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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F 연계] 한국독일사학회 독일연구 - 역사·사회·문화 Vol.49 2022.02 pp.337-350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쿠바 한인 후손들의 민족적 정체성 변화: 이민 100주년 기념 설문 조사를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중남미연구 Vol.41 No.1 2022.02 pp.129-172
...한인사회는 멕시코 한인사회에서 파생되었다. 1905년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도착한 한인 1,033명이 약 32개의 에네켄 농장에서 흩어져 고된 농촌노동자의 삶을 살던 중, 그중 약 300명이 1921년 더 나은 삶을 찾아서 자발적 계약노동자로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을 향해 재이주했다. 쿠바 한인사회는 2021년 3월 25일 이민 100주년을 맞이하여 쿠바의 언론과 방송 그리고 Youtube에 자신의 이민역사를 활발히 알렸다.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쿠바가 시리아와 더불어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남한 대신 1960년 8월 29일 북한과 수교하고, 더 나아가 미국과 1961년 단교했다. 따라서 쿠바 한인사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미국과 멕시코의 한인사회는 물론 우리 한국 사회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2021년 3월 이민 100주년을 맞은 쿠바 한인 후손의 수는 총 1,092명이다. 그리고 그중 순수 한인 혈통을 가진 후손은 약 7%에 해당하는 83명에 불과한데, 이것은 쿠바 한인사회가 10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타민족과 인종적 혼합으로 쿠바 사회에 동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2021년 행한 설문 조사 결과에 의하면, 그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차츰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의 원인으로는 1997년 시작된 한-쿠바의 통상 교류, 2005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아바나 지사 설립, 2010년 한인후손회 설립, 2013년 쿠바 국영 TV의 K-드라마 방영에 따른 한류 확산,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예우 보상 그리고 재외동포재단의 한인 후손 직업연수프로그램이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쿠바 한인사회는 멕시코 한인사회에서 파생되었다. 1905년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도착한 한인 1,033명이 약 32개의 에네켄 농장에서 흩어져 고된 농촌노동자의 삶을 살던 중, 그중 약 300명이 1921년 더 나은 삶을 찾아서 자발적 계약노동자로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을 향해 재이주했다. 쿠바 한인사회는 2021년 3월 25일 이민 100주년을 맞이하여 쿠바의 언론과 방송 그리고 Youtube에 자신의 이민역사를 활발히 알렸다.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쿠바가 시리아와 더불어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남한 대신 1960년 8월 29일 북한과 수교하고, 더 나아가 미국과 1961년 단교했다. 따라서 쿠바 한인사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미국과 멕시코의 한인사회는 물론 우리 한국 사회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2021년 3월 이민 100주년을 맞은 쿠바 한인 후손의 수는 총 1,092명이다. 그리고 그중 순수 한인 혈통을 가진 후손은 약 7%에 해당하는 83명에 불과한데, 이것은 쿠바 한인사회가 10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타민족과 인종적 혼합으로 쿠바 사회에 동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2021년 행한 설문 조사 결과에 의하면, 그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차츰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의 원인으로는 1997년 시작된 한-쿠바의 통상 교류, 2005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아바나 지사 설립, 2010년 한인후손회 설립, 2013년 쿠바 국영 TV의 K-드라마 방영에 따른 한류 확산,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예우 보상 그리고 재외동포재단의 한인 후손 직업연수프로그램이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The Korean community in Cuba was derived from the Korean community in Mexico. 1,033 Koreans who arrived in the Yucatan Peninsula of Mexico in 1905 were scattered across 32 Henequen farms and were taking a hard-working lives as rural workers. Among them, about 300 re-emigrated to Cuba’s sugar cane farms as voluntary contract workers in 1921 in search of a better life. On March 25, 2021, commemorating the 100th anniversary of immigration, the Korean community in Cuba actively reported its immigration history to Cuban media, broadcasting, and Youtube. However, the fact that this fact feels unfamiliar to us is probably because Cuba has not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 with South Korea along with Syria. Cuba established diplomatic ties with North Korea on August 29, 1960 after Castro's socialist revolution in 1959 instead of South Korea, and further cut ties with the United States in 1961. Therefore, the Korean community in Cuba naturally moved away from Korean society as well as from the Korean communities in the United States and Mexico, with them Koreans in Cuba had shared independence movement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Celebrating the 100th anniversary of immigration in March 2021, the total number of Korean descendants in cuba is 1,092. The fact that only 83 descendants (7% of total) has Korean pure ancestry, means that the Korean community in Cuba has been assimilated into Cuban society through marriges to other ethnicity in the past 100 years. However, according to the our survey conducted in 2021, they are gradually recovering their identity as Koreans. The reasons for this are the trade exchange between Korea and Cuba that started in 1997, the establishment of the Havana branch Office of the Korea Trade-Investment Promotion Agency(KOTRA) in 2005, Foundation of the Association of Korean Descendants in Cuba in 2010, the spread of Hallyu following the K-drama airing on Cuban state TV in 2013, and Korean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courtesy compensation to the meritorious independence fighters and the Overseas Koreans Foundation's vocational training programs for Korean descendants in Cuba seem to have played a part.
포스트제국 공간속의 이동: 사할린 한인과 일본인 처의 갈등
[NRF 연계] 인문사회21 인문사회21 Vol.13 No.1 2022.02 pp.2363-2374
...한인의 회고록과 그 일본인 처들의 기관지를 통해 일본 제국 해체 후 소련령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한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 부부들이 겪었던 갈등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1956년 일본과 소련의 국교 수립을 계기로 사할린 한인과 일본인 처는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때 제국 해체 후에도 존재하였던 제국의 질서 속에서 이동이 진행되었다. 아울러 그들은 일본에 정착 직후 사할린 한인을 위한 가족상봉과 귀환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그들의 운동은 일본사회 내부의 복잡한 냉전 상황으로 인하여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인 남편의 운동에 협력하고자 했던 일본인 처들은 ‘외국인’ 남편을 둔 가정의 아내, 어머니로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일본인으로서의 지위를 하나의 문화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귀환운동에 참여하였다. 본고는 사할린 한인문제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배경으로서 1960년대 일본사회 내부의 냉전 상황을 재고하고, 비가시화된 일본인 처들이 귀환운동을 통해 국가 경계를 가로지르면서도 강화하는 양상을 조명하였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고는 사할린 한인의 회고록과 그 일본인 처들의 기관지를 통해 일본 제국 해체 후 소련령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한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 부부들이 겪었던 갈등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1956년 일본과 소련의 국교 수립을 계기로 사할린 한인과 일본인 처는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때 제국 해체 후에도 존재하였던 제국의 질서 속에서 이동이 진행되었다. 아울러 그들은 일본에 정착 직후 사할린 한인을 위한 가족상봉과 귀환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그들의 운동은 일본사회 내부의 복잡한 냉전 상황으로 인하여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인 남편의 운동에 협력하고자 했던 일본인 처들은 ‘외국인’ 남편을 둔 가정의 아내, 어머니로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일본인으로서의 지위를 하나의 문화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귀환운동에 참여하였다. 본고는 사할린 한인문제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배경으로서 1960년대 일본사회 내부의 냉전 상황을 재고하고, 비가시화된 일본인 처들이 귀환운동을 통해 국가 경계를 가로지르면서도 강화하는 양상을 조명하였다.
Based on the biographies about Sakhalin Koreans and the bulletins that their Japanese wives published, this paper shows that they moved across the post-imperial space since 1956 as being divided into ‘Japanese’ and ‘foreigners’ based on the family registry system of Japan. Moreover, their activities for the repatriation of Sakhalin Koreans gained little attention due to the Cold War tensions. Struggling to support their families, the Japanese wives published a bulletin and utilized their political positions as Japanese by transgressing and reproducing the national boundary.
러시아의 한인 이주민 단속 정책과 그 균열 -프리아무르 주 총독 운테르베르게르 시기(1905~1910)를 중심으로-
[NRF 연계]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Vol.105 2022.01 pp.65-102
...한인 이주민 단속 정책이 균열했음을 밝혔다. 황화론에 기초 한 단속 정책은 거주허가증 단속과 귀화자격 재심사 두 형태로 나타났 다. 거주허가증이 없으면 집을 임차할 수 없었고 취업에도 제한을 받았 다. 한인들은 거주허가증 발급을 늦추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며 당국 이 거주 단속 강화를 통해 의도한 황인종 유입 방지 효과를 지연시켰다. 한편 러시아 지방 당국은 한인의 귀화자격 재심사를 위해 한인 가족명부 를 조사하던 중 한인의 상이한 역법, 결혼, 작명방식 등과 마주치며 어려 움을 겪었다. 한인의 민족문화가 러시아의 법률제도가 충돌하고 있던 것 이다. 한인들은 러시아에서 거주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러시아 광산업자 들과 함께 러시아 내무대신과 국가 두마 의장 등 러시아 중앙을 설득하 고자 했다. 언론 활동을 통해 한인 이주민에 대한 러시아 지방 당국의 정 책을 비판하고 한인의 입장을 항변하기도 했다. 친일혐의에 관해서는 민 족범주로서 한인을 일본인과 명확히 구분하며 황인종의 개념에 균열을 내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대응은 한일강제병합 후 한인들이 러시 아 국적취득을 통해 일본 신민화를 방어할 수 있는 단초를 사전에 마련 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연구는 프리아무르 주 총독 운테르베르게르 시기 러시아 극동에 서 실행된 한인 이주민 단속 정책이 균열했음을 밝혔다. 황화론에 기초 한 단속 정책은 거주허가증 단속과 귀화자격 재심사 두 형태로 나타났 다. 거주허가증이 없으면 집을 임차할 수 없었고 취업에도 제한을 받았 다. 한인들은 거주허가증 발급을 늦추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며 당국 이 거주 단속 강화를 통해 의도한 황인종 유입 방지 효과를 지연시켰다. 한편 러시아 지방 당국은 한인의 귀화자격 재심사를 위해 한인 가족명부 를 조사하던 중 한인의 상이한 역법, 결혼, 작명방식 등과 마주치며 어려 움을 겪었다. 한인의 민족문화가 러시아의 법률제도가 충돌하고 있던 것 이다. 한인들은 러시아에서 거주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러시아 광산업자 들과 함께 러시아 내무대신과 국가 두마 의장 등 러시아 중앙을 설득하 고자 했다. 언론 활동을 통해 한인 이주민에 대한 러시아 지방 당국의 정 책을 비판하고 한인의 입장을 항변하기도 했다. 친일혐의에 관해서는 민 족범주로서 한인을 일본인과 명확히 구분하며 황인종의 개념에 균열을 내고자 시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대응은 한일강제병합 후 한인들이 러시 아 국적취득을 통해 일본 신민화를 방어할 수 있는 단초를 사전에 마련 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This paper examines the crack of the crackdown policy on Korean immigrants implemented by Priamur governor general Unterberger in the Russian Far East. The policy, which was based on the Yellow Peril, appeared in two ways: crackdown on residence permit and re-examining qualification of the naturalized. Without a residence permit, the house could not be rented and employment was restricted. Koreans delayed the issuance of residence permits or sometimes ignored them. It stalled the intended effect of preventing the inflow of yellow races by strengthening the crackdown on residence, which the Russian local authorities enforced. Meanwhile, it turned out that the Korean ethnic culture was conflicting with the Russian legal system. Russian local authorities suffered from encountering Korean calendar system, marriages, and naming system while investigating to re-examine qualifications of the naturalized. The Koreans, along with Russian mine operators with the same interests, tried to persuade the Russian central government, including the Russian Minister of Internal Affairs and Chairman of the State Duma, to extend their stay. Koreans criticized the crackdown policy through media activities. Regarding pro-Japanese charges, Koreans clearly distinguished themselves from Japanese as a ethnic category and tried to crack the concept of the yellow race. The series of these responses illustrate that they laid the groundwork in advance for defending against being Japanese subjects through the acquisition of Russian nationality.
재미한인 여성수필의 공간과 젠더지리 - ‘차이’와 ‘사이’, ‘탈장소’
[NRF 연계]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한국문학과 예술 Vol.40 2021.12 pp.63-105
...한인 여성수필의 공간과 의미에 대해 고찰하였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공간은 ‘몸’, ‘가정’, ‘정원’, ‘일터’, ‘거리’, ‘여행’이다. 이 공간들은 ‘차이’, ‘사이’, ‘탈장소’로 범주화하였다. 여기서 ‘차이’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본래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차이가 행해지는 수행공간을 말한다. 여기에는 여성이 젠더 정체성을 체현하는 것으로서, ‘몸’과 ‘가정’이 대표적이다. ‘몸’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체현하고 수행하는 공간으로, 훈육과 수행을 통해 그 정체성을 구축해 나간다. 이와 더불어‘가정’은 대부분 가부장적 젠더의 이념을 구현하는 장소로서의 가치가 두드러지는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공간으로 전통적인 의식을 고수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타자로서의 불안감을 해소하며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이에 비해 ‘정원’과 ‘일터’로 대변되는 ‘사이 공간’은 일종의 문화의 접경지대다. 여성들은 이들 공간을 통해 이민지의 경관을 변형하거나 재구축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고, 다양한 문화의 전도자로서 자처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접경지대를 형성한다. 한편, ‘거리, ’여행‘은 ’탈장소‘로서 여성들은 이 공간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현실의 어려움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며,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규제를 벗어나 새로운 주체를 상상하고 자신의 위치를 재규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탈장소’의 경험은 여성들의 삶의 반경을 넓히고 변화시키면서 그들이 점유한 실제적인 영토를 변화시켜 나간다. 재미한인 여성수필의 의미는 한 마디로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구성된 이분법적 공간의 체제 안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적응과 협상을 통해 위치성을 확보하고 자신만의 자리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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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젠더지리학의 관점으로 재미한인 여성수필의 공간과 의미에 대해 고찰하였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공간은 ‘몸’, ‘가정’, ‘정원’, ‘일터’, ‘거리’, ‘여행’이다. 이 공간들은 ‘차이’, ‘사이’, ‘탈장소’로 범주화하였다. 여기서 ‘차이’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본래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차이가 행해지는 수행공간을 말한다. 여기에는 여성이 젠더 정체성을 체현하는 것으로서, ‘몸’과 ‘가정’이 대표적이다. ‘몸’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체현하고 수행하는 공간으로, 훈육과 수행을 통해 그 정체성을 구축해 나간다. 이와 더불어‘가정’은 대부분 가부장적 젠더의 이념을 구현하는 장소로서의 가치가 두드러지는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공간으로 전통적인 의식을 고수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타자로서의 불안감을 해소하며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이에 비해 ‘정원’과 ‘일터’로 대변되는 ‘사이 공간’은 일종의 문화의 접경지대다. 여성들은 이들 공간을 통해 이민지의 경관을 변형하거나 재구축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고, 다양한 문화의 전도자로서 자처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접경지대를 형성한다. 한편, ‘거리, ’여행‘은 ’탈장소‘로서 여성들은 이 공간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현실의 어려움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며,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규제를 벗어나 새로운 주체를 상상하고 자신의 위치를 재규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탈장소’의 경험은 여성들의 삶의 반경을 넓히고 변화시키면서 그들이 점유한 실제적인 영토를 변화시켜 나간다. 재미한인 여성수필의 의미는 한 마디로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구성된 이분법적 공간의 체제 안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적응과 협상을 통해 위치성을 확보하고 자신만의 자리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space and meaning of Korean-American women's essays from the perspective of gender geography. The spaces that this study focuses on are 'body', 'home', 'garden', 'workplace', 'street', and 'travel'. These spaces were categorized as ‘Difference’, ‘In-betweenness’ and ‘Displacement’. Here, ‘Difference’ defines the difference between men and women as intrinsic, and refers to the space of performance in which these differences are performed. ‘body’ and ‘home’ are representative examples of women embodying their gender identity. ‘Body’ is a space that embodies and practices the patriarchal ideology, and builds its identity through discipline and training. In addition, 'home' stands out for its value as a place that embodies the ideology of patriarchal gender in most cases. It is a space that embodies the patriarchal ideology. By adhering to traditional rituals, it confirms their identity as a Korean, relieves anxiety as an outsider, and provides a sense of stability. On the other hand, the ‘In-betweenness’ represented by 'garden' and 'workplace' is a kind of cultural border, where women transform or reconstruct the landscape of immigrants through these spaces, connect the inside and the outside through new relationships, and claim to be the evangelists of various cultures, and the border area of ??new cultures. to form. Meanwhile , as 'streets and 'travel' are ‘Displacement’, women try to escape from the difficulties of reality through various experiences in this space, imagine a new subject outside of the oppression and regulation surrounding them, and reconsider their position. would like to define This experience of ‘out of place’ changes the actual territory they occupy while expanding and changing the radius of women’s lives. The meaning of Korean-American women's essays is, in a word, that they show the process of securing a position and establishing their own place through their own adaptation and negotiation within the system of dichotomous space built in this patriarchal capitalist system.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의 근대 경험 – 1920~1930년대 한인의 토지분배와 집단화
[NRF 연계]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슬라브학보 Vol.36 No.4 2021.12 pp.385-418
...한인들이 러시아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 건설에 참여하면서 경험한 사회주의적 근대 경험을 조망하는데 있다. 1922년 말에 연해주에서 내전이 종결되고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되자 한인들은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극동혁명위원회 산하에 한인전권대표로 참여하고, 소비에트집행위원회에 한인문제 전권위원들이 참여하여 사회주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기여해 나갔다. 그리고 극동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마을마다 한인소비에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시기에 연해주 한인들이 처한 문제는 매우 많았다. 한인들 대부분이 농민이었기 때문에 토지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그런데 연해주로 이주해 오는 한인들이 늘어나 소비에트 공민권 취득 문제까지 겹쳐 문제 해결을 어렵게 했다. 소비에트 당국은 일정한 기간 연해주에서 거주하면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공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소비에트 당국은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해주 지역의 국유지나 유휴지를 우선적으로 농민들에게 배분했다. 그럼에도 토지를 부여받지 못한 농민들은 하바롭스크주와 아무르주로 이주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1927년 12월 소련공산당 15차 당대회에서 급속한 중공업화와 전면적인 농업집단화 정책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극동지역 한인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인들은 이미 1923년부터 초기적 형태의 집단화를 실시해 나갔다. 빨치산 부대 출신 대원들을 중심으로 농업아르쩰을 구성한 것이 그것이다. 한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연해주에서 콜호즈 건설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비록 토지를 소유한 한인 부농을 ‘토호’로 비판하고, ‘인민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비극도 발생했지만 한인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콜호즈 건설에 나섰다. 그래서 1934년에 이르러 한인들의 전체 집단화율은 60-65%, 농민들의 경우에는 75-80%에 도달했다. 이처럼 1920-1930년대 한반도에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역사를 경험하던 시기에 연해주 한인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 새로운 근대를 경험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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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러시아 극동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들이 러시아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 건설에 참여하면서 경험한 사회주의적 근대 경험을 조망하는데 있다. 1922년 말에 연해주에서 내전이 종결되고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되자 한인들은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극동혁명위원회 산하에 한인전권대표로 참여하고, 소비에트집행위원회에 한인문제 전권위원들이 참여하여 사회주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기여해 나갔다. 그리고 극동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마을마다 한인소비에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시기에 연해주 한인들이 처한 문제는 매우 많았다. 한인들 대부분이 농민이었기 때문에 토지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그런데 연해주로 이주해 오는 한인들이 늘어나 소비에트 공민권 취득 문제까지 겹쳐 문제 해결을 어렵게 했다. 소비에트 당국은 일정한 기간 연해주에서 거주하면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공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소비에트 당국은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해주 지역의 국유지나 유휴지를 우선적으로 농민들에게 배분했다. 그럼에도 토지를 부여받지 못한 농민들은 하바롭스크주와 아무르주로 이주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1927년 12월 소련공산당 15차 당대회에서 급속한 중공업화와 전면적인 농업집단화 정책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극동지역 한인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인들은 이미 1923년부터 초기적 형태의 집단화를 실시해 나갔다. 빨치산 부대 출신 대원들을 중심으로 농업아르쩰을 구성한 것이 그것이다. 한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연해주에서 콜호즈 건설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비록 토지를 소유한 한인 부농을 ‘토호’로 비판하고, ‘인민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비극도 발생했지만 한인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콜호즈 건설에 나섰다. 그래서 1934년에 이르러 한인들의 전체 집단화율은 60-65%, 농민들의 경우에는 75-80%에 도달했다. 이처럼 1920-1930년대 한반도에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역사를 경험하던 시기에 연해주 한인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회, 새로운 근대를 경험해 나갔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ocialist modern experience experienced by Koreans living in the Russian Far East while participating in the construction of a new society after the Russian Revolution. At the end of 1922, as the civil war ended in Primorsky Krai and socialist construction began, Koreans began to actively participate in socialist construction. Participated as a representative of the Korean American plenipotentiary under the Far East Revolutionary Committee and contributed to the establishment of a socialist system by participating in the Soviet Executive Committee on Korean issues. And every Korean village living in the Far East began to build a Korean soviet. The problems faced by Koreans in Primorsky Krai during the Soviet period were very numerous. Since most Koreans were farmers, the land issue was a very sensitive issue. However, as the number of Koreans immigrating to Primorsky Krai increased, the problem of acquiring Soviet citizenship also overlapped, making it difficult to solve the problem. The Soviet authorities implemented a policy of granting citizenship to those who lived and worked in Primorsky Krai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In order to solve the land problem, the Soviet authorities gave priority to the peasants in the Primorsky Territory. Nevertheless, the peasants who were not granted land pursued a policy of emigrating to Khabarovsk and Amur. At the 15th Party Congr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in December 1927, the policy of rapid heavy industry and comprehensive agricultural collectivization was decided. This decision brought about a major change in the lives of Koreans in the Far East. So, by 1934, the overall collectivization rate of Koreans had reached 60-65%, and in the case of farmers, 75-80%. As such, in the 1920s and 1930s, when the Korean Peninsula was experiencing the dark history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oreans in Primorsky Province experienced a new era, a new society, and a new modernity.
신해혁명과 한국 - 한인 지사 金秉萬의 河南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
[NRF 연계] 역사학회 역사학보 Vol.252 2021.12 pp.32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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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closely tracks the activities of Kim Byung-man (金秉萬, 1872- 1932),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who fled to Henan(河南) province of China in November 1909, just before Korea became a Japanese colony. Having insisted on the restoration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implementation of the constitutional monarchy, he turned into a republican immediately after the exile through active exchanges with local Chinese revolutionary leaders such as Yang Yuanmao(楊源懋), and Liu Jixun(劉積勛). He also interacted with the revolutionary movement leaders in Henan and Shandong(山東) provinces, and responded to theirs requests for support in cooperation with Cho Seong- hwan(曺成煥), who were active in Beijing at that time. Kim Byung-man’s thought and activities show the influences of the Xinhai Revolution on Korea, as well as the Koreans’ widespread support for the revolutionary movements not only in the principal centers of the revolution like Guangdong(廣東), Shanghai(上海), or Nanjing(南京), but also in other parts of China. In this sense, the Xinhai Revolution was not just a republican revolution of a particular country China, but a republican revolution of all of East Asia.
[NRF 연계]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여성학논집 Vol.38 No.2 2021.12 pp.129-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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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한인의 역사를 통해 본 한반도 통일 준비
[NRF 연계] 한국통일전략학회 통일전략 Vol.21 No.4 2021.12 pp.9-40
...한인진출 역사를 시기적으로 연구* 총신대학교 교수함으로써 향후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데 목적이 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1860년대부터 조선인들의 진출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항일 독립 운동의 배후지였는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또한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가 소련 해체 후 다시 돌아온 곳도 연해주이다. 연해주는 남북분단의 아픔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가 패망한 후 남과 북은 각각 미-소의 군정점령으로 인해 갈라졌을 때 북한 지역은 소련이 김일성을 내세움으로써 북한사회주의 정권이 창출되었는데 김일성은 연해주에서 소련군에게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연해주는 우리민족에게는 애환과 슬픔의 땅이었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는 연해주는 한민족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주는 기회의 땅으로 변화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연해주는 남북한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으며 다양한 협력을 통해서 남과 북의 긴장을 완화시키며 이질적 문화들을 해소시켜 나가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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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한인진출 역사를 시기적으로 연구* 총신대학교 교수함으로써 향후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데 목적이 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1860년대부터 조선인들의 진출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항일 독립 운동의 배후지였는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또한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가 소련 해체 후 다시 돌아온 곳도 연해주이다. 연해주는 남북분단의 아픔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가 패망한 후 남과 북은 각각 미-소의 군정점령으로 인해 갈라졌을 때 북한 지역은 소련이 김일성을 내세움으로써 북한사회주의 정권이 창출되었는데 김일성은 연해주에서 소련군에게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연해주는 우리민족에게는 애환과 슬픔의 땅이었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는 연해주는 한민족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주는 기회의 땅으로 변화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연해주는 남북한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으며 다양한 협력을 통해서 남과 북의 긴장을 완화시키며 이질적 문화들을 해소시켜 나가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prepare for the unific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in the future by periodically studying the history of Korean advancement in the Primorsky Krai of Russia. The Primorsky Krai of Russia has been a region where Koreans have entered since the 1860s, and is very closely related to the history of our people. It was the hinterland of the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and it was also the birthplace of the socialist independence movement. In addition, the place where the Koreans in Russia were forced to migrate to Central Asia by Stalin and returned to Korea after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is in Maritime Province. The Primorsky Krai of Russia is also the place where the pain of division between the two Koreas begins. After the defeat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when the South and the North were divided by the U.S.-Soviet military rule, the North Korean socialist regime was created with the Soviet Union advocating Kim Il-sung, who was trained by Soviet troops in Maritime Province. So The Primorsky Krai of Russia was a land of joy and sorrow for our people. However, the present and future are transforming into a land of opportunity that opens a bright future for the younger Korean people. Economically softening can be a land of opportunity for the two Koreas, and through various cooperations, it can be used as the region to ease tensions between the two Koreans and resolve heterogeneous cultures.
[NRF 연계]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Vol.81 2021.11 pp.5-35
...한인(韓人)과 여진(女眞)이 남녀로 결합하여 여진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의 조종(祖宗)이 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금사』와 『고려사』의 금시조이야기를 비교한 결과, 『금사』에서는 사실을 기술하는 태도로써 고려 출신 금시조와 그 부인을 탁월하고 신이(神異)한 인물로 묘사한 데 반해, 『고려사』에서는 다만 ‘혹왈(或曰)’을 전달하는 태도로써 고려 출신 금시조를 도망친 중 혹은 중의 아들에 불과한 인물로 설명했다. 『금사』의 금시조이야기와 청시조이야기를 비교한 결과, 여진에서 발생한 『금사』 금시조이야기에서는 상대측인 고려인 남성을 우월시하고, 조선에서 발생한 청시조이야기에서는 상대측인 여진 남성을 우월시했다. 이 같은 차이는 일차적으로 이 이야기들의 두 주체인 한인과 여진 간의 역학관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고려가 부족 집단 단계의 여진에 앞서 있을 때, 여진의 금시조이야기에서는 고려의 훌륭한 인물이 자신들의 조종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고려의 금시조이야기에서는 자국의 미천한 인물조차 여진의 조종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각기 자기 종족·민족의 자부심을 고취하려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이 조선에 앞서 있을 때, 조선의 청시조이야기에서는 청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 자국의 인물들이 청나라의 건국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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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금사(金史)』의 금시조(金始祖)이야기와 『고려사(高麗史)』의 금시조이야기, 그리고 『금사』의 금시조이야기와 청시조(淸始祖)이야기(노달치 전설)를 각각 비교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한인(韓人)과 여진(女眞)이 남녀로 결합하여 여진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의 조종(祖宗)이 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금사』와 『고려사』의 금시조이야기를 비교한 결과, 『금사』에서는 사실을 기술하는 태도로써 고려 출신 금시조와 그 부인을 탁월하고 신이(神異)한 인물로 묘사한 데 반해, 『고려사』에서는 다만 ‘혹왈(或曰)’을 전달하는 태도로써 고려 출신 금시조를 도망친 중 혹은 중의 아들에 불과한 인물로 설명했다. 『금사』의 금시조이야기와 청시조이야기를 비교한 결과, 여진에서 발생한 『금사』 금시조이야기에서는 상대측인 고려인 남성을 우월시하고, 조선에서 발생한 청시조이야기에서는 상대측인 여진 남성을 우월시했다. 이 같은 차이는 일차적으로 이 이야기들의 두 주체인 한인과 여진 간의 역학관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고려가 부족 집단 단계의 여진에 앞서 있을 때, 여진의 금시조이야기에서는 고려의 훌륭한 인물이 자신들의 조종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고려의 금시조이야기에서는 자국의 미천한 인물조차 여진의 조종이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각기 자기 종족·민족의 자부심을 고취하려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이 조선에 앞서 있을 때, 조선의 청시조이야기에서는 청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 자국의 인물들이 청나라의 건국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 민족의 자부심을 높이려 했던 것이다.
1920년 간도 한인(조선인) 제노사이드에 동원된 한인 경찰 -순응, 협치, 제국의 대변자-
[NRF 연계]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24 No.2 2021.11 pp.31-64
...한인(조선인)’을 학살하였으며, 이 때 동원된 한인(조선인) 경찰들의 활동을 분석하였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일본외무성 또는 조선총독부에서 간도지역의 치안유지를 핑계로 국내의 경찰들을 선발하여 배치시켰으며, 간도 한인 제노사이드에 동원되었다라고 하는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간도 한인 제노사이드 때 차출되었던 한인 경찰관들은 일본군과 함께 이주 한인들을 체포하거나 학살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들의 정식 명칭은 ‘應援警察’이었다. 심지어 간도 한인 제노사이드 당시 가장 상징적인 학살이었던 ‘장암동학살’ 때에도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참여까지 하였다. 학살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이주한인들에게 ‘일본신민’으로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신호로서 진행된 귀순작업에는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1920년대에도 제국주의 일본에 적극적으로 기여했으며, 해방 후에도 국내에서 경찰에 투신한 경우도 보인다. 민족공동체의 안위를 해치면서 자신들의 영달을 꾀했던 이들이 ‘비겁한 변명’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 지라도 1920년 동족 학살에 참여했던 역사적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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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20년 오늘날 연변지역에 제국주의 일본군이 독립군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이주 ‘한인(조선인)’을 학살하였으며, 이 때 동원된 한인(조선인) 경찰들의 활동을 분석하였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이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일본외무성 또는 조선총독부에서 간도지역의 치안유지를 핑계로 국내의 경찰들을 선발하여 배치시켰으며, 간도 한인 제노사이드에 동원되었다라고 하는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간도 한인 제노사이드 때 차출되었던 한인 경찰관들은 일본군과 함께 이주 한인들을 체포하거나 학살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들의 정식 명칭은 ‘應援警察’이었다. 심지어 간도 한인 제노사이드 당시 가장 상징적인 학살이었던 ‘장암동학살’ 때에도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참여까지 하였다. 학살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이주한인들에게 ‘일본신민’으로 보호해 줄 수 있다는 신호로서 진행된 귀순작업에는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1920년대에도 제국주의 일본에 적극적으로 기여했으며, 해방 후에도 국내에서 경찰에 투신한 경우도 보인다. 민족공동체의 안위를 해치면서 자신들의 영달을 꾀했던 이들이 ‘비겁한 변명’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 지라도 1920년 동족 학살에 참여했던 역사적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냉전의 바다를 건넌다는 것 : 한인 ‘밀항자’ 석방 탄원서에 주목하여
[NRF 연계]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논총 Vol.42 No.4 2021.11 pp.179-204
...한인의 ‘밀항’은 일본사회에 공산주의를 침투시킬 가능성이있는 이동으로서, 이전의 전염병, 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 요인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렇게 한인의 ‘밀항’이 냉전과 교차하는 양상을 한인 ‘밀항자’ 석방 탄원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분석 결과, ‘밀항자’ 석방을 위하여 가족, 친인척 이외에 반공산주의계 민족단체의 관계자가 탄원인으로 등장하여 ‘밀항자’가 위험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였음을알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증명’이 언제나 유효했던 것은 아니며, 경찰 조사등을 바탕으로 GHQ/SCAP에 의한 ‘해석’의 과정을 거쳤다. 각종 이력을 근거 삼아 ‘밀항자’는 물론 탄원인의 ‘생각’을 공산주의와의 관련성이라는 측면에서‘해석’하였으며, 이는 자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궁극적으로 ‘밀항자’의석방 여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한인 ‘밀항자’ 석방 탄원서는 해방 이후한인 도일이 냉전이라는 구조적 배경에 의해 어떻게 제약을 받아 ‘불법’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정치사회적 맥락 아래에서 ‘불법’이 ‘예외’로서 인정되는 국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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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들어 한인의 ‘밀항’은 일본사회에 공산주의를 침투시킬 가능성이있는 이동으로서, 이전의 전염병, 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 요인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이렇게 한인의 ‘밀항’이 냉전과 교차하는 양상을 한인 ‘밀항자’ 석방 탄원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분석 결과, ‘밀항자’ 석방을 위하여 가족, 친인척 이외에 반공산주의계 민족단체의 관계자가 탄원인으로 등장하여 ‘밀항자’가 위험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였음을알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증명’이 언제나 유효했던 것은 아니며, 경찰 조사등을 바탕으로 GHQ/SCAP에 의한 ‘해석’의 과정을 거쳤다. 각종 이력을 근거 삼아 ‘밀항자’는 물론 탄원인의 ‘생각’을 공산주의와의 관련성이라는 측면에서‘해석’하였으며, 이는 자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으나, 궁극적으로 ‘밀항자’의석방 여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한인 ‘밀항자’ 석방 탄원서는 해방 이후한인 도일이 냉전이라는 구조적 배경에 의해 어떻게 제약을 받아 ‘불법’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정치사회적 맥락 아래에서 ‘불법’이 ‘예외’로서 인정되는 국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Since the 1950s, ‘stow-away’ by Koreans had begun to be recognized as a migration phenomenon that could infiltrate communism into Japanese society. This study examined how Koreans' ‘stow-away’ had intersected with the Cold War focusing on the petitions for the release of Korean ‘stowaways.’ As a result of the analysis, it was found that for the release of the ‘stowaways,’ officials from an anti-communist ethnic organization(Mindan) played roles as the petitioners, in addition to family and relatives. And they ‘proved’ that the ‘stowaways’ were not persons with a dangerous ‘thought.’ However, this ‘prove’ was not always valid, and it went through the process of ‘interpretation’ by GHQ/SCAP based on police investigations, etc. The personal history of the ‘stowaways’ and the petitioners was ‘interpreted’ in terms of relevance to communism, which was not without its arbitrary aspects, but ultimately had a great influence on whether or not the ‘stowaways’ were released.
중국 현대소설에 나타난 ‘타자화’된 한인여성에 대한 고찰 - 舒羣의「이웃」과 戴平萬의「만주이야기」를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중국언어문화연구회 한중언어문화연구 Vol.62 2021.11 pp.162-187
...한인여성들이 생존하기 위해 걸어야만 했던 비극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다. 두 소설은 모두 1936년에 창작되었고, 만주가 배경이며, 절박한 현실 속에서 고려인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성매매를 강요한다는 내용을 주요한 소재로 삼고 있다. 두 작가는 ‘극심한 가난은 어머니의 위대한 모성애까지 잃게 하는가.’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며 이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중국인의 시선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는 분노하고, 어떤 이는 동정한다. 또 어떤 이는 두려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우월주의’가 저변에 깔려있는 ‘타자화’의 일종이다. 이에 본고는 작품 안에 나타난 한인여성을 크게 ‘모성애를 상실한 어머니’와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딸’의 형상으로 구분하였다. 아울러 1930년대 한인여성들이 만주지역에서 최빈곤층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민족차별을 당한 이유와 사회 구조적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수췬(舒羣)의 「이웃」과 다이핑완(戴平萬)의 「만주이야기」는 1930년대 만주에서 한인여성들이 생존하기 위해 걸어야만 했던 비극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다. 두 소설은 모두 1936년에 창작되었고, 만주가 배경이며, 절박한 현실 속에서 고려인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성매매를 강요한다는 내용을 주요한 소재로 삼고 있다. 두 작가는 ‘극심한 가난은 어머니의 위대한 모성애까지 잃게 하는가.’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며 이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중국인의 시선을 보여주었다. 어떤 이는 분노하고, 어떤 이는 동정한다. 또 어떤 이는 두려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우월주의’가 저변에 깔려있는 ‘타자화’의 일종이다. 이에 본고는 작품 안에 나타난 한인여성을 크게 ‘모성애를 상실한 어머니’와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딸’의 형상으로 구분하였다. 아울러 1930년대 한인여성들이 만주지역에서 최빈곤층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민족차별을 당한 이유와 사회 구조적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Sh? Qun's 《Neighbor》Da Ping Wan's 《Manchurian Story》talk about the tragic life of Korean women who had to endure the tormet to survive in Manchuria, 1930. The two novels were both written in 1936 with Manchuria as the background, and their main subject is that mothers with lineage from Koryo both force prostitution on their daughters due to desperate situations. The two writers raised questions such as, "Does extreme poverty lead to an absence of great maternal love?" and revealed various Chinese views toward them. Some became angry and some showed pity. Some even became afraid. However, this is a type of 'otherization' underlying the 'superiorism' of Chinese. In this regard, the paper will divide Korean women in literary works into "mothers who have lost instinctive love" and "daughters forced into prostitution" in order to examine the plight of Korean women in the 1930s who failed to escape extreme poverty, as well as socio-structural issues, and analyze Chinese attitudes toward them with background knowledge.
[NRF 연계] 사단법인 미래융합기술연구학회 아시아태평양융합연구교류논문지 Vol.7 No.11 2021.11 pp.121-133
...한인과 흑인 관계, 특히 한인 이민 상점주와 흑인 토착시민 소비자 사이의 갈등에 관한 사회문화적인 구도를 분석한다. 한흑 갈등의 원인으로서 문화적 차이, 역사적 주변화,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종적 스테레오타입 형성 과정을 살펴보며, 특히 LA와 같은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적 대도시 공간에서의 경제적 지형도를 핵심 쟁점으로 고찰한다. 본 논문에서는 LA 인종폭동 25주년에 제작된 한국계 미국 이민 2세대 영화로서 저스틴 전(Justin Chon)의 〈국〉(Gook, 2017)을 중심으로 하여, 소자본 자영업 공간에서의 한흑 갈등에 나타난 경제지리적 역학관계,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문화적 편견, 인종적 분리, 인종서열 관념, 대도시 폭력의 쟁점을 분석한다. 이 작품에 나타난 사회적 소수자로서 한흑 간의 공통적인 좌절과 분노의 양상을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특히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한 한흑 유대 형성의 근간으로서 생명 공동체로서의 상호 연결성과 초인종적 공감의 영역에 관한 인식에 주목하며, 미국 내 다인종 커뮤니티의 공존을 향한 문화적 문식성을 확장하는 시민 대화의 청사진을 탐색한다. 특히 〈국〉에서 제시된 LA 인종 폭동의 희생을 대가로 한 생명계의 상호 연결성의 심층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한흑 공존의 에피파니는 사회적 공감에 대한 민주적 인식, 사회치유적 커뮤니케이션을 제고하는 미래지향적 전망을 확장하는 것으로, 이는 한흑 역사의 전기이자, 초인종적 공감에 근거한 미래 세대의 민주시민의식 확장을 전망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분석된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논문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 인종 폭동에 나타난 대도시 공간에서의 한인과 흑인 관계, 특히 한인 이민 상점주와 흑인 토착시민 소비자 사이의 갈등에 관한 사회문화적인 구도를 분석한다. 한흑 갈등의 원인으로서 문화적 차이, 역사적 주변화,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종적 스테레오타입 형성 과정을 살펴보며, 특히 LA와 같은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적 대도시 공간에서의 경제적 지형도를 핵심 쟁점으로 고찰한다. 본 논문에서는 LA 인종폭동 25주년에 제작된 한국계 미국 이민 2세대 영화로서 저스틴 전(Justin Chon)의 〈국〉(Gook, 2017)을 중심으로 하여, 소자본 자영업 공간에서의 한흑 갈등에 나타난 경제지리적 역학관계,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문화적 편견, 인종적 분리, 인종서열 관념, 대도시 폭력의 쟁점을 분석한다. 이 작품에 나타난 사회적 소수자로서 한흑 간의 공통적인 좌절과 분노의 양상을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특히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한 한흑 유대 형성의 근간으로서 생명 공동체로서의 상호 연결성과 초인종적 공감의 영역에 관한 인식에 주목하며, 미국 내 다인종 커뮤니티의 공존을 향한 문화적 문식성을 확장하는 시민 대화의 청사진을 탐색한다. 특히 〈국〉에서 제시된 LA 인종 폭동의 희생을 대가로 한 생명계의 상호 연결성의 심층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한흑 공존의 에피파니는 사회적 공감에 대한 민주적 인식, 사회치유적 커뮤니케이션을 제고하는 미래지향적 전망을 확장하는 것으로, 이는 한흑 역사의 전기이자, 초인종적 공감에 근거한 미래 세대의 민주시민의식 확장을 전망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분석된다.
This paper is aimed at exploring the sociocultural matrix of Korean-African American relations and immigrant merchant-native customer conflict connected to a large-scale disturbance in the Los Angeles riots of 1992. It deals with issues involved in cultural disparities, historical marginalization, and racialized stereotypes of social minorities in the economic geography of multi-racial, multi-ethnic, and multi-cultural urban space. The second generation Korean American Justin Chon’s Gook, a 2017 American film on the 25th anniversary of the LA riots, traces the dominant racial and cultural divisions in black-Korean space and ensuing traumatic violence of the interethnic struggle. This work focuses on the socioeconomic dynamics resulting from racial hierarchy, lack of social communication and mutual prejudice and frustration on both Korean immigrant merchants and African American native consumers. Gook presents a portrait of the uncommonly interwoven young ‘black-Korean family,’ and opens up dialogues between Koreans and African Americans for a better awareness of social empathy. The transracial empathetic perception of commonalities and life awareness beyond misconstructed and distorted generalizations of social outsiders enhances the cultural literacy for black-Korean civil discussions. A deep understanding of the communal respect of life in Gook ultimately leads to extending young people’s minds for a democratic awareness of civic concern and to envisioning a perspective of social healing communication for future challenges and outlooks of Korean-African American coexistence and interactions.
[NRF 연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76 2021.11 pp.155-192
...한인노동자와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내선융화’ 사회사업 단체들이 생겨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인이 설립·운영하다가 수년 내에 사라진 단체와 달리, 조선인이 설립하고 운영에도 일부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유학생 지원단체, 역행사(力行社)는 1924년에 설립되어 1940년대까지 존속했다. 역행사는 조선총독부의 전·현직 관료 및 일본과 조선을 대표하는 기업·기업인, 조선인 유지들이 재정적 뒷받침과 운영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안정적인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임원과 회원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설립 초기의 임원진에는 도야마 미쓰루와 같이 민간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탱했던 아시아주의 우익정치단체 관련인물들이 많았지만 1928년에 임원 구성 체제가 바뀐 후에는 임원과 일본인 회원 양쪽 모두 조선총독부 관계자가 다수를 점했다. 조선총독 2명, 정무총감과 경무국장 각 4명이나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 내지의 내무(경찰), 식산(산업), 재무, 학무 관료도 적지 않았다. 기업·기업인은 조선에서 사업을 하거나 조선과 이해관계가 깊은 경우와 조선 및 만주 경영의 핵심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관계자가 대부분이었다. 소수의 조선인 임원·회원은 대부분 중추원·부회·도회 및 도평의원. 상공회의소 관계자와 실업가로, 직업적으로는 식민 권력의 정치, 경제를 지탱하는 ‘보조’ 역할의 일환으로 역행사 재정의 일부를 담당함으로써 일제의 교육정책과 ‘내선융화’를 도왔다. 주요 사업은 기숙사와 식당, 일자리 소개, 학비 지원이었다. 숙식 제공 및 아르바이트 알선은 일부 노동자를 포함한 고학생을 대상으로 폭넓게 전개했다. 그러나 무료 기숙사 입사와 학비 지원은 “품행방정” 즉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학업에만 힘쓰려 하는 고학생 중 소수의 실업 전공자에 한해서 실시하여 졸업 후 실업 분야의 하급 관료 및 실무자로서의 취직까지 보장하였다. 조선총독부와의 밀접한 관계와 사업의 내용은 역행사의 성격을 ‘내선융화’ 및 식민지 교육정책의 구현으로 규정했고, 이로 인해 일본 유학을 포함한 조선인 교육 및 지배정책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일제가 조선인 교육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역행사를 통해 구현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자행된 조선인학살로 일제의 ‘내선융화’ 슬로건의 허구성이 폭로되었다. 일본 내지에서 1924년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내선융화 촉진’이었고, 재일 한인노동자와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내선융화’ 사회사업 단체들이 생겨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인이 설립·운영하다가 수년 내에 사라진 단체와 달리, 조선인이 설립하고 운영에도 일부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유학생 지원단체, 역행사(力行社)는 1924년에 설립되어 1940년대까지 존속했다. 역행사는 조선총독부의 전·현직 관료 및 일본과 조선을 대표하는 기업·기업인, 조선인 유지들이 재정적 뒷받침과 운영에 직접 관여함으로써 안정적인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임원과 회원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설립 초기의 임원진에는 도야마 미쓰루와 같이 민간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탱했던 아시아주의 우익정치단체 관련인물들이 많았지만 1928년에 임원 구성 체제가 바뀐 후에는 임원과 일본인 회원 양쪽 모두 조선총독부 관계자가 다수를 점했다. 조선총독 2명, 정무총감과 경무국장 각 4명이나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 내지의 내무(경찰), 식산(산업), 재무, 학무 관료도 적지 않았다. 기업·기업인은 조선에서 사업을 하거나 조선과 이해관계가 깊은 경우와 조선 및 만주 경영의 핵심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관계자가 대부분이었다. 소수의 조선인 임원·회원은 대부분 중추원·부회·도회 및 도평의원. 상공회의소 관계자와 실업가로, 직업적으로는 식민 권력의 정치, 경제를 지탱하는 ‘보조’ 역할의 일환으로 역행사 재정의 일부를 담당함으로써 일제의 교육정책과 ‘내선융화’를 도왔다. 주요 사업은 기숙사와 식당, 일자리 소개, 학비 지원이었다. 숙식 제공 및 아르바이트 알선은 일부 노동자를 포함한 고학생을 대상으로 폭넓게 전개했다. 그러나 무료 기숙사 입사와 학비 지원은 “품행방정” 즉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학업에만 힘쓰려 하는 고학생 중 소수의 실업 전공자에 한해서 실시하여 졸업 후 실업 분야의 하급 관료 및 실무자로서의 취직까지 보장하였다. 조선총독부와의 밀접한 관계와 사업의 내용은 역행사의 성격을 ‘내선융화’ 및 식민지 교육정책의 구현으로 규정했고, 이로 인해 일본 유학을 포함한 조선인 교육 및 지배정책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일제가 조선인 교육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역행사를 통해 구현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In September 1923, the massacre of Koreans during the Great Kanto Earthquake revealed the fabrication of Japan’s slogan of ‘NaeseonYunghwa (Harmonious integration of Koreans and Japanese)’. The most urgent task in Japan in 1924 was to promote ‘NaeseonYunghwa’, and ‘NaeseonYunghwa’ social work groups for Korean workers and students in Japan was established. Unlike organizations that disappeared within a few years after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a new type of Korean students support organization ‘Yeokhaeng-sa’ in which Koreans participated in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was established in 1924 and survived until 1940. ‘Yeokhaeng-sa’ was able to carry out stable projects by former and incumbent officials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ompanies, businessmen, and Korean influential persons directly participating in finance and operation. At the beginning, there were many executives related to Asian right-wing political organizations, but after the executive composition system changed in 1928, officials from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ccounted for the majority. The main projects were dormitory, restaurant, job introduction, and tuition support. The provision of accommodation and meals and part-time job arrangements were widely developed for hard-working students, including some workers. However, free dormitory and tuition support were provided only to a few hard-working students who did not participate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worked only on their studies, guaranteeing employment as low-ranking bureaucrats and practitioners in the field of business after graduation. The close relationship with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the contents of the project defined the nature of retrograde events as ‘NaeseonYunghwa’ and the implementation of colonial education policies. Therefore, it shows a good example of the Korean education and governance policy, including studying abroad in Japan. It can also be said that what Japan wanted to realize through education for Koreans was realized through ‘Yeokhaeng-sa’ projects.
‘마주한 시간’과 ‘도래할 시간’ 사이에서 - 남미 지역 한인시 연구
[NRF 연계] 한국문학연구학회 현대문학의 연구 Vol.75 2021.10 pp.77-108
...한인 시학의 내적 논리를 분석하여 재외코리안문학 연구의 확장성을 도모하는 데 있다. 남미 한인 시의 시간성은 이주지에 가서 마주한 시간과 그곳으로 도래할 시간 사이에서 펼쳐지는 문화사적이고 무의식적인 장소성 속에서도 감지된다. 남미 지역에서 활동한 문제적 시인들로 목동균, 주성근, 황운헌, 안경자, 김재성, 맹하린, 심근종, 박상수, 배정웅, 윤춘식, 임동각 등을 꼽아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그 중에서도 남미 한인문학의 정체성을 시간성 차원에서 예시하고 자신만의 미학적 문법으로 고양시킨 김재성, 목동균, 배정웅의 시학에 주목하였다. 그들 시에 작동하는 시간성은 남미 지역에 가서 마주하게 된 ‘현실’과 그 현실을 넘기 위한 ‘상상’이 다가오며 발생하는데 크게 세 가지 맥락으로 감지된다. 첫째, 이주지에서 마주한 힘든 시간과는 온전히 다른 시간이 도래해 주기를 욕망하는 경우이다. 이 두 시간은 서로 단절돼 있으며 종말론적인 상상 속에서 작동한다. 둘째, 그렇게 도래한 시간이 이주하기 전의 시간과 유사해지는 정황이다. 여기에는 데리다(J·Derrida)적 시간성이 흐른다. 셋째, 마주한 시간은 부각되지만 희망의 시간이 잘 도래하지 않는 경우이다. 상기 세 시인의 시에는 타 지역 한인의 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시간의 직진성, 역설성, 적멸성이 감지된다. 이 시간적 상상력은 남미 한인 시의 한 전형적 시간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김재성의 시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남미 광야로 도래시킨다. 그 시간이 이주지 남미에서 직면한 시간을 죄악된 것처럼 지시하기 때문이다. 목동균의 시는 이주한 곳에서 마주한 낯선 시간 속으로 한국에서 건너온 기억의 시간이 겹쳐지는 사태를 부각한다. 배정웅의 시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가 무한히 연기되는 비극적인 현재와 만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멸의 시간성을 경험하게 된다. 본 연구의 성과는 아직 한국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더 많은 남미 지역의 한인 시인들을 재외코리안문학 연구의 장으로 초대시킬 것으로 예상한다. 더 나아가 볼리비아, 페루 등 지역의 한글문학까지 접근케 하는 연구 시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시간성’ 의제에 입각하여 남미 지역 한인 시학의 내적 논리를 분석하여 재외코리안문학 연구의 확장성을 도모하는 데 있다. 남미 한인 시의 시간성은 이주지에 가서 마주한 시간과 그곳으로 도래할 시간 사이에서 펼쳐지는 문화사적이고 무의식적인 장소성 속에서도 감지된다. 남미 지역에서 활동한 문제적 시인들로 목동균, 주성근, 황운헌, 안경자, 김재성, 맹하린, 심근종, 박상수, 배정웅, 윤춘식, 임동각 등을 꼽아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그 중에서도 남미 한인문학의 정체성을 시간성 차원에서 예시하고 자신만의 미학적 문법으로 고양시킨 김재성, 목동균, 배정웅의 시학에 주목하였다. 그들 시에 작동하는 시간성은 남미 지역에 가서 마주하게 된 ‘현실’과 그 현실을 넘기 위한 ‘상상’이 다가오며 발생하는데 크게 세 가지 맥락으로 감지된다. 첫째, 이주지에서 마주한 힘든 시간과는 온전히 다른 시간이 도래해 주기를 욕망하는 경우이다. 이 두 시간은 서로 단절돼 있으며 종말론적인 상상 속에서 작동한다. 둘째, 그렇게 도래한 시간이 이주하기 전의 시간과 유사해지는 정황이다. 여기에는 데리다(J·Derrida)적 시간성이 흐른다. 셋째, 마주한 시간은 부각되지만 희망의 시간이 잘 도래하지 않는 경우이다. 상기 세 시인의 시에는 타 지역 한인의 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시간의 직진성, 역설성, 적멸성이 감지된다. 이 시간적 상상력은 남미 한인 시의 한 전형적 시간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김재성의 시는 카이로스적 시간을 남미 광야로 도래시킨다. 그 시간이 이주지 남미에서 직면한 시간을 죄악된 것처럼 지시하기 때문이다. 목동균의 시는 이주한 곳에서 마주한 낯선 시간 속으로 한국에서 건너온 기억의 시간이 겹쳐지는 사태를 부각한다. 배정웅의 시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가 무한히 연기되는 비극적인 현재와 만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멸의 시간성을 경험하게 된다. 본 연구의 성과는 아직 한국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더 많은 남미 지역의 한인 시인들을 재외코리안문학 연구의 장으로 초대시킬 것으로 예상한다. 더 나아가 볼리비아, 페루 등 지역의 한글문학까지 접근케 하는 연구 시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internal logic of Korean poetics in South America based on the ‘temporality’ agenda, and to promote the scalability of the study of Korean literature abroad. The temporality of Korean poetry in South America is sensed in the cultural history and unconscious spatiality that unfolds between the time faced and the time to come. Among the problematic poets who have worked in South America are Mok Dong-gyun, Joo Seong-geun, Hwang Un-heon, An Gyeong-ja, Kim Jae-seong, Maeng Ha-rin, Myo-jong Shin, Park Sang-soo, Bae Jeong-woong, Yun Chun-sik, and Lim Dong-gak. Among them, this study focused on the poetics of Kim Jae-seong, Mok Dong-gyun, and Bae Jeong-woong, who exemplified the identity of South American Korean literature in terms of temporality and enhanced it with their own aesthetic grammar. The temporality that works in these poems arises from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eality’ faced in South America and the ‘imagination’ to overcome that reality. This is mainly perceived in three contexts. First, it is a case of desire to arrive at a time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difficult times faced in the relocation area. These two times are disconnected from each other and operate in the eschatological imagination. Second, the time that has arrived is similar to the time before migration. Derridan temporality flows here. Third, the time faced is highlighted, but the time of hope does not come well. The poems of Kim Jae-seong, Mok Dong-gyun, and Bae Jeong-woong show the straight-forwardness, paradox, and demise of time that are difficult to find in the poetry of Koreans in other regions. This temporal imagination is problematic in that it reveals a typical sense of time in South American Korean poetry. Kim Jae-seong’s poems bring kairos time into the South American wilderness. It is because that time marks the time faced in South America as a sinful time. Mok Dong-gyun’s poetry highlights the overlapping of memories from Korea in the unfamiliar time that he encountered at the place he moved to. Bae Jung-woong’s poetry meets the tragic present, in which the future to come is postponed indefinitely. In the process, he experiences the temporality of annihilation.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expected to invite more Korean poets from South America, who have not yet been introduced to Korean academic circles, to the study of Korean literature in foreign lands. Furthermore, it will be possible to create a research perspective that allows access to Korean literature of regions such as Bolivia and Peru.
전수산의 공연 활동에 구현된 20세기 초 한인 디아스포라 근대 여성의 표상
[NRF 연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문화 Vol.95 2021.09 pp.207-228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This study examines diverse aspects of new women exemplified in Chun Susan’s life in early twentieth-century Hawai’i, with a particular focus on her performance activities. Despite having no experience learning Korean music and dance in Korea, Chun taught and promoted traditional performing arts as a teacher of the Hyung Jay Club, the YWCA-affiliated Korean cultural organization. Second-generation Koreans of the club regularly participated in multicultural events that the Honolulu Academy of Arts, hosted for promoting a better understanding of cultures of different ethnic groups in Hawai‘i. Traditionally, the presentation of Korean traditional culture to general audiences was exclusively the realm of gisaeng in Korea. As an elite woman from a high-class family, Chun took the role of preserving and presenting the performing arts in Hawai‘i by transcending old customs of the traditional Korean music world. Her open attitudes toward Korean native music, regardless of religious origins, inclusion of men of different backgrounds in stage performances, and practicing Korean traditional percussion instruments, all deviated from long-established customs in Korea. Chun’s cultural activities, alongside her well-known nationalist movements, aptly represent the life of modern women in the Korean diaspora.
1970-1980년대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여성의 입양 경험과 초국적 정체성 -<한국뿌리(Racines Coréennes)>의 입양 증언을 중심으로-
[NRF 연계]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Vol.104 2021.09 pp.291-332
...한인이주 양상을 포괄적으로 다뤄왔던 반면, 한인여성 이주와 젠더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거나 가시화하는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노동이주나 결혼이주 같은 일반이주에서 볼 수 있듯 국제입양에서도 여성의 수와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이주의 여성화’ 현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동안 한국현대사와 트랜스내셔널 이주역사에 잊히고 배제되어온 한인입양여성의 삶의 경험과 기억을 역사화 하는 다양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1970~1980년대에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여성의 입양 경험과 정체성 형성과 초국적 정체성 수용, 그리고 그들의 ‘엄마 되기’ 과정을 통해 한인입양여성의 삶의 경험과 기억을 역사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프랑스한인입양인협회 <한국뿌리(Racines Coréennes)>의 정기발행지인 「Hamkae(함께)」에 실린 입양여성의 자필 증언과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코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해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여성의 진짜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트랜스내셔널 이주역사를 다각도로 고찰하고 관련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국현대사에서 국제입양은 부정할 수 없는 유산이다. 그동안 국내의 일반이주 및 디아스포라 연구는 한인이주 양상을 포괄적으로 다뤄왔던 반면, 한인여성 이주와 젠더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거나 가시화하는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노동이주나 결혼이주 같은 일반이주에서 볼 수 있듯 국제입양에서도 여성의 수와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이주의 여성화’ 현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동안 한국현대사와 트랜스내셔널 이주역사에 잊히고 배제되어온 한인입양여성의 삶의 경험과 기억을 역사화 하는 다양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1970~1980년대에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여성의 입양 경험과 정체성 형성과 초국적 정체성 수용, 그리고 그들의 ‘엄마 되기’ 과정을 통해 한인입양여성의 삶의 경험과 기억을 역사화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프랑스한인입양인협회 <한국뿌리(Racines Coréennes)>의 정기발행지인 「Hamkae(함께)」에 실린 입양여성의 자필 증언과 인터뷰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코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해 프랑스에 입양된 한인여성의 진짜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트랜스내셔널 이주역사를 다각도로 고찰하고 관련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The phenomenon of international adoption in Korean contemporary history is an undeniable legacy. While the studies of general migration and diaspora in Korea have dealt with the pattern of Korean migration in a comprehensive way, the studies of historically identifying or visualizing the relation between Korean female migration and gender have not been properly conducted. As seen in general migration such as labor migration and marriage migration, international adoption also shows a ‘feminization of migration’ phenomenon that the number and presence of women remarkably increases. In this regard, there is needed a multi-faceted research to historicize the experiences and memories of Korean female adoptees who have been forgotten and excluded from Korean contemporary history and transnational migration histor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historicize the lives and memories of Korean female adoptees through the adoption experiences and transnational identity formation of Korean women who were adopted to France in the 1970s and 1980s, and their process of ‘becoming a mother’. To this end, we will analyze the contents of interviews and handwritten testimonies of Korean female adoptees published in Hamkae, a regular publication of the French Korean Adoptee Association <Racines Coreennes>. Through this study, by listening to the real voices of Korean female adoptees in France, it will be possible to examine transnational migration history from various angles and contribute to broadening the horizons of related research.
일제 말기 탈출 한인 청년에 대한 중국 군사당국의 인식과 정책 한국광복군 입대 사례를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연구 Vol.98 2021.09 pp.137-169
...한인 청년들에 대한 관리와감독을 강화시켰고 이들을 전쟁포로와 같이 대우했다. 태륜기와 황갑수의 경우도 처음에 접선할 때부터 이들의 물건을 압수하고 수용시설에 억류하였다. 태륜기가 중국 군대에 남아 항일작전을 하자는 한인 동지의 건의를 거절하고 임정으로 가기를 고집하여 ‘포로’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수용소에서 보내야 했다. 황갑수 일행은 중경행을 원했지만 중국 군사당국의 요청을 수락해 현지에 남아 중국군과 항일전을 하다가 태륜기보다 더 빨리 광복군과 만날 수있었다. 태륜기 일행이 수용소에 수용되던 동안 광복군 측의 인사들이 꾸준히 찾아와강연, 교육, 위문을 하고, 송금까지 했지만, 곧장 광복군에 편입되지 못했다.그 원인은 당시 임시정부·광복군과 중국 정부·군사당국의 친소 관계, 탈출 한인에 대한 중국 정부의 기본 방침, 태륜기 일행의 복잡한 구성, 그리고 수용소에서탈출한 전력 때문이었다. 탈출 한인 청년에 대한 중국 정부 당국의 인식과 정책은 크게 광복군에 대한점검 작업을 시행한 1943년 5~7월 전후와 「한국광복군원조판법」이 체결, 시행된 1945년 4~ 5월 전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점검 작업을 시행하기 전에도탈출 청년에 대한 ‘교화’ 절차가 있었지만 엄격하지 않았고 광복군의 요청이있을 때 간첩 혐의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광복군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점검 결과 보고서에 나타난 광복군에 편입된 ‘포로’ 출신 대원들에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평가가 중국 국민당 군사당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임정과 광복군 측의 대우개선 요구가 수용되어 탈출 한인들을 일본인 포로와분리해서 수용했지만, ‘9개 준승’의 취소에 따른 광복군과 중국군사위원회 간의정식관계가 단절되는 관계로 억류된 탈출 한인에 관한 교섭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중국 국민당 군사당국은 광복군 창립 초기에 광복군 활동에 무관심하고 지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1944년에 들어 늘어난 탈출 한인 청년들에 대한 관리와감독을 강화시켰고 이들을 전쟁포로와 같이 대우했다. 태륜기와 황갑수의 경우도 처음에 접선할 때부터 이들의 물건을 압수하고 수용시설에 억류하였다. 태륜기가 중국 군대에 남아 항일작전을 하자는 한인 동지의 건의를 거절하고 임정으로 가기를 고집하여 ‘포로’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수용소에서 보내야 했다. 황갑수 일행은 중경행을 원했지만 중국 군사당국의 요청을 수락해 현지에 남아 중국군과 항일전을 하다가 태륜기보다 더 빨리 광복군과 만날 수있었다. 태륜기 일행이 수용소에 수용되던 동안 광복군 측의 인사들이 꾸준히 찾아와강연, 교육, 위문을 하고, 송금까지 했지만, 곧장 광복군에 편입되지 못했다.그 원인은 당시 임시정부·광복군과 중국 정부·군사당국의 친소 관계, 탈출 한인에 대한 중국 정부의 기본 방침, 태륜기 일행의 복잡한 구성, 그리고 수용소에서탈출한 전력 때문이었다. 탈출 한인 청년에 대한 중국 정부 당국의 인식과 정책은 크게 광복군에 대한점검 작업을 시행한 1943년 5~7월 전후와 「한국광복군원조판법」이 체결, 시행된 1945년 4~ 5월 전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점검 작업을 시행하기 전에도탈출 청년에 대한 ‘교화’ 절차가 있었지만 엄격하지 않았고 광복군의 요청이있을 때 간첩 혐의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광복군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점검 결과 보고서에 나타난 광복군에 편입된 ‘포로’ 출신 대원들에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평가가 중국 국민당 군사당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임정과 광복군 측의 대우개선 요구가 수용되어 탈출 한인들을 일본인 포로와분리해서 수용했지만, ‘9개 준승’의 취소에 따른 광복군과 중국군사위원회 간의정식관계가 단절되는 관계로 억류된 탈출 한인에 관한 교섭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NRF 연계]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발칸연구소 동유럽발칸연구 Vol.45 No.3 2021.08 pp.3-25
...한인 귀환’ 문제에 있어 1950년대부터 결성되어 1990년대 여러 촉구 활동을 한 NGO의 역할이 확대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있다.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는 70~80년대의 NGO들의 활발한 요구와 촉구 활동으로 90년대 들어와 빠른 진전을 보인 점에 주목하며 NGO들의 결성 및 활동의 운동 역량과 귀환 문제가 각 정부를 공동의 협상의제로 부상한 정치적 기회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분석의 틀로는 김선미가 제시한 ‘시민운동의 정책적 영향력 분석모델’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분석모델은 ‘정치적 기회’와 ‘운동 역량’이라는 두 변수를 축으로 이 두 변수의 조합이 정책적으로 어떠한 결과 가져오는가를 분석할 수 있는 틀로서 본 논문에서는 시민운동 결과와 정책적 영향력을 네 가지 유형(1. 완전수용, 2. 타협적 수용, 3. 배타적 수용, 4. 완전배제)으로 제시한다. 본 연구에서는 위 분석모델의 틀 안에서 사할린 한인 문제가 본국으로의 귀환이라는 결과에 이르기까지 NGO의 역할이 확대되어가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첫 번째로는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에 대한 NGO들의 역할을 보면, 초기의 이들의 요구와 주장은 4번 유형(완전배제)으로 정책에서 ‘완전 배제’되어 있는 상태에 있다가 3번 유형(배타적 수용)으로 배타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여 제한적으로 수용되었다. 이후 ‘한-일 적십자사’와 ‘의원간담회’의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활동으로 옮겨가면서 정부 간의 협상을 이끌어 내어 1번 유형(완전수용)으로 NGO들의 요구가 정책에 완전수용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사할린 한인 문제에 있어 NGO들의 역할에 의한 정책의 변화는 NGO만의 힘이 아니라 국제 정세의 변화와 같은 정치적 기회의 확대와 운동 역량의 강화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서 정부 간의 새로운 협상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도출하였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에 있어 1950년대부터 결성되어 1990년대 여러 촉구 활동을 한 NGO의 역할이 확대되는 과정을 살펴보는데 있다.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는 70~80년대의 NGO들의 활발한 요구와 촉구 활동으로 90년대 들어와 빠른 진전을 보인 점에 주목하며 NGO들의 결성 및 활동의 운동 역량과 귀환 문제가 각 정부를 공동의 협상의제로 부상한 정치적 기회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분석의 틀로는 김선미가 제시한 ‘시민운동의 정책적 영향력 분석모델’을 이용하고자 한다. 이 분석모델은 ‘정치적 기회’와 ‘운동 역량’이라는 두 변수를 축으로 이 두 변수의 조합이 정책적으로 어떠한 결과 가져오는가를 분석할 수 있는 틀로서 본 논문에서는 시민운동 결과와 정책적 영향력을 네 가지 유형(1. 완전수용, 2. 타협적 수용, 3. 배타적 수용, 4. 완전배제)으로 제시한다. 본 연구에서는 위 분석모델의 틀 안에서 사할린 한인 문제가 본국으로의 귀환이라는 결과에 이르기까지 NGO의 역할이 확대되어가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첫 번째로는 사할린 한인 귀환 문제에 대한 NGO들의 역할을 보면, 초기의 이들의 요구와 주장은 4번 유형(완전배제)으로 정책에서 ‘완전 배제’되어 있는 상태에 있다가 3번 유형(배타적 수용)으로 배타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여 제한적으로 수용되었다. 이후 ‘한-일 적십자사’와 ‘의원간담회’의 본격적이고 실질적인 활동으로 옮겨가면서 정부 간의 협상을 이끌어 내어 1번 유형(완전수용)으로 NGO들의 요구가 정책에 완전수용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사할린 한인 문제에 있어 NGO들의 역할에 의한 정책의 변화는 NGO만의 힘이 아니라 국제 정세의 변화와 같은 정치적 기회의 확대와 운동 역량의 강화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서 정부 간의 새로운 협상을 이끌어냈다는 점을 도출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process of expanding the role of NGOs, which were formed in the 1950s and carried out various urging activities in the 1990s, in the issue of ‘Repatriation of Koreans to Sakhalin’. Paying attention to the fact that, despite the vigorous demands and urging of NGOs in the 1970s and 1980s, the issue of the repatriation of Koreans to Sakhalin made rapid progress from the 1990s, the movement capacity of NGOs and their activities and the issue of repatriation were shared by each government. Analyze the relevance of political opportunities that have emerged as the negotiating agenda. As a framework for the analysis, we intend to use the ‘Policy Impact Analysis Model of Citizen Movements’ presented by Kim Sunmi. This analysis model is a framework that can analyze the policy results of the combination of these two variables, centered on two variables, ‘'political opportunity’ and ‘exercise capacity’, and is a framework for analyzing the results of civic movement and policy influence into four types (1. Complete acceptance, 2. Compromise acceptance, 3. Exclusive acceptance, 4. Complete exclusion). In this study, within the framework of the above analysis model, the process of expanding the role of NGOs until the result of the Sakhalin Korean issue returning to their home country was analyzed. As a result of the analysis, first, looking at the role of NGOs in the issue of the return of Koreans to Sakhalin, their demands and arguments in the early stage were Type 4, in a state of being ‘completely excluded’ from the policy, and then being exclusively accepted as Type 3. started with limited acceptance. Since then, it can be seen that the demands of the Type 1 NGOs were fully accepted in the policy as they moved to the full-scale and practical activities of the ‘Korea-Japan Red Cross’ and the ‘Meetings of Parliamentarians’, leading to negotiations between the governments. Second, it was derived that the policy change due to the role of NGOs in this Sakhalin Korean issue led to negotiations between the new governments as a result of the simultaneous action of expansion of political opportunities and strengthening of exercise capacity, not just the power of N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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