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片康烈의 국권회복운동과 의열투쟁
National Rights Recovery Movement and Heroic Struggle of Pyun Kang­ryul
편강열의 국권회복운동과 의열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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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한국민족운동사학회 바로가기
  • 간행물
    한국민족운동사연구 바로가기
  • 통권
    82 (2015.03)바로가기
  • 페이지
    pp.45-90
  • 저자
    박경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24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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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초록

영어
Pyun Kang­ryul joine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1907 at the age of 16, starting with the Righteous Army led by Lee Kang­nyun. He returned home when he was injured in the Yangju Battle in Gyeonggi Province, and judging that it would be difficult to regain sovereignty only by the struggle of righteous armies, he entered Soongsil School in order to participate in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which was being actively promoted in the provinces such as Pyeongan and Hwanghae, and he extended his activities by joining Shinminhoe. However, soon after he joined Shinminhoe, he was embroiled in the Korean Conspiracy Case which was in fact fabricated by the Imperial Japan and was put into prison. Pyun Kang­ryul took this case as a momentum to fortify his strong commitment to the Korean independence, and started a preparation for a new independence movement. Once out of Seodaemun Prison in 1914, he went to his ancestral home of Gimcheon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to prepare for an armed struggle and was actively involved with Daehan­ Kwangbokhoe which had been organized in 1915 in the city of Daegu. In 1918, he went back to his hometown to lead the March 1st Movement in Yeonbaek, Hwanghae Province.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he joined a secret armed organization called Jubidan in Hwanghae Province, which was controlled by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based in Shanghai, and he led the armed struggle as the representative of Anak Gun. But he was once again detained in Haeju Prison in 1920 for one year and two months on charges of hiding Tongnip Shinmun, the mouthpiece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nd collecting war funds. When he was out of jail in January 1922, Pyun Kang­ryul went to Manchuria as an exile in November 1922 in order to take part in the Korean National Representatives’ Meeting in Shanghai. However, the meeting did not happen and being disappointed by the breakdown of the meeting, Pyun organized Uisungdan in Shanhaiguan in July 1923 with the aim of Heroic Struggle. Uisungdan fought against the Japanese and pro­Japanese Koreans with strenuous activities such as collecting war funds and attacking Japanese government offices, centering Middle Manchuria including Jilin and Changchun. It expanded its forces by establishing an organization networking with other provinces, and at the same time tried to sneak into Korea preparing activities such as the bomb explosion case. In addition, Pyun Kang­ryul made a variety of efforts to improve the living standard of the peasant Koreans who were living in difficulties in Middle Manchuria, while being actively involved in the integration of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in the whole area of Manchuria with Yang Ki­tak who was the adviser of Uisungdan, and also he greatly influenced the organization of Jeongeuibu. Pyun Kang­ryul was arrested in Harbin in July 1924 after a tip­off from a spy who infiltrated Uisungdan as a member. He went through a legal battle for six months, but was eventually sentenced to seven years in prison. He was put in solitary confinement and was serving time in Shinuiju Prison when his health deteriorated and was bailed out in April 1927. However, his health did not get better and he died for his country at a young age of 38, ending his involvement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20 years which had started in 1907.
한국어
본고는 독립운동가 片康烈의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과 중만주지역에서의 의열투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 로 했다. 1892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편강렬은 1907년 16세의 나이에 李康秊부대에서 활동한 것을 시작으 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08년 경기도 양주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의 병활동으로는 국권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당시 서북지방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던 애국계몽운동에 참 여하기 위해 숭실학교에 입학했으며, 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나 신민회에 가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에 의해 조작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즉,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편강렬은 105인 사건 연루를 계기로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의 독립운동이 필요 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914년에 출옥한 그는 선대의 고향인 경상북도 김천으로 내려가 무 장투쟁을 준비하고,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大韓光復會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8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황해도 연백군의 3ㆍ1운동을 주도했다. 3ㆍ1운동 이후에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비밀군사조직인 黃海道籌備 團에 참여해 안악군의 대표를 맡아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0년 상해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을 은닉하고 군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1년 2개월간 해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22년 1월 출옥한 편강렬은 국외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의열투쟁을 목표로 1923년 7월 義成團을 조직하고 길림, 장춘, 카륜 등 중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성단의 주 활동은 일 본인과 친일한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관공서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지방조직과 연락기관을 설 치하여 세력을 넓히는 동시에 국내로의 잠입을 시도했고 폭탄사건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편강렬은 중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이주한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으며, 양기탁과 함께 전 만주에 소 재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그 결과 1925년 남만주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인 正義府가 조직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편강렬은 1924년 7월 의성단에 잠입한 밀정의 밀고로 하얼빈에서 체포되었다. 6개월 간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결국 7년형을 받게 되었다. 신의주형무소 독방에서 복역하던 그는 지병이 악화되어 1927년 4월 보석으로 출옥 했으나 병세가 나아지지 않아 1929년 1월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편강렬은 그동안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도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편강렬은 16살의 어린 나이에 의병에 가담하여 38살에 순국하기까지 한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20여년의 그의 독립운동을 돌아보았을 때, 편강렬은 의병활동, 애국계몽운동, 무장 투쟁, 의열투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 등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목차

I. 머리말
 II. 국내에서의 의병 참여와 계몽운동
  1. 李康秊 의병부대 참여 
  2. 新民會 활동과 105인 사건 연루
  3. 慶尙道와 黃海道에서의 독립운동
 III. 中滿洲에서의 의열투쟁
  1. 義成團 조직
  2. 의성단 활동
 I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저자

  • 박경 [ Park Kyung |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한국민족운동사학회 [The Association For The Historical Studies On Korean National Movement]
  • 설립연도
    1984
  • 분야
    인문학>역사학
  • 소개
    한국민족운동사학회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 등으로 민족의식의 고취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던 시기인 1984년 10월 9일 한글날 박영석, 박현서, 손보기, 신용하, 윤병석, 이연복, 이현희, 정하명, 조동걸, 추헌수 등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본 학회는 대학교와 연구기관 등에 소속된 연구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근현대 민족운동사에 관한 내용을 월례발표회를 통하여 발표하고 학술지인 《한국민족운동사연구》에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근현대 민족운동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규명하고, 회원과 일반인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함양함을 목적으로 한다. 아울러, 본 학회는 학술연구의 기초가 되는 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하고 있으며, 학술회의와 강연, 신문기고, 인터뷰, 사적지 답사 등을 통하여 민족운동에 관한 내용을 일반 국민에 널리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광복회 등 민족운동 관련 단체에 자문을 함으로써 올바른 민족운동사의 정립에 기여하고 있다. 그 동안 본 학회는 70여회의 월례발표회와 20여회의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그 내용으로 총 26권의 학술지를 발간하였으며, 20여권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학술, 연구 부분에서의 기여로 2000년 말 국가보훈처에서 수상하는 보훈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실시한 학회지 평가에서 A등급을 받은 바 있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는 정보화, 개방화 사회에 발맞추어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2000년 4월 15일 학회의 회칙을 개정하여 논문심사 등 여러 부문에서 투명하고도 형평에 맞게 학회를 운영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국제화 사회에 걸맞게 게재하는 논문의 영문초록을 학회지 및 홈페이지의 소개하고 있으며, 중국, 일본, 미국 등지에도 학회 이사를 두어 명실상부한 국제적 학회로 발전해나가려고 하고 있다.

간행물

  • 간행물명
    한국민족운동사연구 [Journal of Studies on Korean National Movement]
  • 간기
    계간
  • ISSN
    1226-9980
  • 수록기간
    1986~2018
  • 등재여부
    KCI 등재
  • 십진분류
    KDC 911 DDC 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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