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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F 연계] 만주학회 만주연구 Vol.30 2020.10 pp.9-39
...한인 관원에 대한 홍타이지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후금의 汗으로 즉위한 이후 누르하치에 의해 외면받았던 漢人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과거 明에서의 지위와 투항한 이후의 공적을 기준으로 관직을 수여하였으며, 예기치 않은 친지의 죽음에 대해 보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인 관원과 후금 지배층간 혼인을 통한 滿・漢의 결합도 시도하였다. 이후 孔有德 등이 투항하자 그들만의 별도 조직도 인정해주었으며, 한인 관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기존 八旗의 모습을 본떠 체계적인 관리를 시도하였다. 홍타이지는 한인 관원에 대한 통제도 잊지 않았다. 후금의 한인 관원이 증가하면서 그들은 과거 明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변화의 방책이 담긴 上言[上疏]를 올렸다. 이에 대해 홍타이지는 국정의 폐단을 개혁하거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반복적으로 언급한 明에 대한 무모한 군사행동이나 女眞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비난은 힐책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한인 관원들이 단체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요구하자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 자체를 감사히 여기고 국가를 위해 더욱 노력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즉, 홍타이지는 북방민족 군주로서 강렬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한인 관원을 상대하였다. 만약 한인 관원이 二等民族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잊어버리고 정해진 한계선을 넘으면 홍타이지의 엄중한 경고를 맞이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북방민족 군주가 유능한 한인 신하의 보좌를 받아 내부의 개혁을 단행하고 문명의 길로 들어선다는 기존 서사가 최소한 홍타이지 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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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天聰年間 後金에 투항한 한인 관원에 대한 홍타이지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후금의 汗으로 즉위한 이후 누르하치에 의해 외면받았던 漢人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과거 明에서의 지위와 투항한 이후의 공적을 기준으로 관직을 수여하였으며, 예기치 않은 친지의 죽음에 대해 보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인 관원과 후금 지배층간 혼인을 통한 滿・漢의 결합도 시도하였다. 이후 孔有德 등이 투항하자 그들만의 별도 조직도 인정해주었으며, 한인 관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기존 八旗의 모습을 본떠 체계적인 관리를 시도하였다. 홍타이지는 한인 관원에 대한 통제도 잊지 않았다. 후금의 한인 관원이 증가하면서 그들은 과거 明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변화의 방책이 담긴 上言[上疏]를 올렸다. 이에 대해 홍타이지는 국정의 폐단을 개혁하거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반복적으로 언급한 明에 대한 무모한 군사행동이나 女眞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비난은 힐책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한인 관원들이 단체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요구하자 그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 자체를 감사히 여기고 국가를 위해 더욱 노력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즉, 홍타이지는 북방민족 군주로서 강렬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한인 관원을 상대하였다. 만약 한인 관원이 二等民族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잊어버리고 정해진 한계선을 넘으면 홍타이지의 엄중한 경고를 맞이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북방민족 군주가 유능한 한인 신하의 보좌를 받아 내부의 개혁을 단행하고 문명의 길로 들어선다는 기존 서사가 최소한 홍타이지 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examined Hongtaiji’s ambivalence towards Han officials who had surrendered to the Later Jin. Having succeeded Khan to the throne, Hongtaiji actively appointed Han Chinese, recruited public officers based on these men’s Ming Dynasty statuses, and considering the sum of reparations they paid. He also tried to unify the Manchu-Han, orchestrating marriages between Han officials and the Later Jin ruling classes. He would later manage the increasing number of Han officials systemically and based on the Eight Banners, reforming the government while strengthening his authority. However, he disregarded Han officials’ pleas to engage in reckless military operations against the Ming Dynasty and their criticism of the Jurchen people’s traditions and customs. In essence, Hongtaiji became a symbolic ruler of the northern race and dealt with Han officials with a strong sense of identity. While past narratives focus on Han officials’ roles in the carrying out of internal reforms, at least under Hongtaiji’s reign these explanation is not suitable.
天人關係에 대한 漢人의 인식 ― 『漢書』「五行志」역주 ―
[NRF 연계] 중국고중세사학회 중국고중세사연구 Vol.54 2019.11 pp.14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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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ve elements” refers to the “wood, fire, Iron, water and soil” that modern people are familiar with Perhaps, what kind of meaning does this seemingly simple “five elements” have for the Han people? It serves as a part of the “Zhi[志]” that must be explained when explaining the Han society? And what kind of influence does it have on the subsequent history? For this question, it is difficult to answer it happily But we can be sure that this “five elements” is not only in Chinese history, but also exported to East Asian countries, playing an important role in people's ideas. This “five elements theory” is a necessary field for the study of people's behavior patterns in that era, but its translation and research are insufficient. “Wuxingzhi” in Han Dynasty can be said to be a reservoir of “five elements theory”, as Liang Qichao said, “in the past two thousand years, deeply rooted in everyone's psychology, dominating everything in human affairs”, the study of the five elements theory of the past dynasties should start from the Han Dynasty.
[NRF 연계]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Vol.37 2012.09 pp.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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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enter of the Jilin area in Qing Dynasty was the Jilin Ula Fortress. It began to function as the center of the area as the Jilin Shipyard and the fortress were completed in 1657 and 1673, respectively. The dynasty constructed them in the area in order to oppose to southward movement of Russia. After the border issue settled after the signing of the Treaty of Nerchinsk, Jilin Ula became a key point in the area along with Shenyang in Liaoning for crucial administrative and military roles in the Qing government’s northeastern policies as well as being a commercial center that covered the entirety of Jilin and Heilongjiang. The fortress was built by taking full advantage of the geographic and natural environments of Songhua River. Several extensions and reconstruction works, undertaken later in response to the increasing population and economic activities, enlarged the fortress, making it the central city of that time. The growing number of immigrants into the area due to the execution of Liaodong zhaokenling and the blockade policy (封禁政策)during the Qing period resulted in rapid development of the Jilin Ula area. Those immigrants included Ba-Qi soldiers and liuren (流人) during the reigns of the emperors Shunzi and Kangxi, and liumin (流民) during the reign of Emperor Qianlong who took important roles for such developments. The increase in the area’s population brought commercial development and attracted many merchants across the country, whose presence was represented by the establishment of huiguan buildings (會館) and large-scale transactions for tobacco and hemp. Being the economic center of the entire northeastern region, the merchants in Jilin Ula employed water and inland transportation networks to transport and sell various products, including foodstuffs, to other areas in the Jilin region as well as to the Amur River and Ussuri River regions. Jilin Ula had many immigrants from inland China throughout the Qing period and evolved and developed as a political, administrative,military, and economic center of the northeastern region.
滿洲皇帝, 西洋人 그리고 漢人 ― 敎皇 特使 중국 방문(1705)에 대한 康熙帝의 대처를 중심으로 ―
[NRF 연계] 동양사학회 동양사학연구 Vol.155 2021.06 pp.27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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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examines the Kangxi emperor’s response to the Rites Controversy during his late reign. From the late 1690s to 1710s, while the emperor was struggling to consolidate the Qing rule over the Han world, he encountered a severe challenge, i.e., some Xiyang people’s denial of seminal Chinese rites. Moreover, in 1707, the Xiyang legate 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proclaimed a full-scale ban on those Chinese rites in Nanjing, the symbolic place for the Han tradition. What did a series of challenges mean to the Manchu ruler? Noticing some subtle changes among the Xiyang people, in fact, Xuanye had already kept his eye on Xiyang affairs through his diverse intelligence channels since the end of 1700. And in July of 1705, reported about the papal legate’s sudden visit to the Qing Empire, the emperor immediately decided to wage a ‘battle’ with the legate. During that ‘battle’, however, Xuanye’s primary concern lay more on the Han constituents of its empire than the Xiyang people. Much conscious of the Han elite, the emperor, for example, controlled the legate’s attire on the way through China Proper, the Han world, and let his imperial orders be delivered only in Manchu and be carried out by only a small circle of his close people. Despite diverse efforts, the Rites Controversy continued unsolved. Moreover, from August 1706, the Kangxi emperor began to recognise that the Rites Controversy issue had already been disturbing the Han elite across the provinces. Therefore, the emperor launched secret investigations throughout the empire. Simultaneously, he suspended his imperial mission to Rome, which had already left for Rome, and arrested Luigi Antonio Appiani on his way to the southern provinces. In the end, the emperor announced the imperial judgement on the Rites Controversy and decided his sixth Southern Tour to Jiangnan, the Han centre. In early April 1707, however, the emperor became more shocked after knowing that Tournon had recently proclaimed the full-scale ban on the Chinese Rites at Nanjing. From then on, his response became more active and swift. Privately, he wrote a series of imperial letters to Xiyang missionaries. Publicly, in Nanjing, where de Tournon’s ban had been proclaimed lately, the Manchu emperor as well proclaimed an imperial edict, in which he notably portrayed himself as the guardian of Chinese culture. At the same time, he removed the ‘uncontrollable, heterodox’ elements from the Han elite’s sight by expelling Tournon and those who refused to accept the permit.
명청교체기 조선에 표류한 漢人들-1667년 林寅觀 사건을 중심으로-
[NRF 연계] 조선시대사학회 조선시대사학보 Vol.88 2019.03 pp.47-76
...한인들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1644년부터 1680년대 초반까지 표류 한인 대부분은 남명의 세력이 미치던 중국 남부 출신으로, 특히 대만을 중심으로 반청항쟁을 이어가던 정성공․정경 부자 휘하의 무역상이었다. 병자호란 패전 이후 청의 강압 아래 놓여있던 조선 조정은 1647년 명 유민을 자처하는 한인들을 처음 청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1667년 제주에 표착한 임인관 일행 역시 자신들이 정경 휘하의 항청세력이며, 중화의 상징인 남명 영력제의 책력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청관계의 악화를 우려한 조선 조정은 나가사키로 보내줄 것을 간청하던 그들을 북경으로 압송했다. 그 결과 조정이 앞장서서 존주대의를 저버렸다는 비난이 일어났고, 정조대에 이르러 임인관 일행은 임경업 등 항청인사들이 모셔진 의주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임인관 사건 이후 조정은 현실과 여론 사이의 곤혹을 모면하기 위해 지방 수령의 책임 아래 표류 한인들을 몰래 돌려보낼 방도를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되어 청의 중원 지배가 확고해지고, 1683년 대만의 정씨 세력마저 항복해 해금이 철폐된 뒤 그같은 고심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이제는 청의 백성임을 주장하는 표류 한인들을 어디로 송환해야 할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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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동아시아 해상 무역이 발달하면서, 조선에서도 표류 사건의 빈도가 급증했다. 또한 청조의 입관과 남명 수립 이후, 조선은 중원에서 표류해 온 한인들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1644년부터 1680년대 초반까지 표류 한인 대부분은 남명의 세력이 미치던 중국 남부 출신으로, 특히 대만을 중심으로 반청항쟁을 이어가던 정성공․정경 부자 휘하의 무역상이었다. 병자호란 패전 이후 청의 강압 아래 놓여있던 조선 조정은 1647년 명 유민을 자처하는 한인들을 처음 청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1667년 제주에 표착한 임인관 일행 역시 자신들이 정경 휘하의 항청세력이며, 중화의 상징인 남명 영력제의 책력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청관계의 악화를 우려한 조선 조정은 나가사키로 보내줄 것을 간청하던 그들을 북경으로 압송했다. 그 결과 조정이 앞장서서 존주대의를 저버렸다는 비난이 일어났고, 정조대에 이르러 임인관 일행은 임경업 등 항청인사들이 모셔진 의주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임인관 사건 이후 조정은 현실과 여론 사이의 곤혹을 모면하기 위해 지방 수령의 책임 아래 표류 한인들을 몰래 돌려보낼 방도를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되어 청의 중원 지배가 확고해지고, 1683년 대만의 정씨 세력마저 항복해 해금이 철폐된 뒤 그같은 고심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이제는 청의 백성임을 주장하는 표류 한인들을 어디로 송환해야 할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Since the late 16th century, with the development of East Asian sea trade, the number of ships drifting on the Korean Peninsula has increased. And, with the Qing Dynasty occupying Beijing, Choseon government has begun agonizing over where to send the drifting Chinese. What’s more, most of the Chinese who drifted to Korean Peninsula from 1644 to the early 1680s were trade dealers under Zheng Cheng-gong(Koxinga) who continued anti-Qing protests based on Taiwan. Since 1647, Choseon which had been under pressure from Qing after the defeat of the Second Invasion of Manchria in 1636, began forcibly trasfering Chinese who called themselves the people of South Ming Dynasty. Lin Yin-guan and his party, who arrived in Cheju Island in 1667, also pleaded that they should be sent to Nagasaki, claiming that they were the anti-Qing forces under Zheng Jing. However, fearing the worsening of the relationship with Qing, the Choseon governmen resolutely sent them to Beijing. And the public opinion at this news criticized the government as a traitor to Confucian righteousness. After the 1680s, the dilemma of Choseon was naturally resolved after Qing’s rule was firmly established and even Taiwan’s Chungs surrendered in 1683. Choseon no longer needed to ponder where to send the Chinese people claiming that they were now the people of Qing.
[NRF 연계]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Vol.27 2012.06 pp.333-365
...한인(漢人)들이 한반도로이주하였다. 모문룡(毛文龍)을 따라 평안도로 건너온 요민(遼民)들로부터청나라의 탄압을 피해 망명을 선택한 명나라 관료와 장수의 후예, 중국 남부로부터 조선에 표류한 남명(南明)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류의한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 조정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명분을내세워 그들을 보호하려 하였으나 청나라의 현실적 압박에 못이겨 압송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아시아 질서가 안정기에 접어든 18세기 이후 조선이 명나라의 뒤를이어 중화문명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가 국가 이념으로 확립된 뒤로부터, 조선의 국왕들은 귀화 한인들을 ‘황조유민(皇朝遺民)’이라 개념화하고, 그들에 대한 우대 정책을 통해 존주대의(尊周大義)를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그간 한인들에게 부과되던 가혹한 신역이 다소 완화되고 후손들이 관직에 등용되기도 하였지만, 한인들의 실제 처지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영・정조대 조선중화주의의 흐름 속에서, 18세기 말부터 조선에 이주해온 한인들의 행적을 정리한 ‘유민전’이 편찬되기 시작했다. 이덕무의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와 성해응의 『황명유민전(皇明遺民傳)』이 대표적인 성과로, 이는 순조대 간행된 『존주휘편(尊周彙編)』으로 계승되었다. 반면 한인들의 손에 의해 직접 찬술된 기록도 등장하였는데, 1818년(순조18) 왕덕구(王德九)가 편찬한 『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永曆) 연호를 강조한 『황조유민록』에는 멸망한 명나라의 여맥이 남명을 거쳐 자신들에 의해 보전되고 있다는 의식이 담겨 있었다. 이는 문화를 통해 중화의 계승을 설명하려던 조선 지식인들과는 별개의, 혈연적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중화 관념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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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 명청교체를 전후하여 대규모의 한인(漢人)들이 한반도로이주하였다. 모문룡(毛文龍)을 따라 평안도로 건너온 요민(遼民)들로부터청나라의 탄압을 피해 망명을 선택한 명나라 관료와 장수의 후예, 중국 남부로부터 조선에 표류한 남명(南明)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류의한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 조정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명분을내세워 그들을 보호하려 하였으나 청나라의 현실적 압박에 못이겨 압송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아시아 질서가 안정기에 접어든 18세기 이후 조선이 명나라의 뒤를이어 중화문명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가 국가 이념으로 확립된 뒤로부터, 조선의 국왕들은 귀화 한인들을 ‘황조유민(皇朝遺民)’이라 개념화하고, 그들에 대한 우대 정책을 통해 존주대의(尊周大義)를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그간 한인들에게 부과되던 가혹한 신역이 다소 완화되고 후손들이 관직에 등용되기도 하였지만, 한인들의 실제 처지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영・정조대 조선중화주의의 흐름 속에서, 18세기 말부터 조선에 이주해온 한인들의 행적을 정리한 ‘유민전’이 편찬되기 시작했다. 이덕무의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와 성해응의 『황명유민전(皇明遺民傳)』이 대표적인 성과로, 이는 순조대 간행된 『존주휘편(尊周彙編)』으로 계승되었다. 반면 한인들의 손에 의해 직접 찬술된 기록도 등장하였는데, 1818년(순조18) 왕덕구(王德九)가 편찬한 『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남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永曆) 연호를 강조한 『황조유민록』에는 멸망한 명나라의 여맥이 남명을 거쳐 자신들에 의해 보전되고 있다는 의식이 담겨 있었다. 이는 문화를 통해 중화의 계승을 설명하려던 조선 지식인들과는 별개의, 혈연적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중화 관념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NRF 연계] 효원사학회 역사와 세계 Vol.36 2009.12 pp.5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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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bject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state of Chineses before and after Longqing Peace Treaty(隆慶和議), mainly in the borderlands of Bansheng(板升) in the right part of Mongolia and of Ming and Mongolia. The prior related studies exhibit following the problems: Firstly, they exhibit a lack in understanding the motives and backgrounds in which Chineses transgressed the border into the right part of Mongolia or became captives settling down in the land of Mongolia; Secondly, there are few attempts to find out how the society of Bansheng, which had been continually growing since the middle of 16th century, and the activity of Chineses developed in line with a drastic change in the circumstances like Longqing Peace Treaty. The discussions in this study, therefore, will progress in the following number, mainly dealing with the content of Fuyijilüe(撫夷紀略), comparing with the existing presented data: 1. The actual conditions of the activities of Chineses who transgressed the border in the situation in which Ming and Mongolia were holding out against each other and of the ones after the border transgression; 2. The development of Bansheng and the role of Chineses; 3. The problem of the Mongolian Chineses in Longqing Peace Treaty; 4. The actual conditions in the activities of Chineses in tribute and commerce; Especially the Chineses involved in our discussions are the ones who were working as aides to the chief of Mongolia until the death of Altan in 1581.
東魏北齊時代 靑齊 지역 漢人의 鮮卑文化와 西域文化 수용 ― 靑齊 지역의 다문화 공존과 絹馬貿易을 중심으로 ―
[NRF 연계] 동양사학회 동양사학연구 Vol.174 2026.03 p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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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을 통해 본 契丹化한 漢人 耶律隆祐의 생애와 발해 유민의 族際間 혼인
[NRF 연계]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Vol.151 2025.01 pp.29-79
...한인이다. 게다가 그가 발해인과 혼인하였다는 점에서도 그의 묘지명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본 묘지명과 관련해서 중국에서는 두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劉鳳翥 등은 야율융우 묘지명의 내용과 誌蓋의 圖案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증하였고, 王青煜 등은 묘주인 耶律隆祐와 『遼史』에 등장하는 耶律隆祐가 별개의 인물임을 지적하고, 두 인물의 이력과 생몰년을 대조하였다. 다만, 국내에서 본 묘지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는 없다. 게다가 묘지명 자체가 고전을 인용하면서 서술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묘지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세한 역주작업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 수록된 묘지명 역주를 통해 요대 한인과 발해인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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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한지고 가계의 인물 중 耶律隆祐의 墓誌銘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야율융우는 『遼史』의 韓德凝이라는 인물로 비정되는데, 그는 韓德讓(耶律隆運) 이외에 추가적으로 확인이 되는 거란화한 한인이다. 게다가 그가 발해인과 혼인하였다는 점에서도 그의 묘지명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본 묘지명과 관련해서 중국에서는 두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劉鳳翥 등은 야율융우 묘지명의 내용과 誌蓋의 圖案에 대해서 상세하게 고증하였고, 王青煜 등은 묘주인 耶律隆祐와 『遼史』에 등장하는 耶律隆祐가 별개의 인물임을 지적하고, 두 인물의 이력과 생몰년을 대조하였다. 다만, 국내에서 본 묘지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는 없다. 게다가 묘지명 자체가 고전을 인용하면서 서술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묘지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세한 역주작업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 수록된 묘지명 역주를 통해 요대 한인과 발해인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This paper analyzes the epitaph of Yelu Longyou, a figure from the Han Zhigu family line. Yelu Longyou is believed to correspond to Han De-ning in the Liao History. Besides Han Derang (Yelu Longyun), he is another identifiable Han Chinese who underwent Kitanization. Furthermore, his marriage to a Balhae descendant adds significant research value to his epitaph. Regarding this epitaph, two related studies have been published in Chinese academia. Liu Fengzhu et al. conducted a detailed examination of the epitaph's content and the design on the epitaph cover. Wang Qingyu et al. pointed out that the tomb owner, Yelu Longyou, is a different individual from the Yelu Longyou mentioned in the Liao History, and they compared the life histories and birth-death dates of the two figures. However, there seems to be no in-depth research on this epitaph within the domestic academic community. Additionally, given the epitaph’s unique characteristic of citing classical literature, it is necessary to carry out a thorough annotation to fully understand its content. Through the annotation and study of this epitaph, it is hoped that our understanding of Han Chinese and Bohai interactions during the Liao dynasty will be deepened.
琴曲을 통해 본 이민족에 대한 漢人의 집단기억과 정치이상
[NRF 연계] 대한중국학회 중국학 Vol.82 2023.03 pp.325-344
...한인의 집단기억의 실체와 정치이상의 일면을 탐색하였다. 그들은 통치하는 중국과 복속하는 이민족이라는 전통의 화하 중심적 세계관을 계승하였고, 지속되는 이민족과의 불화와 잡거로 인한 정체성 위기에 대해 강박적 불안과 혐오를 드러냈다. 또한 변란을 종식하고 평화를 보장해줄 영웅의 출현을 희망하면서도 이민족에 대한 무력 통합보다 문화적 유사성에 근거한 점진적 화하화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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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의 문화전통이자 양한을 대표하는 시가형식인 금곡은 본질적으로는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을 기억하는 작업이다. 금곡이 기억하고자 하는 인물이나 사건은 현실의 문제상황과 긴밀히 관련된 것으로, 양한 문사들은 금곡을 매개로 자신의 정치이상과 가치관을 세상과 공유함으로써 풍속 교화자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본 논문은 양한시기 유행한 금곡 가운데 이민족과의 역사기억을 소재로 한 6편의 금곡을 대상으로 한인의 집단기억의 실체와 정치이상의 일면을 탐색하였다. 그들은 통치하는 중국과 복속하는 이민족이라는 전통의 화하 중심적 세계관을 계승하였고, 지속되는 이민족과의 불화와 잡거로 인한 정체성 위기에 대해 강박적 불안과 혐오를 드러냈다. 또한 변란을 종식하고 평화를 보장해줄 영웅의 출현을 희망하면서도 이민족에 대한 무력 통합보다 문화적 유사성에 근거한 점진적 화하화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Lyra Song, which is cultural tradition of pre-Chin Dynasty era and a symbolic form of poetry representing Han Dynasty, is essentially a work of remembering historical characters or events of the past. The characters and events that Lyra Song wants to remember are closely related to the actual issues, and Han writers tried to exert their social influence, which was cultural edification, by sharing their political ideals and values with the world through Lyra Song. This paper explored the political ideals of literary writers reflecting the Sinocentrism through lyra songs based on historical memories with other ethnic groups. They adhered to the Chinese-centered worldview of the Chinese ruling subjugated immigrants, and expressed obsessive anxiety and disgust at the ongoing dispute with the immigrants and the identity crisis caused by mixed residence. It also hoped for the emergence of heroes who would end the rebellion and ensure peace, but tended to prefer gradual assimilation based on cultural similarities to armed integration with the immigrants. While Chinese played and appreciated Lyra Song, they utilized it as a mean to promote national pride and cultural superiority.
東魏․北齊 수도 鄴 거주 漢人의 多文化 공존 -漢文化․胡俗․西域文化 공존과 영향-
[NRF 연계] 중국학연구회 중국학연구 Vol.100 2022.05 pp.797-823
...漢人官僚들이 이들의 ‘漢化’(중국문화로의 동화)되었다는 중국학계의 도그마를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東魏北齊의 수도였던 鄴의 무덤이 있는 河北省 磁縣과 河南省 安陽市 일대에서 출토된 고고학 발견 성과를 종합하여 鄴에 살았던 漢人들의 문화적 양상을 분석하였다. 陶俑의 복식에 따르면, 鄴에 거주했던 漢人들은 자신의 문화적 성향에 따라 漢服 혹은 胡服을 착용하는 胡服과 漢服의 공존 현상이 출현하였다. 鮮卑語를 사용하는 高歡과 北齊 皇帝, 皇室 및 鮮卑 지배층 때문에 이들 밑에서 또는 함께 근무했던 孫搴, 祖珽, 張簒, 張華原, 李德林 등 일부 漢人관료들도 鮮卑語를 사용하였다. 鄴을 비롯한 河北 지역의 일부 漢人들은 유목민의 이동식 천막인 氈帳을 이용하였고 烏桓과 鮮卑의 葬俗인 梯形棺을 사용해 매장하였다. 또 鄴에 거주한 일부 漢人들은 西域文化를 수용하였다. 西域産 그릇이 范粹墓 등 漢人官僚의 무덤에서 발견된 사실에서 일부 漢人들이 생전에 서역산 제품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鮮卑文化나 西域文化의 영향을 받지 않은 漢人의 무덤도 있었다. 堯峻墓, 河北磁縣講武城古墓(墓1과 墓56), 北齊 文宣帝의 妃 顔氏(顔玉光) 등 4座 무덤에서 陶俑이 출토되지 않았고, 나머지 부장품을 보면 鮮卑文化나 西域文化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요컨대 鄴에 거주한 漢人들은 漢文化를 묵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鮮卑文化 또는 西域文化를 수용하여 多文化를 향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유목문화(鮮卑文化)와 서역문화 수용 정도는 개인별로 차이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鄴은 漢文化만 통용되는 공간이 아니라 漢文化, 유목문화, 西域文化가 공존하는 多文化의 공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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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이민족이 지배계급을 형성했던 東魏北齊시대에 鮮卑支配層이 중국문화에 일방적으로 동화되었고 漢人官僚들이 이들의 ‘漢化’(중국문화로의 동화)되었다는 중국학계의 도그마를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東魏北齊의 수도였던 鄴의 무덤이 있는 河北省 磁縣과 河南省 安陽市 일대에서 출토된 고고학 발견 성과를 종합하여 鄴에 살았던 漢人들의 문화적 양상을 분석하였다. 陶俑의 복식에 따르면, 鄴에 거주했던 漢人들은 자신의 문화적 성향에 따라 漢服 혹은 胡服을 착용하는 胡服과 漢服의 공존 현상이 출현하였다. 鮮卑語를 사용하는 高歡과 北齊 皇帝, 皇室 및 鮮卑 지배층 때문에 이들 밑에서 또는 함께 근무했던 孫搴, 祖珽, 張簒, 張華原, 李德林 등 일부 漢人관료들도 鮮卑語를 사용하였다. 鄴을 비롯한 河北 지역의 일부 漢人들은 유목민의 이동식 천막인 氈帳을 이용하였고 烏桓과 鮮卑의 葬俗인 梯形棺을 사용해 매장하였다. 또 鄴에 거주한 일부 漢人들은 西域文化를 수용하였다. 西域産 그릇이 范粹墓 등 漢人官僚의 무덤에서 발견된 사실에서 일부 漢人들이 생전에 서역산 제품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鮮卑文化나 西域文化의 영향을 받지 않은 漢人의 무덤도 있었다. 堯峻墓, 河北磁縣講武城古墓(墓1과 墓56), 北齊 文宣帝의 妃 顔氏(顔玉光) 등 4座 무덤에서 陶俑이 출토되지 않았고, 나머지 부장품을 보면 鮮卑文化나 西域文化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요컨대 鄴에 거주한 漢人들은 漢文化를 묵수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鮮卑文化 또는 西域文化를 수용하여 多文化를 향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유목문화(鮮卑文化)와 서역문화 수용 정도는 개인별로 차이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鄴은 漢文化만 통용되는 공간이 아니라 漢文化, 유목문화, 西域文化가 공존하는 多文化의 공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百濟略有遼西’ 記事의 기술배경과 漢人 유이민 집단 -晉平郡縣 설치를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Vol.86 2017.06 pp.5-48
...漢人 유이민 安置라는 수세적인 명 분으로 주로 명명되었다. ‘백제약유요서’의 사건 시점은 1차 ‘高驪略有遼東’ 시기인 385년 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고, 당시 요서지역에는 여러 지역 출신의 한인 유이민 집단이 거 주하고 있었다. 백제는 4세기 말 혼란기 속에서 동요하고 있었던 요서지역 한인 유이민 집단을 대상 으로 樂浪太守와 진조를 관칭한 군현명을 표방하여 이들의 華夷觀念을 불식시켰을 것이 다. 그리고 백제는 군현 단위로 결집된 한인 유이민 집단의 존재양태를 존중하여 요서군 과 진평군현 같은 중국식 군현 단위를 설치하고 이들을 안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 써 백제는 중국 내지 한인 유이민 집단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백제는 동진·남조와 활발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동진·남조는 백제의 漢人係 使臣 과 표문을 통해 백제로 내투한 한인 유이민 집단의 유입경위(‘백제약유요서’)와 존재양태 (중국 지명 태수호)에 대한 이해를 축적했을 것이다. 백제는 ‘백제약유요서’ 정보를 동진 에 전달하여 진조를 지지하는 藩國의 입장을 취하면서 국왕 책봉호 승급 등의 외교적 실 익을 추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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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南朝 史書에만 전해지고 있는 소위 ‘百濟略有遼西’ 記事의 기술배경을 검토하는 가운데, 晉平郡縣 설치를 중심으로 백제와 요서지역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백 제약유요서’ 기사의 최대 쟁점은 백제의 군사적 행위와 요서점유 여부이다. ‘백제약유요 서’ 기사의 출처와 관련해 백제 表文이 주목된다. 백제는 동진·남조에 자국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는 표문을 지속적으로 전달했고 중국 官爵의 追認을 요청했다. 표문의 내용은 백제 입장에 편향된 과장과 허위가 포함됐 을 가능성이 높고, 남조 史家가 백제 표문을 근거로 사서에서 과장되게 서술했을 수도있다. 표문의 사료 특성과 한계를 고려할 때, 백제의 군사적 행위와 요서점유를 액면 그 대로 이해하는 것은 유의가 필요하다. ‘백제약유요서’ 정보가 전해진 이후 남조 사가의 선택적 기술, 축약, 改文 등의 變改를 거쳐 최종적으로 관련 정보가 사서에 기술된 것으 로 이해된다. ‘백제약유요서’ 기사의 핵심정보는 백제가 요서와 관련해 군현을 설치하고 관할했다 는 것이다. 특히 晉朝를 관칭한 군현명이 주목된다. 西晉시기 진조를 관칭한 군현명은 통일제국인 진조의 위용을 반영한 상징성이 있었다. 그러나 화북지역을 상실하고 南遷 한 東晉시기의 진조를 관칭한 군현명은 진조 회복과 漢人 유이민 安置라는 수세적인 명 분으로 주로 명명되었다. ‘백제약유요서’의 사건 시점은 1차 ‘高驪略有遼東’ 시기인 385년 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고, 당시 요서지역에는 여러 지역 출신의 한인 유이민 집단이 거 주하고 있었다. 백제는 4세기 말 혼란기 속에서 동요하고 있었던 요서지역 한인 유이민 집단을 대상 으로 樂浪太守와 진조를 관칭한 군현명을 표방하여 이들의 華夷觀念을 불식시켰을 것이 다. 그리고 백제는 군현 단위로 결집된 한인 유이민 집단의 존재양태를 존중하여 요서군 과 진평군현 같은 중국식 군현 단위를 설치하고 이들을 안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 써 백제는 중국 내지 한인 유이민 집단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백제는 동진·남조와 활발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동진·남조는 백제의 漢人係 使臣 과 표문을 통해 백제로 내투한 한인 유이민 집단의 유입경위(‘백제약유요서’)와 존재양태 (중국 지명 태수호)에 대한 이해를 축적했을 것이다. 백제는 ‘백제약유요서’ 정보를 동진 에 전달하여 진조를 지지하는 藩國의 입장을 취하면서 국왕 책봉호 승급 등의 외교적 실 익을 추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885년 曹廷杰의 만주 답사 —청말 漢人 지식인의 만주 인식과 邊政 개혁론—
[NRF 연계] 만주학회 만주연구 Vol.30 2020.10 pp.71-108
...한인 유민들이 대거 만주로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수렵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려 했던 청조의 의도는 좌절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조는 만주 변경에 대한 개혁 작업을 모색하게 되었고, 1885년 길림 당국은 조정걸을 청-러 변계 지역로 파견하여 그 곳의 정세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조정걸은 청말 만주 지역 역사를 정리한 역사학자이자, 1880~90년대 길림 지역의 행정을 책임졌던 실무 관료이기도 하였다. 그는 1885년 3월부터 9월까지 청과 러시아의 변계 지역인 우수리 강 유역과 흑룡강 하류 유역을 답사하였다. 그는 답사 과정에서 만주 변경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형세와 식민 정책뿐만이 아니라, 만주 변경 지대의 한인, 조선인, 일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거주 양상, 청조가 개국하는 과정에서 흑룡강 유역을 지배했던 흔적 등 다양한 사항들을 견문하였다. 이러한 실증 답사를 통해 조정걸은 만주 지역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고, 러시아의 진출로 위기에 봉착한 청조의 만주 지역 지배 체제를 어떻게 전환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1886년 조정걸은 그가 만주 답사에서 조사한 것들을 토대로 16개조의 개혁안을 청조에 건의하였다. 그 주요 내용들을 보면 한인을 활용하여 토지를 개간할 것, 유명무실화된 흑룡강 지역 변경 부락들의 담비 가죽 공납을 중지시킬 것, 금광을 개발하여 국부를 증대시킬 것 등이다. 이러한 개혁안들은 그동안 청조가 전통적으로 만주 지역을 지배해 오던 방식을 사회, 경제적인 구조에서부터 전환시키자는 것이었다. 즉 팔기제도와 수렵 채집 경제 위주의 청조의 전통적 만주 지배 구조를 한인 중심의 토지 개간과 금광 개발 등을 골자로 한 구조로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조정걸의 개혁안의 일부는 청조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있지만, 한인 이주를 통한 토지 개간과 금광 개발 등은 1880~1890년대 길림 당국에서 비교적 활발히 추진되었다. 청조는 이러한 통치구조 전환을 통해서 만주 지역을 제국형 근대국가로서의 청조의 ‘동북 변강’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1885년 조정걸의 만주답사와 그에 따른 16개조의 만주 통치 개혁안은 청대 변경사와 만주사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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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85년 조정걸의 만주답사를 통하여, 1880년대 청조의 만주 지역 변경 정책의 전환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 글이다. 19세기 청조의 만주 지역 변경 정책은 대내적, 대외적으로 위기를 맞는다. 대외적으로 러시아 제국이 극동지역으로 동진하면서, 1860년 북경 조약을 통해 청조는 우수리 강 이동 연해주를 러시아에 할양한다. 대내적으로는 청조의 봉금정책이 이완되면서, 한인 유민들이 대거 만주로 유입되었고, 이로 인해 만주에서의 수렵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려 했던 청조의 의도는 좌절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조는 만주 변경에 대한 개혁 작업을 모색하게 되었고, 1885년 길림 당국은 조정걸을 청-러 변계 지역로 파견하여 그 곳의 정세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조정걸은 청말 만주 지역 역사를 정리한 역사학자이자, 1880~90년대 길림 지역의 행정을 책임졌던 실무 관료이기도 하였다. 그는 1885년 3월부터 9월까지 청과 러시아의 변계 지역인 우수리 강 유역과 흑룡강 하류 유역을 답사하였다. 그는 답사 과정에서 만주 변경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형세와 식민 정책뿐만이 아니라, 만주 변경 지대의 한인, 조선인, 일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거주 양상, 청조가 개국하는 과정에서 흑룡강 유역을 지배했던 흔적 등 다양한 사항들을 견문하였다. 이러한 실증 답사를 통해 조정걸은 만주 지역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고, 러시아의 진출로 위기에 봉착한 청조의 만주 지역 지배 체제를 어떻게 전환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1886년 조정걸은 그가 만주 답사에서 조사한 것들을 토대로 16개조의 개혁안을 청조에 건의하였다. 그 주요 내용들을 보면 한인을 활용하여 토지를 개간할 것, 유명무실화된 흑룡강 지역 변경 부락들의 담비 가죽 공납을 중지시킬 것, 금광을 개발하여 국부를 증대시킬 것 등이다. 이러한 개혁안들은 그동안 청조가 전통적으로 만주 지역을 지배해 오던 방식을 사회, 경제적인 구조에서부터 전환시키자는 것이었다. 즉 팔기제도와 수렵 채집 경제 위주의 청조의 전통적 만주 지배 구조를 한인 중심의 토지 개간과 금광 개발 등을 골자로 한 구조로 전환하자는 것이었다. 조정걸의 개혁안의 일부는 청조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있지만, 한인 이주를 통한 토지 개간과 금광 개발 등은 1880~1890년대 길림 당국에서 비교적 활발히 추진되었다. 청조는 이러한 통치구조 전환을 통해서 만주 지역을 제국형 근대국가로서의 청조의 ‘동북 변강’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1885년 조정걸의 만주답사와 그에 따른 16개조의 만주 통치 개혁안은 청대 변경사와 만주사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쿠빌라이 집권 초기 관리등용의 성격-漢人儒士 중용 문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NRF 연계]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동국사학 Vol.55 2013.12 pp.81-127
...漢人儒士 重用’ 견해를 비판하고, 그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쿠빌라이는 潛邸시기부터 치세 말기까지 줄곧 한인유사의 높은 지위·권한을 보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한지를 다스리는 유용한 수단으로써 儒學이 보유한 일부 실용성과 정권확립을 위해 필요한 한인유사의 실용적 지식·재능만 중요시하고, 유학의 본질적 이념·가치와 한인유사의 유학적 소양, 학문수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실무능력을 결여한 대부분의 한인유사를 일관되게 불신·배척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한인유사의 정치·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은 몽골시대 사회계층 안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없었다.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쿠빌라이의 人才觀은 집권 초기 중앙·지방관청에 관리를 등용하는 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우선 몽골의 전통적 귀족가문과 비몽골계 공신가문 출신 인물을 최고위직에 임명하여 그들의 우월한 지위·권한을 보장했다. 그리고 오로지 실무적 경험·지식·재능만을 평가하여 漢人文士를 그 아래 직책에 기용했다. 한인관원의 수는 비한인에 비해 현저하게 많지 않았고, 비록 그들 대부분이 유학을 깊이 탐구한 지식인이었지만, 관리등용 후 정치일선에서 유학적 이념을 실천하는 전형적인 ‘儒士’의 면모를 드러낸 인물은 소수에 불과했다. 쿠빌라이의 관리등용 성향은 王文統에 대한 두터운 신임·중용에서 잘 드러난다. 신정부 출범 직후 燕京行省 平章政事에 임명된 왕문통은 탁월한 재정운용 능력을 발휘하여 정권의 기초확립에 공헌한 전형적인 실무관료였다. 일부 정통 한인유사(眞儒)들이 유학적 이념을 내세워 그의 정치를 비판했지만, 쿠빌라이는 그의 비범한 재능을 귀하게 여겨 반대세력의 공세 속에서 그를 적극 비호하고, 정통 한인유사를 고위관직에 임명하지 않았다. 이 같은 그의 관리등용 성향은 이단의 난 후 재무관료 아흐마드를 중용할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집권 초기 쿠빌라이가 漢化 경향에 입각하여 한인유사를 중용하고, 이단의 난을 계기로 그의 관리등용 방침이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종래의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그가 잠저시기부터 치세 말기까지 줄곧 유능한 실무관료를 중시하고, 실무능력을 결여한 한인유사를 불신하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하다. 따라서 이단의 난 전후 쿠빌라이 관리등용의 성격은 ‘변화’가 아닌 ‘지속’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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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쿠빌라이 집권 초기 관리등용의 양태를 탈중국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종래의 ‘李璮의 난 이전 漢人儒士 重用’ 견해를 비판하고, 그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쿠빌라이는 潛邸시기부터 치세 말기까지 줄곧 한인유사의 높은 지위·권한을 보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한지를 다스리는 유용한 수단으로써 儒學이 보유한 일부 실용성과 정권확립을 위해 필요한 한인유사의 실용적 지식·재능만 중요시하고, 유학의 본질적 이념·가치와 한인유사의 유학적 소양, 학문수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실무능력을 결여한 대부분의 한인유사를 일관되게 불신·배척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한인유사의 정치·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은 몽골시대 사회계층 안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없었다.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쿠빌라이의 人才觀은 집권 초기 중앙·지방관청에 관리를 등용하는 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우선 몽골의 전통적 귀족가문과 비몽골계 공신가문 출신 인물을 최고위직에 임명하여 그들의 우월한 지위·권한을 보장했다. 그리고 오로지 실무적 경험·지식·재능만을 평가하여 漢人文士를 그 아래 직책에 기용했다. 한인관원의 수는 비한인에 비해 현저하게 많지 않았고, 비록 그들 대부분이 유학을 깊이 탐구한 지식인이었지만, 관리등용 후 정치일선에서 유학적 이념을 실천하는 전형적인 ‘儒士’의 면모를 드러낸 인물은 소수에 불과했다. 쿠빌라이의 관리등용 성향은 王文統에 대한 두터운 신임·중용에서 잘 드러난다. 신정부 출범 직후 燕京行省 平章政事에 임명된 왕문통은 탁월한 재정운용 능력을 발휘하여 정권의 기초확립에 공헌한 전형적인 실무관료였다. 일부 정통 한인유사(眞儒)들이 유학적 이념을 내세워 그의 정치를 비판했지만, 쿠빌라이는 그의 비범한 재능을 귀하게 여겨 반대세력의 공세 속에서 그를 적극 비호하고, 정통 한인유사를 고위관직에 임명하지 않았다. 이 같은 그의 관리등용 성향은 이단의 난 후 재무관료 아흐마드를 중용할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집권 초기 쿠빌라이가 漢化 경향에 입각하여 한인유사를 중용하고, 이단의 난을 계기로 그의 관리등용 방침이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종래의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그가 잠저시기부터 치세 말기까지 줄곧 유능한 실무관료를 중시하고, 실무능력을 결여한 한인유사를 불신하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하다. 따라서 이단의 난 전후 쿠빌라이 관리등용의 성격은 ‘변화’가 아닌 ‘지속’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NRF 연계] 한국중문학회 중국문학연구 Vol.32 2006.06 pp.9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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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宗福 묘지명을 통해 본 遼代 漢人과 渤海遺民 大延琳의 활동
[NRF 연계] 수선사학회 사림 Vol.92 2025.04 pp.305-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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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introduces and translates the epitaph of Yelu Zhongfu with detailed annotations. The epitaph, excavated in 2001, provides records that are absent from extant official historical sources, including uprisings in the northwestern region, Liao’s rule in this area, and Yelu Zhongfu’s activities. Notably, it offers a different account of the rebellion led by Dae Yeonrim, a figure from the remnants of Balhae. According to the epitaph, the uprising occurred in the eighth year of the Taiping era (1028), contrasting with the Official History of Liao and the Official History of Goryeo, which both dated the rebellion to the ninth year of the Taiping era (1029). Upon reviewing the Official History of Liao, Official History of Goryeo, and Extended Continuation to Zizhi Tongjian, it is difficult to conclusively determine whether the rebellion began in 1028. Nevertheless, the differing account in the epitaph suggests that signs of unrest centered around the Balhae remnants may have emerged prior to 1029.
동위ㆍ북제시대 하북(河北) 지방 한인(漢人)의 다문화 공존과 그 양상 : 선비문화(鮮卑文化)와 서역문화(西域文化) 수용과 그 편차
[NRF 연계] 대진대학교 대순사상학술원 대순사상논총 Vol.52 2025.03 pp.187-224
...한인(漢人)들의 선비문화와 서역문화 수용 양상을 검토하였다. 수도 업의 배후 지역인 하북 지역 전체 또는 특정 지역이 외래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 또는 가계가 선비문화와 서역 문화를 수용하였다. 조영-조정-조군신 일족과 이희종, 위수, 이형, 평감 등 선비문화와 서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인물이 있었지만, 대부분 한문화를 유지하였고 일부 사람들의 무덤에서 낙타 도용이 출토되어 서역과의 교역에 관심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현탁의 무덤에 사용된 제형관은 선비장속을 받아들인 한인(漢人)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좌임 등 선비복을 착용한 도용은 묘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북의 토착세력 주변의 군인, 하인 등 일부 하층민들이 선비복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동위북제의 수도 업 배후지인 하북 지역의 한인(漢人)들은 황실ㆍ조정과의 관계에 따라 선비문화와 서역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등 편차가 다양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동위북제시대 한인(漢人)들이 선비문화나 서역 문화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기존의 선입견을 타파하고 하북 지방의 다문화 공존 상황을 밝힌 글이라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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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동위북제 하북 지역 한인(漢人)들의 선비문화와 서역문화 수용 양상을 검토하였다. 수도 업의 배후 지역인 하북 지역 전체 또는 특정 지역이 외래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 또는 가계가 선비문화와 서역 문화를 수용하였다. 조영-조정-조군신 일족과 이희종, 위수, 이형, 평감 등 선비문화와 서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인물이 있었지만, 대부분 한문화를 유지하였고 일부 사람들의 무덤에서 낙타 도용이 출토되어 서역과의 교역에 관심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현탁의 무덤에 사용된 제형관은 선비장속을 받아들인 한인(漢人)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좌임 등 선비복을 착용한 도용은 묘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북의 토착세력 주변의 군인, 하인 등 일부 하층민들이 선비복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동위북제의 수도 업 배후지인 하북 지역의 한인(漢人)들은 황실ㆍ조정과의 관계에 따라 선비문화와 서역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등 편차가 다양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동위북제시대 한인(漢人)들이 선비문화나 서역 문화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기존의 선입견을 타파하고 하북 지방의 다문화 공존 상황을 밝힌 글이라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Previous research has revealed that not only Chinese culture but also Xianbei-nomadic culture and Western region culture including Central Asian, Indian, and Sasanid Persian culture coexisted in Ye, the capital of the Eastern Wei and Northern Qi Dynasties, and Taiyuan, the long-term residence of multiple emperors and military headquarters. This refuted the common belief that the so-called Xianbei, the ruling class was composed of a majority of Xianbei, Turks, Xiongnu nomads and a small number of Chinese from Huisuo Zhen who were assimilated into Chinese culture. This study investigated the coexistence of Chinese, Xianbei-nomadic, and Western Region culture and their deviation in the Hebei Region during the Eastern Wei and Northern Qi Dynasties. It is difficult to conclude that the Chinese subjects in any prefectures, commanderies, and counties in the Hebei area, entirely received the nomadic steppe culture or western culture. Many Chinese people excepted a specific person or household such as Zu Ying family and Li Xizong, in the Hebei area, the area behind the capital of Ye, did not accept Xianbei-style culture and Western region culture. But Xianbei-nomadic clothes, trapezoid coffins, and Western regional culture all spread to Hebei area among the ruling and lower class. Depending on their relationship with royal family and government, Chinese people had various deviations, such as accepting Chinese culture and western culture, or not accepting them at all. Even so, it has historical significance in that it is a text that refutes the existing prejudice that the Chinese people of the Eastern Wei and Northern Qi Dynasties did not accept Chinese culture or Western culture at all.
4세기 초․중반 慕容部․前燕과 高句麗의 유이민 수용 - 漢人 수용을 중심으로-
[NRF 연계]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Vol.86 2023.05 pp.3-34
...한인을 수용하였다. 모용부는 한인의 주요 인사를 대거 중용하고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명하면서 이들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 나갔고, 僑郡을 설치하여 한인 이주민을 안집시켰다. 이와 같은 근왕정책에 의한 적극적인 한인 수용을 통해 모용부는 서진의 정치기구를 확립하였고 농업경제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강제적으로 이주시킨 이인에 대해서는 도성 주변에 안치하여 철저한 통제와 관리를 가하면서 농업 생산에 종사시키거나 혹은 군사나 혹은 요역에 동원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요소로 대두되자 이들의 혈연조직을 해체하고 각 지역에 분산․배치시켰다. 고구려는 4세기 초반 화북의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한인을 확보했던 상황에 편승하면서 한인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발적 이주를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주로 중국 군현에 대한 약탈을 통해 한인을 확보하였고, 도성 근처에 안치하면서 강하게 통제․관리하였으며 요역 등에 동원하였다. 고구려는 한인 확보를 통해 국가적 발전을 이루고자 하였지만, 중국 군현 약탈을 통한 한인 확보는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한인을 대신해 모용부인․전연인 확보에 나섬으로써 전연의 내부 와해와 군사력 제고를 꾀하고자 하였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고에서는 4세기 초․중반의 慕容部․前燕과 高句麗의 유이민 수용 사례를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양국의 유이민 수용 배경과 수용 양상 그리고 유이민이 양국에 미친 영향 등을 살펴보았다. 모용부는 西晉에 대한 勤王을 내세운 중국적 지배질서의 구축을 통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자고자 하였는데, 근왕정책의 방편 가운데 하나로써 적극적으로 한인을 수용하였다. 모용부는 한인의 주요 인사를 대거 중용하고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명하면서 이들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 나갔고, 僑郡을 설치하여 한인 이주민을 안집시켰다. 이와 같은 근왕정책에 의한 적극적인 한인 수용을 통해 모용부는 서진의 정치기구를 확립하였고 농업경제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반면 강제적으로 이주시킨 이인에 대해서는 도성 주변에 안치하여 철저한 통제와 관리를 가하면서 농업 생산에 종사시키거나 혹은 군사나 혹은 요역에 동원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요소로 대두되자 이들의 혈연조직을 해체하고 각 지역에 분산․배치시켰다. 고구려는 4세기 초반 화북의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한인을 확보했던 상황에 편승하면서 한인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발적 이주를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주로 중국 군현에 대한 약탈을 통해 한인을 확보하였고, 도성 근처에 안치하면서 강하게 통제․관리하였으며 요역 등에 동원하였다. 고구려는 한인 확보를 통해 국가적 발전을 이루고자 하였지만, 중국 군현 약탈을 통한 한인 확보는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한인을 대신해 모용부인․전연인 확보에 나섬으로써 전연의 내부 와해와 군사력 제고를 꾀하고자 하였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cases of Murong Bu, Former Yan, and Goguryo's acceptance of Wandering people in the early and mid-4th century, and uses this as a basis to examine the backgrounds and modes of acceptance, and the impact of the Wandering people on both countries. Murong Bu sought to seize hegemony in East Asia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a Chinese ruling order that claimed loyalty to Xi Jin, and actively accepted Hanren as one of the measures of the loyalty policy. Murong Bu appointed a number of key Hanren figures to government positions based on their merit and led the country with them, and established the Qiao Jun to keep Hanren migrants in line. Through this loyalty policy and the active acceptance of Koreans, Murong Bu was able to establish the political organization of Western Jin and build the foundation of an agrarian economy. Goguryeo took advantage of the competitive acquisition of Hanren by the states of Huabei in the early fourth century to accommodate them. However, compared to other countries, it was relatively difficult to expect voluntary migration, so it mainly secured Hanren through plunder of Chinese counties (Junxian), and strongly controlled and managed them while locating them near the cities, and mobilized them for Yaoyi. Goguryeo wanted to achieve national development by securing Hanren, but securing Hanren through plundering Chinese counties was limited. Therefore, they sought to secure the people of Murong Bu and Former Yan on behalf of the Hanren to disrupt them internally and increase military power.
[Kisti 연계] 한국비블리아학회 한국비블리아학회지 Vol.37 No.1 2026 pp.29-51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 작품의 탐색행태를 실증적으로 분석하여, 자료 접근성 개선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의 분류 현황을 검토하고, RISS와 C대학 도서관의 OPAC 서지정보 구조를 비교하였으며, C대학 도서관의 이용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분석 결과, 디아스포라 문학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원저작과 번역서 간의 관계 서지정보의 제공과 KORMARC의 연관저록 필드를 활용한 저작 간 링크 활성화가 요구된다. 또한 저자 식별을 명확히 하기 위해 국가 전거를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문학 형식, 특정 장르, 표제의 특정 용어, 저자명·원저자명, 등장인물 및 내용 관련 주제명 등 기존에 부여되던 주제명뿐 아니라 이용자의 관심과 검색 행태를 반영한 주제명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링크 정보의 가시성 제고, OPAC 내 교육·안내 기능의 직관적·시각적 구성, 온라인 및 오프라인 북큐레이션 서비스 전략이 필요하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본 연구에서는 이용자들의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 작품의 탐색행태를 실증적으로 분석하여, 자료 접근성 개선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의 분류 현황을 검토하고, RISS와 C대학 도서관의 OPAC 서지정보 구조를 비교하였으며, C대학 도서관의 이용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분석 결과, 디아스포라 문학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원저작과 번역서 간의 관계 서지정보의 제공과 KORMARC의 연관저록 필드를 활용한 저작 간 링크 활성화가 요구된다. 또한 저자 식별을 명확히 하기 위해 국가 전거를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문학 형식, 특정 장르, 표제의 특정 용어, 저자명·원저자명, 등장인물 및 내용 관련 주제명 등 기존에 부여되던 주제명뿐 아니라 이용자의 관심과 검색 행태를 반영한 주제명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링크 정보의 가시성 제고, OPAC 내 교육·안내 기능의 직관적·시각적 구성, 온라인 및 오프라인 북큐레이션 서비스 전략이 필요하다.
This study examines users' search behaviors for Korean diaspora literary works and proposes strategies to improve access to these materials. The classification practices of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were reviewed, the OPAC bibliographic structures of RISS and C University Library were compared, and a user survey was conducted at C University Library. The findings indicate the need for systematic relational bibliographic information between original works and their translations, along with enhanced linking functions through KORMARC related-record fields. National authority data should be used to ensure accurate author identification, and subject headings should incorporate not only existing bibliographic elements but also user-oriented topics that reflect actual search interests. Improving the visibility of link information, providing intuitive and visually oriented OPAC guidance, and strengthening online and offline book curation services are also essential for enhancing users' search effectiv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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