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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菱 金昌熙의 古文作法과 散文批評에 대한 一考

하정원

[NRF 연계] 우리한문학회 漢文學報 Vol.25 2011.12 pp.383-423

...고문작법과 산문비평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하여 그의 저작에 나타난 작법과 비평을 분석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고찰하였다. 김창희는 唐宋부터 明淸 대에 이르기까지 27명의 고문 작가들의 저작에 대한 비평과 자신의 고문에 대한 관점을 피력한 「會欣穎」, 중국역대 문장가들의 문장을 품계를 나누어 수록한 「四品集選」, 唐宋八大家의 문장을 모은 「八大家文鈔」 등의 문학이론관련 저작을 남겼다. 김창희는 唐宋古文을 추구한 가운데 자신만의 문학론을 확립하였다. 이를 통하여 韓歐正脈의 맥을 이으며 法外之法을 강조하였고, 無法則有法의 명제를 가장 잘 구현한 한유를 추숭하였다. 또한 그는 辭達을 중시하였는데, 김창희는 辭達을 ‘문자를 통해 대상에 대하여 전달함’이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닌 ‘문장이 후세까지 전달됨’으로 파악하고, 문장이 이러한 영속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文彩를 지녀야 함을 주장하였다. 한유가 주창한 것과 마찬가지로 陳腐語의 제거를 통한 문채의 획득을 역설하였다. 그는 ‘師己意不師其辭’라는 명제에 대하여 동의하면서 반드시 자신에게 나온 말(辭必己出)로 작성된 문장만이 참신성을 획득하여 영속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김창희는 隻眼과 見識의 함양을 문장창작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척안과 견식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히 하여 사물과 자아와의 관계를 개선함을 통해 획득되어 지는 것으로, 사물의 실체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말한다. 김창희는 이러한 감식안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장을 짓는 것을 엄격히 차단하였다. 또한 한유를 비롯한 뛰어난 성취를 이룬 작가들은 높은 안목으로 인해 그와 같은 경지를 이룰 수 있었으니, 척안과 견식의 함양 즉, 독서와 자기 수련을 통해 높은 경지의 감식안을 확보할 것을 역설하며 문장창작에 있어 독서를 통한 자기 수련으로 획득된 작가적 역량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김창희는 개별 작가들의 ‘論文之文’을 통해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 비평의 기준이 된 것은 앞서 김창희가 강조한 문장작법의 기본 원리들이었다. 이러한 비평의 양상은 실제 작가의 창작에서 비평대상을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를 보이며 단순 감상비평에서 벗어나 실증적인 비평의 면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 협약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자료로, 원문이용 방식은 연계기관의 정책을 따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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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19세기 후반의 문인 김창희의 고문작법과 산문비평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하여 그의 저작에 나타난 작법과 비평을 분석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고찰하였다. 김창희는 唐宋부터 明淸 대에 이르기까지 27명의 고문 작가들의 저작에 대한 비평과 자신의 고문에 대한 관점을 피력한 「會欣穎」, 중국역대 문장가들의 문장을 품계를 나누어 수록한 「四品集選」, 唐宋八大家의 문장을 모은 「八大家文鈔」 등의 문학이론관련 저작을 남겼다. 김창희는 唐宋古文을 추구한 가운데 자신만의 문학론을 확립하였다. 이를 통하여 韓歐正脈의 맥을 이으며 法外之法을 강조하였고, 無法則有法의 명제를 가장 잘 구현한 한유를 추숭하였다. 또한 그는 辭達을 중시하였는데, 김창희는 辭達을 ‘문자를 통해 대상에 대하여 전달함’이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닌 ‘문장이 후세까지 전달됨’으로 파악하고, 문장이 이러한 영속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文彩를 지녀야 함을 주장하였다. 한유가 주창한 것과 마찬가지로 陳腐語의 제거를 통한 문채의 획득을 역설하였다. 그는 ‘師己意不師其辭’라는 명제에 대하여 동의하면서 반드시 자신에게 나온 말(辭必己出)로 작성된 문장만이 참신성을 획득하여 영속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김창희는 隻眼과 見識의 함양을 문장창작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척안과 견식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히 하여 사물과 자아와의 관계를 개선함을 통해 획득되어 지는 것으로, 사물의 실체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말한다. 김창희는 이러한 감식안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장을 짓는 것을 엄격히 차단하였다. 또한 한유를 비롯한 뛰어난 성취를 이룬 작가들은 높은 안목으로 인해 그와 같은 경지를 이룰 수 있었으니, 척안과 견식의 함양 즉, 독서와 자기 수련을 통해 높은 경지의 감식안을 확보할 것을 역설하며 문장창작에 있어 독서를 통한 자기 수련으로 획득된 작가적 역량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김창희는 개별 작가들의 ‘論文之文’을 통해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 비평의 기준이 된 것은 앞서 김창희가 강조한 문장작법의 기본 원리들이었다. 이러한 비평의 양상은 실제 작가의 창작에서 비평대상을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를 보이며 단순 감상비평에서 벗어나 실증적인 비평의 면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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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古林丹汗《蒙古文金字甘珠尔经》的若干问题

M.额尔敦巴特尔

[NRF 연계] 한국몽골학회 몽골학 Vol.28 2010.02 pp.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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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ument of Mongolian, Chinese and Japanese is used in this paper, and the inscription of Chinese and Mongolian is used, too. The subject of this Paper is the “Mongolian Golden Buddhist Canon” (in Mongolian known as Mongol Altan Ganjuur ) of Mongolian Ligden Khan (reigned 1604-1634, in Chinese known as林丹汗). The next opinion is shown in this paper: (1) the transcription of the “Mongolian Golden Buddhist Canon” is the original text of the Mongol Ganjuur of Beijing wood engraving. Therefore, this research has important scientific meaning. (2) the “Mongolian Golden Buddhist Canon” was made in the final at the end of the twenty's of the 17th century. That place is Hohhot of present Inner Mongolia. (3) After 1634, the “Mongolian Golden Buddhist Canon” became the thing of the Qing dynasty ruler. Then, it was respected in the Shisheng temple(实胜寺) of Shenyang (沈阳). A Japanese man surveyed the Shisheng temple in 1905. the “Mongolian Golden Buddhist Canon” was there in that year. (4) the “Mongolian Golden Buddhist Canon” has already been carried to Tokyo in August, 1906. Then, it was destroyed by fire in 1923 with the Japanese Great Earthquake of 1923. But, it doesn't know the number of volumes of the “Mongolian Golden Buddhist Canon” taken to Tokyo. (5) A Mongolian man brought back the Buddhist scripture of 19 volumes from the Shisheng temple of Shenyang in 1959. That is a part of the “Mongolian Golden Buddhist Canon” of Ligden Khan. That is kept in the library of Inner Mongolia academy of social sciences at present. The first volume of color picture e (the picture which a writer took) was attached to this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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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文解字』 古文의 內容 및 字例 分析

오제중

[NRF 연계] 한국중어중문학회 중어중문학 Vol.44 2009.06 pp.439-468

...古文, 籒文, 俗字, 奇字等都有. 其中對古文字硏究最重要的字形就是古文和籒文. 西漢時代孔壁中發見的經書, 漢代人稱它爲古文. 於是許愼認爲他收入《說文》的古文比籒文更早. 據 《說文》敍許愼所說的古文還包括商周靑銅器銘文. 以后經過淸代學者吳大澂和王國維等人的硏究, 證明 《說文》中的古文其實是戰國時代東方六國的文字, 以及其來源是孔子壁中書和張蒼所獻的古書等. 本論文以 《說文》第一篇中收錄的二十個古文爲對象, 和西周金文及戰國文字進行字形的比較分析, 導出一些可觀的結果. 結論地說, 許愼對古文的出處及時代的部分誤解, 是受到當時時代條件的限制. 還有, 現在的古文字形經過傳抄, 不少訛變, 而運用時應是愼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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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文》正文裏面, 除了小篆以外, 附錄的一些異體字叫做重文. 重文的種類有篆文, 古文, 籒文, 俗字, 奇字等都有. 其中對古文字硏究最重要的字形就是古文和籒文. 西漢時代孔壁中發見的經書, 漢代人稱它爲古文. 於是許愼認爲他收入《說文》的古文比籒文更早. 據 《說文》敍許愼所說的古文還包括商周靑銅器銘文. 以后經過淸代學者吳大澂和王國維等人的硏究, 證明 《說文》中的古文其實是戰國時代東方六國的文字, 以及其來源是孔子壁中書和張蒼所獻的古書等. 本論文以 《說文》第一篇中收錄的二十個古文爲對象, 和西周金文及戰國文字進行字形的比較分析, 導出一些可觀的結果. 結論地說, 許愼對古文的出處及時代的部分誤解, 是受到當時時代條件的限制. 還有, 現在的古文字形經過傳抄, 不少訛變, 而運用時應是愼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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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愈의 碑誌文과 古文運動

오수형

[NRF 연계] 한국중국어문학회 중국문학 Vol.59 2009.05 pp.161-185

...古文運動的實質. 其創作成果和意義包括如下幾點. 第一, 韓愈所撰碑誌文其數量和涉及對象非常豊富廣範, 足以說明他把碑誌文看作是一種古文運動的有力道具, 在試圖文體革新的同時, 積極宣揚他所認識的時代精神. 第二, 韓愈打破紀功頌德爲主的碑誌文固有的拘束, 也打破騈儷文的形式主義, 創造出又鮮明又生動的人物形象, 使得應酬文發展成文學文, 來擴充傳記文學的領域. 第三, 韓愈加以眞摯濃厚的抒情色彩, 且試圖細致而逼眞的寫景, 强化碑誌文的文學成分, 爲碑誌文獲得大衆的歡迎奠定了基礎. 第四, 韓愈在碑誌文或加以直接的議論和諷刺, 或試圖詼諧和破格, 爲碑誌文的多樣化打好基礎, 留下了寬闊的空間. 總之, 韓愈的碑誌文無疑是他唱導古文運動的最有力最有效的武器, 也是他實踐載道、發揮創新精神的所在. 換句話說, 從韓愈的碑誌文可以發見他所展開的古文運動的一個核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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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愈的碑誌文在其創作實踐上占極重要的地位. 不僅在載道的實踐上, 也在文體的革新上, 都可以代表他所唱導的古文運動的實質. 其創作成果和意義包括如下幾點. 第一, 韓愈所撰碑誌文其數量和涉及對象非常豊富廣範, 足以說明他把碑誌文看作是一種古文運動的有力道具, 在試圖文體革新的同時, 積極宣揚他所認識的時代精神. 第二, 韓愈打破紀功頌德爲主的碑誌文固有的拘束, 也打破騈儷文的形式主義, 創造出又鮮明又生動的人物形象, 使得應酬文發展成文學文, 來擴充傳記文學的領域. 第三, 韓愈加以眞摯濃厚的抒情色彩, 且試圖細致而逼眞的寫景, 强化碑誌文的文學成分, 爲碑誌文獲得大衆的歡迎奠定了基礎. 第四, 韓愈在碑誌文或加以直接的議論和諷刺, 或試圖詼諧和破格, 爲碑誌文的多樣化打好基礎, 留下了寬闊的空間. 總之, 韓愈的碑誌文無疑是他唱導古文運動的最有力最有效的武器, 也是他實踐載道、發揮創新精神的所在. 換句話說, 從韓愈的碑誌文可以發見他所展開的古文運動的一個核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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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古文選集의 편찬․간행과 의미

김철범

[NRF 연계] 동양한문학회 동양한문학연구 Vol.28 No.28 2009.02 pp.195-224

...고문선집들을 개괄하고, 특히 조선후기의 고문선집의 편찬 간행이 갖는 문학사적 의의를 짚어본다. 조선전기의 고문선집들은 대체로 중국의 문선집을 수입하여 그대로 다시 간행했던 데 반해, 조선후기에는 조선의 문인들이 독자적으로 고문선집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조선후기에 주류를 이룬 산문비평론을 크게 구분하면 진한고문론과 당송고문론이라고 하겠는데, 고문선집의 성향도 편집자의 비평의식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고문선집의 경향을 통해 조선후기 산문비평의 흐름을 또 다른 측면에서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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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시대에 편찬 간행된 고문선집들을 개괄하고, 특히 조선후기의 고문선집의 편찬 간행이 갖는 문학사적 의의를 짚어본다. 조선전기의 고문선집들은 대체로 중국의 문선집을 수입하여 그대로 다시 간행했던 데 반해, 조선후기에는 조선의 문인들이 독자적으로 고문선집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조선후기에 주류를 이룬 산문비평론을 크게 구분하면 진한고문론과 당송고문론이라고 하겠는데, 고문선집의 성향도 편집자의 비평의식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고문선집의 경향을 통해 조선후기 산문비평의 흐름을 또 다른 측면에서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This thesis generalize an anthology of classical prose that compiled and published in Chos?n, and consider that's historical significance on literature. An anthology of classical prose that compiled and published in the early Chos?n was republish Chinese anthology, but in the late a literary man compile from an independent point. The theory of prose that constituted the main current in the late Chos?n was the theory of Jin-Han's classical prose and the theory of Dang-Sung's classical prose. Then an inclinations of an anthology of classical prose varied with a standpoint of compiler. On the other side, we hope for have view of flowing of the prose criticism from the current of an anthology of classical p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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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穆 散文의 古文詞에 대하여

이준규

[NRF 연계] 동양한문학회 동양한문학연구 Vol.28 No.28 2009.02 pp.287-312

...古文詞와 관련하여 고찰하였다. 眉叟에 대한 평가에 있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용어가 ‘尙古’인 만큼 이 ‘尙古’를 그의 사상과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로 삼았다. 미수의 정치·사상·문학·서예 등 학술 전반과 관련있는 ‘尙古’ 개념의 所從來를 그의 언설과 문학작품을 통해 살펴보고, 명대 전후칠자의 擬古 論理와 비교 검토해 보았다. 수사기법을 운용한 함축적인 표현과 浩瀚한 氣勢가 돋보이는 작품인 <文學>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미수 자신이 이론적으로 강조하였던 문세의 측면이 창작으로 실천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고문사 실현를 위한 다양한 수사기법은 미수가 전범적 텍스트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學習과 硏鑽을 했는지, 나아가 자신의 고유한 사상과 문학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전후칠자의 의고주의 논리가 허목시대에는 이론적으로 수용하던 차원을 넘어서 창작과 본격 비평으로까지 內的 體化되어 가던 산문사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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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眉叟 許穆(1595~1682)이 東國文章 十八家로 뽑혔을 정도로 문명이 높았음에도 그의 문장이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음에 착안하여, 미수의 산문을 古文詞와 관련하여 고찰하였다. 眉叟에 대한 평가에 있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용어가 ‘尙古’인 만큼 이 ‘尙古’를 그의 사상과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로 삼았다. 미수의 정치·사상·문학·서예 등 학술 전반과 관련있는 ‘尙古’ 개념의 所從來를 그의 언설과 문학작품을 통해 살펴보고, 명대 전후칠자의 擬古 論理와 비교 검토해 보았다. 수사기법을 운용한 함축적인 표현과 浩瀚한 氣勢가 돋보이는 작품인 <文學>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미수 자신이 이론적으로 강조하였던 문세의 측면이 창작으로 실천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고문사 실현를 위한 다양한 수사기법은 미수가 전범적 텍스트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學習과 硏鑽을 했는지, 나아가 자신의 고유한 사상과 문학적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전후칠자의 의고주의 논리가 허목시대에는 이론적으로 수용하던 차원을 넘어서 창작과 본격 비평으로까지 內的 體化되어 가던 산문사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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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刻本 《古文眞寶》에 대한 연구-紹興圖書館 所藏 《魁本大字諸儒箋解古文眞寶》 를 중심으로-

강찬수

[NRF 연계] 한국중문학회 중국문학연구 Vol.32 2006.06 pp.7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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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于 柳夢寅의 古文論에 나타난 六經 중심의 視角

신승훈

[NRF 연계] 동양한문학회 동양한문학연구 Vol.22 No.22 2006.02 pp.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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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于 柳夢寅(1559~1623)은 자신의 시대에 주어진 역사적 소명에 충실한 知性이었다. 그에게 전란 이후의 국가질서의 회복과 문화의 재건은 가장 절실한 임무였다. 따라서 그가 大家文會를 편찬한 것은 文章의 측면에서 전란 이전의 수준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고, 六經을 비롯한 先秦의 문장을 존숭하였던 것도 문장의 이상적인 지표 내지 典範을 제시함으로써 전란 이전의 문화를 복구하려는 노력이었다.역사적 책무에 대한 각성과 六經 중심의 학문성향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주자학에 대한 회의로 전이되었다. 어우의 주자학에 대한 회의가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자체가 이미 이른 시기에 보인 주자학에 대한 반성이라는 의미가 있겠다. 또한 학술사적으로는 조선후기 실학자의 경학에서 볼 수 있는 학풍과 궤를 같이한다는 의미가 있겠다. 상대주의적 시각에서 특정한 학설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고, 古今의 다양한 주석을 폭넓게 채택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의미부여 내지 해석의 관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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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文과 唐代 古文運動과의 관계

이주해

[NRF 연계] 중국어문학연구회 중국어문학논집 Vol.26 2004.02 pp.619-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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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曾國藩的古文理論

金慶國

[NRF 연계] 중국인문학회 중국인문과학 Vol.26 2003.06 pp.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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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玉篇》殘卷 古文 字形의 유래 고찰

金始衍

[NRF 연계] 중국어문학회 중국어문학지 Vol.13 2003.06 pp.1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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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 李定稷의 古文論과 歷代 文評

구사회

[NRF 연계]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어문연구 Vol.31 No.2 2003.06 pp.137-160

...古文論의 구체적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가 제기했던 모든 古文 논의는 ‘法古’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문장의 네 가지 病弊와 法古創新의 문제, 그리고 이상적인 문장을 성취하기 위한 法과 才能, 古文과 솜씨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아울러 이상적인 문장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석정은 ‘식[識]’을 강조하였다. 石亭이 지닌 文論史的 意義는 韓末까지 老論 洛論系 文章家들을 중심으로 계승되던 朝鮮後期의 韓歐正脈이 드디어 호남에서도 석정에 의해 자리를 잡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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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亭 李定稷은 천하에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文보다 강한 것이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석정은 이와 같은 강력한 문장의 힘을 빌려서 韓末의 역사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石亭이 논의한 古文論의 구체적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가 제기했던 모든 古文 논의는 ‘法古’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문장의 네 가지 病弊와 法古創新의 문제, 그리고 이상적인 문장을 성취하기 위한 法과 才能, 古文과 솜씨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아울러 이상적인 문장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석정은 ‘식[識]’을 강조하였다. 石亭이 지닌 文論史的 意義는 韓末까지 老論 洛論系 文章家들을 중심으로 계승되던 朝鮮後期의 韓歐正脈이 드디어 호남에서도 석정에 의해 자리를 잡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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艮翁 李獻慶의 古文論 硏究

이향배

[NRF 연계] 한국한문교육학회 漢文敎育論集 Vol.19 2002.12 pp.427-454

...고문론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어려서부터 사기좌씨장주 등을 비롯하여 제가들의 글을 독파한 간옹은 평생동안 고문을 추구해왔다. 도와 문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간옹은 도가 육경에 있기 때문에 문에서 육경을 근본으로 삼고 제자백가를 우익으로 보았다. 그는 제자백가의 글을 통해 氣變華廉悍感慨 등을 배우고 육경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육경에 침잠하여 正과 常을 축적하여 奇와 變을 이끌어 내야 함을 역설했다. 간옹은 聖賢의 문장과 문사의 문장의 分岐가 氣에서 비롯된다고 파악했다. 성현의 문장으로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養氣와 知言을 제시했다. 養氣와 知言의 관계는 상보적이지만 이중 간옹은 養氣를 통한 知言을 중시했다. 氣를 길러야 知言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문장을 잘하는데는 문로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지언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고인들의 체제를 두루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경 사서의 체재를 유가는 明理를 위주로, 사한가들은 藻華를 위주로 이해했기 때문에 서로 달라졌다고 본 간옹은 의리논변에서는 염락제현을, 문장에서는 당송대가를 법삼아 明理와 藻華를 갖추어 육경사서로 귀숙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간옹의 고문론은 육경사서를 主로 삼고 이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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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간옹의 고문론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어려서부터 사기좌씨장주 등을 비롯하여 제가들의 글을 독파한 간옹은 평생동안 고문을 추구해왔다. 도와 문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간옹은 도가 육경에 있기 때문에 문에서 육경을 근본으로 삼고 제자백가를 우익으로 보았다. 그는 제자백가의 글을 통해 氣變華廉悍感慨 등을 배우고 육경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육경에 침잠하여 正과 常을 축적하여 奇와 變을 이끌어 내야 함을 역설했다. 간옹은 聖賢의 문장과 문사의 문장의 分岐가 氣에서 비롯된다고 파악했다. 성현의 문장으로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養氣와 知言을 제시했다. 養氣와 知言의 관계는 상보적이지만 이중 간옹은 養氣를 통한 知言을 중시했다. 氣를 길러야 知言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문장을 잘하는데는 문로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지언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고인들의 체제를 두루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경 사서의 체재를 유가는 明理를 위주로, 사한가들은 藻華를 위주로 이해했기 때문에 서로 달라졌다고 본 간옹은 의리논변에서는 염락제현을, 문장에서는 당송대가를 법삼아 明理와 藻華를 갖추어 육경사서로 귀숙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간옹의 고문론은 육경사서를 主로 삼고 이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Ganong's paleography. Ganong, who read writings by wise governments like Sagi, Jwassi, and Jangju from his childhood, devoted his lifetime to the study of ancient writings. Ganong thought that Do should be consistent with Mun, made Yukgyeong a foundation, and considered Jejabaekga right-winger. He suggested a way to learn Gi, Byeon, Hwa, Yeomhan, and Gamgae and to approach Yukgyeong through Jejabaekga's writings. He also emphasized that we should accumulate Jeong and Sang and induce Gi and Byeon, absorbed in Yukgyeong. Ganong thought that the power of sages' and writers' writings came from Gi. He suggested the way of Yanggi and Jieon to reach sages' writings. Although Yanggi and Jieon complemented each other, Ganong thought much of Jieon through Yanggi. He thought Jieon possible after developing Gi. That's because he considered that it is necessary to correct Munro in order to write well and it started from Jieon. He preached the necessity of learning the style of the writings by the deceased. Ganong thought Confucianist scholars were different from Sahangas because the one understood the style of Yukgyeong Saseo in fame-wealth-centered way of thinking, while the other in blance-oriented way of thinking. He showed that we should return to Yukgyeong Saseo with the balance of fame and wealth by making Yeomrakjehyeon a rule in Uirinonbyeon and masters of Tang and Song in writing. As a result, Ganong's paleography can be concluded as a discussion of the way to approach Yukgyeong Saseo with taking it as a main 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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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谷 李珥의 古文觀과 그 표현 특성

홍학희

[NRF 연계]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Vol.30 2002.12 pp.22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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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巖 金昌協의 古文 硏究

박영호

[NRF 연계]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Vol.7 1991.12 pp.10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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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泉 申綽의 『 古文尙書』에 대한 견해 연구

민혜영

[NRF 연계]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연구 Vol.75 2022.09 pp.241-266

...古文論爭은 중요한 주제로, 『 尙書 』는 그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경전이다. 宋 이후로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 古文尙書』』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문제 제기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 청대 閻若璩는 치밀한 문헌적 증거를 든 『 古文尙書疏證』을 통해 『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논증하였다. 조선의 학자들도 17세기 이후부터 『 고문상서』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石泉 申綽(1760~1828)은 考證學의 영향을 받아 ‘옛것으로써 옛것을 바로잡는다[以古訂古]’라는 경학 연구방법론을 사용하였다. 그는 漢・魏 전후의 자료를 토대로 철저하게 고증하여 인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의견을 표출하였다. 그는『 상서』를 연구하여 『 古尙書』・『 尙書古注』・『 尙書二十五篇』・『 尙書百篇攷』 등 4책으로 구성된『 書次故』 4책을 저술하였다. 본고는 석천 신작의 『 서차고』 중 『 고문상서』에 대한 의견을 드러낸 『 상서이십오편』을 주요 연구 텍스트로 삼아, 그의 문집 등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보충하여 분석함으로써,『 고문상서』 25편에 대한 그의 견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작에 의하면 공벽에서 나온『 고문상서』는 祕府에 들어가 세상에 행해지지 못하였고, 赤眉之亂에 실전되었다. 그는 현재의『 고문상서』는 梅賾이 지은 것이 아니라 위진시대의 사람이 보완하여 25편으로 만든 것이며, 이것을 진본이라고 誤認한 후대의 인물이 馬融・鄭玄・王肅의 주석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여 僞『 古文尙書孔傳』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위『 고문상서공전』이 위서일지라도 문장이 典雅하다고 표현하여 경전 연구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현재의 「舜典」은 원래 「堯典」의 뒷부분이고, 공벽에서 나온 『 고문상서』에 있었던 「순전」의 내용은 『 孟子』에 언급된 순임금의 일화라고 여겼다. 「大禹謨」의 16字心法 중 앞의 두 구절은『 荀子』「解蔽」에 있었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이것은 본래 『 상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道經”이라는 별도의 문헌에 있었던 것이고, 뒤의 두 구절은 馬融의 『 忠經』에서 『 상서』를 인용한 부분을 가지고 온 것이라 보았다. 한편 「湯誥」는 桀을 정벌하는 내용과 비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각각 2편이 존재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걸을 정벌하는 내용은 본래의 편명이 「湯誓」였으나 후에 「탕고」로 바뀌어 전수되었고, 『 墨子』에 인용된 비를 기원하는 내용은 공자가 刪削하여 전수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泰誓」는 위작임을 단언하면서도, 선대의 많은 학자들이 그 내용의 가치를 인정하고 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신작은 현재의 위『 고문상서공전』이 위작이기는 하나, 전부터 경서로서 계속 전수해왔고 내용 또한 경전에 합당하고 이치가 있다면 폐하지 않고 전승해야 한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孔壁에서 나온 眞本은 아니므로 위『 고문상서공전』의 오류를 바로잡고 원형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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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에서 今古文論爭은 중요한 주제로, 『 尙書 』는 그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경전이다. 宋 이후로 중국의 많은 학자들은 『 古文尙書』』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문제 제기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 청대 閻若璩는 치밀한 문헌적 증거를 든 『 古文尙書疏證』을 통해 『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논증하였다. 조선의 학자들도 17세기 이후부터 『 고문상서』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石泉 申綽(1760~1828)은 考證學의 영향을 받아 ‘옛것으로써 옛것을 바로잡는다[以古訂古]’라는 경학 연구방법론을 사용하였다. 그는 漢・魏 전후의 자료를 토대로 철저하게 고증하여 인용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의견을 표출하였다. 그는『 상서』를 연구하여 『 古尙書』・『 尙書古注』・『 尙書二十五篇』・『 尙書百篇攷』 등 4책으로 구성된『 書次故』 4책을 저술하였다. 본고는 석천 신작의 『 서차고』 중 『 고문상서』에 대한 의견을 드러낸 『 상서이십오편』을 주요 연구 텍스트로 삼아, 그의 문집 등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보충하여 분석함으로써,『 고문상서』 25편에 대한 그의 견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작에 의하면 공벽에서 나온『 고문상서』는 祕府에 들어가 세상에 행해지지 못하였고, 赤眉之亂에 실전되었다. 그는 현재의『 고문상서』는 梅賾이 지은 것이 아니라 위진시대의 사람이 보완하여 25편으로 만든 것이며, 이것을 진본이라고 誤認한 후대의 인물이 馬融・鄭玄・王肅의 주석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여 僞『 古文尙書孔傳』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위『 고문상서공전』이 위서일지라도 문장이 典雅하다고 표현하여 경전 연구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현재의 「舜典」은 원래 「堯典」의 뒷부분이고, 공벽에서 나온 『 고문상서』에 있었던 「순전」의 내용은 『 孟子』에 언급된 순임금의 일화라고 여겼다. 「大禹謨」의 16字心法 중 앞의 두 구절은『 荀子』「解蔽」에 있었던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이것은 본래 『 상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道經”이라는 별도의 문헌에 있었던 것이고, 뒤의 두 구절은 馬融의 『 忠經』에서 『 상서』를 인용한 부분을 가지고 온 것이라 보았다. 한편 「湯誥」는 桀을 정벌하는 내용과 비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은 각각 2편이 존재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걸을 정벌하는 내용은 본래의 편명이 「湯誓」였으나 후에 「탕고」로 바뀌어 전수되었고, 『 墨子』에 인용된 비를 기원하는 내용은 공자가 刪削하여 전수되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泰誓」는 위작임을 단언하면서도, 선대의 많은 학자들이 그 내용의 가치를 인정하고 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신작은 현재의 위『 고문상서공전』이 위작이기는 하나, 전부터 경서로서 계속 전수해왔고 내용 또한 경전에 합당하고 이치가 있다면 폐하지 않고 전승해야 한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孔壁에서 나온 眞本은 아니므로 위『 고문상서공전』의 오류를 바로잡고 원형을 탐색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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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初 三先生이 北宋古文運動에 미친 영향 연구― 歐陽修와 石介의 교유를 중심으로

이승신

[NRF 연계]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중국학논총 Vol.59 2018.03 pp.5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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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yangxiu and Shijie are important politicians, Confucians and writers in Northern Song Dynasty. They are good friends and colleagues. Their literature thought is a part of new movement of the Culture Revolution of poem and prose. Ouyangxiu advocated as representative at that time. In the process Sunfu, Huyuan, Shijie called Songchusanxiansheng are highly influencial figures. Especially Ouyangxiu and Shijie’s companionship is more important. They share thoughts of advancing Confucianism, influencing the Writing style, encouraging people. But they have different opinions in writing style and thoughts. Xikunti, Buddhism and Taoism was violently antagonized by Shijie, but Ouyangxiu has a moderate opposition on them. Ouyangxiu accepted a rhetorical device of Xiku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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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國藩의 序跋类 古文 초탐

김희성

[NRF 연계] 중국인문학회 중국인문과학 Vol.58 2014.12 pp.281-304

...古文分为'序文'、'跋文'、'赠序文'、'寿序文'进行探讨,分析曾国藩序跋的做法及其创作意图。曾國藩文集中序跋类古文著作共有五十九篇,乃议论、叙事时时间杂感情,褒善贬恶与批判时事,反映社会现象,都是寄寓自己的'经世教化'的发为性情之作。透过分析将指出曾國藩序跋类古文所展现的主要思想及独创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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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序为名者,大致可分为'序跋'与'赠文'二体。本文从序跋体类的发展及义界特征, 将曾国藩序跋类古文分为'序文'、'跋文'、'赠序文'、'寿序文'进行探讨,分析曾国藩序跋的做法及其创作意图。曾國藩文集中序跋类古文著作共有五十九篇,乃议论、叙事时时间杂感情,褒善贬恶与批判时事,反映社会现象,都是寄寓自己的'经世教化'的发为性情之作。透过分析将指出曾國藩序跋类古文所展现的主要思想及独创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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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탄《才子必讀古文》의 산문이론연구 - 유종원 산문 비평을 중심으로 -

이문혁

[NRF 연계] 한국중국문화학회 중국학논총 Vol.32 2011.04 pp.61-78

...古文》中柳宗元散文作品點評部分的考察及,《才子必讀古文》和《古文觀止》的比較硏究,就金聖嘆散文理論進行槪括和再整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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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聖嘆是明末淸初著名的文學批評家.他的作品中對後世影響最大的莫過于“金批《水滸傳》和《西廂記》等..他的評點很注重思想內容的闡發,通過”圈點“與”評論“的形式對作品進行批評,幷借題發揮,議論政事,表達自己的思想.而硏究金聖嘆的散文理論,很容易發現,金聖嘆主要是通過對散文的文學作用及其創作方法等問題的點評,闡述他的散文理論.本文力圖通過對金聖嘆《才子必讀古文》中柳宗元散文作品點評部分的考察及,《才子必讀古文》和《古文觀止》的比較硏究,就金聖嘆散文理論進行槪括和再整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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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代의 『說文解字』 古文 연구에 관한 考察

오제중

[NRF 연계] 한국중국언어학회 중국언어연구 Vol.33 2010.12 pp.289-314

...古文, 籒文, 俗字, 奇字等重文. 其中對古文字硏究最重要的字形之一就是古文. 西漢時代孔壁中發見的經書, 漢代人稱它爲古文. 於是許愼認爲他收入 『說文』的古文比籒文更早. 據 『說文』敍許愼所說的古文還包括商周靑銅器銘文,也就是金文. 以後經過淸代學者吳大澂和王國維等人的硏究, 證明 『說文』中的古文其實是戰國時代東方六國的文字, 以及其來源是孔子壁中書和張蒼所獻的古書等. 但是當時段玉裁, 潘祖蔭等有些學者仍然以爲古文的來源是商周金文, 這可能是因爲受到推崇許愼的影響. 本論文以淸代學者對 『說文』 古文的各種理論爲對象, 西周金文和戰國文字的主張進行理論的比較分析, 導出一些可觀的結果. 結論地說, 在吳大澂等學者的硏究基礎上, 王國維等學者可以證明『說文』 古文的眞面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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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文』 裏面, 除了小篆以外, 附錄了篆文, 古文, 籒文, 俗字, 奇字等重文. 其中對古文字硏究最重要的字形之一就是古文. 西漢時代孔壁中發見的經書, 漢代人稱它爲古文. 於是許愼認爲他收入 『說文』的古文比籒文更早. 據 『說文』敍許愼所說的古文還包括商周靑銅器銘文,也就是金文. 以後經過淸代學者吳大澂和王國維等人的硏究, 證明 『說文』中的古文其實是戰國時代東方六國的文字, 以及其來源是孔子壁中書和張蒼所獻的古書等. 但是當時段玉裁, 潘祖蔭等有些學者仍然以爲古文的來源是商周金文, 這可能是因爲受到推崇許愼的影響. 本論文以淸代學者對 『說文』 古文的各種理論爲對象, 西周金文和戰國文字的主張進行理論的比較分析, 導出一些可觀的結果. 結論地說, 在吳大澂等學者的硏究基礎上, 王國維等學者可以證明『說文』 古文的眞面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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