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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都城의 始末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Baekje Capital
백제 도성의 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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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기관
    중앙문화재연구원 바로가기
  • 간행물
    중앙고고연구 바로가기
  • 통권
    제13호 (2013.11)바로가기
  • 페이지
    pp.1-34
  • 저자
    朴淳發
  • 언어
    한국어(KOR)
  • URL
    https://www.earticle.net/Article/A219697

원문정보

초록

영어
This article manipulated the problems with the foundation and transfer of a series of Baekje capital. The first capital, called Habookwylesung(河北慰禮城), assumed to be located in some place of northen part of Han river, where archaeological evidence has been found never. Hanamwylesung(河南慰禮城) transferred to the southern part of Han river, has been attributed to Pungnab(風納) earthen wall site in which the village surrounded ditches had erected ca. in 2nd century A.D, and modified to earthen wall town in the late 3rd century A.D. with the occurrence of full fledged Backje state. Thereafter, often called Hansung(漢城) period`s Backje capital had been composed of two earthen walled town ; above mentioned Pungnab, and newly founded Mongchon(夢村) site that used for another palace since 371 A.D. Hansung period`s Backje capitlal was been fallen by Goguryo(高句麗) attack at 475 A.D. when most of Backji people had been moved into Goguryo with consequently vacant city excepting Mongchon earhen wall reused as Goguryo military camp. e emergent situation of Hansung capital falling compelled Baekje move her capital to Ungjin(熊津) that is now Gongju city Chungnam province. Ungjin assumed to one of the base of late Hansung period`s Baekje regional ruler. But was Ungjin never suitable place to long-term capital. ereby assumed to begin soon new capital building project at another place. The result of some long range plan of new capital was Sabi(泗沘) capital, where is now Buyo prefecture Chungnam province. Sabi was the last capital of Baekje from 538 to 660 A.D, when Tang(唐) and Shilla(新羅) allied forces fell the capital. On the falling of Sabi capital was been moved a number of resident into Tang, thereby the cease of city function. After the withdrawal of her main force Tang established ruleing system of Xiungjindudufu(熊津都督府) at Sabi, assumed to Busosansung(扶蘇山城) fortress, the back secret garden of Baekje`s palace. Roof tile ornament with Datang(大唐) letters, lotus leafs and Subu/Shou Fu(首府) letters stamped roof tile etc. ever found in Buyo well fits such historical situation. In Korean ancient history academic circles has been there Some argument around the first location thereafter movement of Xiungjindudufu to Gongju city. Archaeological evidences above mentioned clearly tell us that the location of Xiungjindudufu was Buyo, the last capital of Baekji from 660 to 672 A.D the final withdrawal of Tang ruling system. Lastly, a noteworthy nding is that Shou Fu word already used in the half of 7th century and this is the oldest case in the world.
한국어
본고는 백제 각 시기 도성의 定都와 廢都 과정을 검토하였다. 한성기 도성은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으로 이해되는데, 하북위례성의 위치는 확실치 않다. 하남위례성은 풍납토성으로 판단되며, 대략 2세기대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환호 취락이 백제 국가 성립기인 3세기 중후엽에 성벽취락으로 전환되었다. 거의 동시기에 몽촌토성 도 축조되었으나, 왕의 거소로 사용된 시기는 근초고왕대인 371년 “移都漢山” 이후이다. 그 무렵 지명의 漢子化와 더불어 慰禮城은 漢城으로 표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성은 475년 함락 직 전까지 풍납토성(北城 혹은 大城)과 몽촌토성(南城 혹은 王城)으로 구성된 양성 체제로 유지되 다가 주민의 다수인 8,000여 명이 고구려 지역으로 遷徙되면서 도시적 기능이 상실되고, 그 가운 데 몽촌토성은 고구려 군사의 거점으로 전환되었다. 그 무렵 고구려군은 금강유역 이남의 대전지 역까지 남하하여 熊津으로 천도한 백제를 위협하였으며, 남한지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횡혈식석실묘가 분포하는 경기 남부 수원·용인~충북 충주 이북은 고구려의 지방으로 실질적인 지배가 이루어졌던 고고학적 근거로 이해된다. 한성 함락의 위급 상황을 맞아 웅진에 정도한 배경은 한성기에 이미 그곳에 군사 거점성이 마 련되었고 王·侯와 같은 지방 수장의 居官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지형적 한계로 인한 잦은 풍수해와 도시 공간의 부족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비로 천도하였다. 천도 이후 웅진은 5方 가운데 하나인 北方으로 전환되었다. 사비 신도성 조성 과정에 소요되는 工役과 신도성 거주 인구 확보를 위해 대략 武寧王 시기에 “內外遊食者歸農” 등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으며, 그 가운데 車嶺 이북 한강 이남 주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사비도성 내부 최하층에서 출토되는 고구려계 토기가 이후 백제의 泗沘樣式 土器로 정착되고 있는 점은 그러한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비도성의 폐도는 660년 7월 당과 신라 연합군에 의해 도성이 함락되고 왕을 포함한 12,000 여 명의 주민이 당으로 압송되면서 도시 기능이 소멸되었으나,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한 사비도성 핵심지역은 백제 고지 지배를 위한 唐 熊津都督府 관부의 소재지로 전환되었다. 大唐銘 와당· 당 연화문 와당 출토 와요지·首府銘 인각와 등이 그러한 사정을 전하고 있다. 수부명 인각와의 “首府”에 대해 그간 구체적 검토 없이 백제가 그들의 都城을 自稱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首府”라는 단어 자체가 문헌에 등장하는 시점은 淸代 1697년에 판각된 『貴陽通志』에서이며, 지방의 최고 행정단위인 省 소재지, 자치주나 자치구의 정부 소재 지, 속국이나 식민지 지배기구 소재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부 여 출토 수부명 인각와는 “首府”의 最古 용례로서 그 자체 동아시아적 중요성을 가진다. 수부명 인각와는 대당명 와당 등 당 웅진도독부 존속기간에 제작된 당계 와당과 공반되는 점이나 백제 인각와의 원형 印郭과 다른 장방형 인곽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백제 멸망 이후에 제작된 것 으로 판단된다. 부여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는 당 웅진도독부 관련 고고자료로 보면, 그간 고대사 학계에서 통설로 여기고 있는 662년 웅진도독부 공주 移置說은 성립되지 않는다.

목차

국문요약
 I. 序
 II. 漢城期
  1. 문헌사료에 보이는 한성기 도성의 변천
  2. 고고자료로 본 한성기 도성
  3. 한성 定都와 廢都
 Ⅲ. 熊津·泗沘期
  1. 熊津 定都 背景
  2. 泗沘 遷都와 廢都
 Ⅳ. 考古資料로 본 唐 熊津都督府의 所在
  1. 大唐銘 瓦當
  2. 唐 蓮花紋 瓦當
  3. 首府銘 印刻瓦
  4. 웅진도독부 소재지
 V. 結
 참고문헌
 Abstract

키워드

백제 도성 하남위례성 한성 웅진성 사비도성 웅진도독부 수부 풍납토성 몽촌토성 Baekje capital Hanamwylesung Hansung Ungjin Sabi Xiungjindudufu Shou Fu Pungnab Mongchon

저자

  • 朴淳發 [ 박순발 | 충남대학교 ]

참고문헌

자료제공 : 네이버학술정보

간행물 정보

발행기관

  • 발행기관명
    중앙문화재연구원 [Central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 설립연도
    2000
  • 분야
    인문학>역사학
  • 소개
    문화재의 보호, 관리, 조사, 발굴 및 그 활용과 전국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전담법인기관과의 유기적인 협력체제 유지를 통하여 민족 문화의 보존ㆍ보급ㆍ선양ㆍ전승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1970년대부터 국토개발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현대생활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각종 대규모 토목공사가 계획ㆍ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땅의 형질변경을 수반함으로 인해 문화유적의 훼손과 파괴를 초래한다. 1990년대 초까지의 매장문화재 조사는 국립박물관, 문화재연구소, 대학박물관 등에서 주도하여 왔으나 매년 증가하는 문화재조사 수요를 감당하기 힘든 실정으로 사업시행의 지연과 문화재관련 학술자료획득의 양면에서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됨에 따라 매장문화재 전담법인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상시 문화재조사 체제를 유지하며, 문화재조사와 관련하여 사업시행자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긴급발굴에 따른 졸속 발굴 등을 예방하여 철저한 학술자료 획득 및 전문인력의 양성을 통한 전반적 발굴수준의 향상을 위하여 중앙문화재연구원이 설립되었다.

간행물

  • 간행물명
    중앙고고연구 [Journal of Central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 간기
    연3회
  • pISSN
    2233-6230
  • 수록기간
    2005~2026
  • 등재여부
    KCI 등재
  • 십진분류
    KDC 911 DDC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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