짧지 않은 유색 타인종 유입의 학습 경험이 축적된 미국에서 외형적·표피적 평등 속의 교묘한 차별을 감내·극복해 나가야 하는 이주민들의 동화과정을 예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헨리의 정체성 형성엔 존 강의 전통적 주체성 및 정치적 적극성과 아버지의 가족사랑과 희생의 정서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이주민과 타자 사이의 다양한 교섭으로매개화되는 헨리의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은 1인칭 시점의 제한적 정보를 중층화하는 초점화자의 변용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돈오 김의 『차이나맨』은 일본계 아시아 유색인종 청년 죠오가 선상에서 겪는 고뇌를 통해, 백인들만의 폐쇄사회에서 다인종 다문화사회로 전환하는 1980년대 호주 사회에서 피부색 감별에서파생되는 노골적 인종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유색 이민들이 두터운 동화의 벽 앞에서 고뇌하는 현실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설 속에 격자화소가 삽입된 것은 3인칭 주인공 죠오의 은밀하고 복잡한 내면을 일기체 회고록의 1인칭 한인 화자의 심경에 덫칠함으로써 백호주의 대륙에서 인종차별을 딛고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본고를 통해 유색인종 이민사의 도정에 따라 교묘함과 노골성으로 변별되는 두 대륙의 인종차별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In this paper, in order to grasp the reality of the hybrid identity that appeared in overseas Korean novels, I contrasted Native Speaker by American Korean writer Chang-rae Lee and The Chinaman by Australian Korean writer Dono Kim. Chang-Rae Lee's Native Speaker depicts the search for the identity of Henry, a second-generation Korean immigrant who was incorporated into the white community as a competent Asian spy. Through this, it can be seen that the assimilation process of migrants who have to endure and overcome subtle discrimination in external and epidermal equality in the United States, where the learning experience of the influx of different races of color, has been accumulated is acutely embodied. John Kang's traditional identity and political activism, and family love and sentiment of sacrifice of Henry's father have a great influence on Henry's identity formation. Henry's identity as a migrant, mediated through various negotiations between migrants and others, is effectively embodied through the transformation of the focus speaker who layered the limited information from the first person perspective. Dono Kim's The Chinaman can be seen as a representation of the reality that colored immigrants suffer in front of a thick wall of assimilation through the anguish experienced by Joe, a Japanese-Asian young man of color in Australian society in the 1980s, transitioning from a closed society of whites to a multiracial and multicultural society. At that time, explicit racism, derived from skin color discrimination, was practiced. A grid motif is inserted into the novel to reveal the inner side of the artist who has been working on racism in the continent of White Australia by trapping the secret and complex inner side of the third-person protagonist Joe in the heart of the first-person Korean speaker in the diary memoir. Through this paper, it was possible to confirm the pattern of racial discrimination on the two continents, distinguished by subtlety and blatantness according to the historical progress of immigrants of color.
0개의 논문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
선택하신 파일을 압축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